한국의 넷플릭스?

국내 기업 가운데 넷플릭스와 견줄만한 곳은 어디일까? 넷플릭스의 기업문화를 소개한 <파워풀>의 공동 역자이자 신문사 선후배 기자인 두 사람이 '한국판 파워풀'을 써보자며 의기투합한 뒤 내뱉은 첫 질문이었다. 국내 케이블방송 플랫폼으로 출발해 이제는 넷플릭스에도 드라마 예능 콘텐츠를 제공하는 미디어 콘텐츠 기업 CJ ENM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두 기업 모두 플랫폼 사업으로 시작해 콘텐츠 제작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콘텐츠 경쟁력은 스마트폰과 빅데이터·인공지능 등 기술혁신이 가져온 '플랫폼 경제'의 핵심 엔진이다.

 

넷플릭스는 2007년 인터넷으로 드라마 몰아보기를 가능케 한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2012년 첫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 <릴리해머>를 선보이며 콘텐츠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2018년 콘텐츠 투자에만 80억 달러(약 9조 3000억 원)를 쏟아부었다.

 

CJ ENM은 온미디어 엠넷 등 초창기 케이블방송채널사업자(PP)에 뿌리를 두고 있다. CJ오쇼핑의 미디어사업부문에서 인적분할된 오미디어홀딩스가 CJ그룹의 미디어 계열 5개사(CJ미디어, 온미디어, 엠넷미디어, CJ인터넷, CJ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합병하면서 2011년 3월 CJ E&M이 탄생했다.

 

통합 CJ E&M은 플랫폼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 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2018년 7월 CJ E&M이 다시 CJ오쇼핑에 흡수합병되며 사명을 CJ ENM으로 바꿨다.

 

CJ ENM은 이제 드라마 예능 분야에서 지상파 방송 3사를 압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비밀의 숲> 등을 제작했으며, <너의 목소리가 보여>는 전 세계 9개국에 포맷이 팔리며 국내 음악 예능 콘텐츠 중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케이콘(KCON)', '엠넷아시안뮤직어워즈(MAMA)' 행사를 여는 등 글로벌 무대에서 한류 콘텐츠를 선도하고 있다.

 

CJ ENM이 케이블방송에서 콘텐츠 기업으로 변신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도 변화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대기업이 말이다.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그의 책 <히트 리프레시>에서 "모든 기업이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 중이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들도 건설업, 금융업, 전자기기 제조업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빅데이터를 축적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내세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사업내용과 비전을 바꾸려면 체질 개선이 먼저다.

 

국내 대기업집단이 창의적인 콘텐츠 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CJ ENM의 기업문화와 인재관리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10개월간 CJ ENM의 핵심 관계자들을 세 차례 심층 인터뷰를 하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터뷰 대상자의 익명 요청에 따라 내부자의 시선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서술했다.

조직의 비전을 명확히 하면 경쟁사가 또렷이 보인다

외부에서는 CJ ENM을 '한국의 넷플릭스'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CJ ENM 내부에서 지향하는 모델은 월트 디즈니식 라이선스&머천다이즈(licensed&merchandise) 사업이다. 과도하게 플랫폼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글로벌 최대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이하 IP) 보유 기업인 디즈니처럼 콘텐츠에 기반한 IP 사업 모델을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디즈니는 <알라딘>, <라이언킹>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알려졌지만 콘텐츠 제작보다 IP에 기반한 캐릭터 상품화 및 테마파크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이 더 큰 회사다.

 

CJ E&M은 2017년부터 기업의 비전을 고민한 결과, IP를 활용한 상품 판매를 하지 않고 콘텐츠만으로 승부를 보기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프로듀스 101> 콘서트만 열어서는 돈을 벌기 힘들고 응원봉, 포토카드, 스티커, 플래너, 메모지 등 굿즈를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디즈니식 '콘텐츠 커머스 기업'을 표방하며 2018년 7월 1일 CJ E&M과 CJ오쇼핑이 합병한 CJ ENM이 탄생한 배경이다.

 

홈쇼핑 업체였던 CJ오쇼핑과 미디어 콘텐츠 기업 CJ E&M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지에 관심이 쏠린다. E&M과 오쇼핑 부문은 통합법인 내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CJ E&M의 크리에이터를 지원하는 MCN(Multi Channel Network) 사업 조직인 '다이아TV'와 오쇼핑의 V커머스* 콘텐츠 제작센터인 '다다스튜디오'는 조직을 합쳤다. 오쇼핑에서만 판매되는 온리원 상품을 개발하는 동시에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브랜드와 IP를 기반으로 한 상품화, 교육, 커머스를 지원하고 관련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는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 동영상을 이용한 상거래

 

합병을 거치면서 CJ ENM의 비전과 미션이 진화했다. 오쇼핑과의 통합 이후 조직의 비전은 'Asia No.1 Total Content Company'에서 '글로벌 융복합 콘텐츠 커머스 기업'으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전 세계인의 일상에 생동감을 주는 글로벌 No.1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로 다시 업데이트했다. 경영방침에도 IP 경쟁력 확보, 콘텐츠 프리미엄 가치 극대화, 디지털커머스 사업 가속화를 추가하는 등 IP를 전면에 내세웠다.

 

조직의 비전과 미션이 진화·발전하면서 회사는 기업문화 혁신을 위한 사내 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뒀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운 비전과 미션에 제대로 공감할 수 있어야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성과향상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이사는 주니어 간담회와 팀장급 간담회를 통해 직원을 직접 만나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소통했다.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출입문 곳곳에 포스터와 내부 동영상을 지속적으로 노출해 변화되는 조직의 미션과 비전을 전파했다.

 

놀라운 점은 CJ ENM 직원 아무나 붙잡고 경쟁사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디즈니'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IP 수준 차이는 크지만, 사업영역과 조직의 비전, 미션이 디즈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고 경영진이 구성원들과 소통한 결과다. '글로벌 일류 기업이 되자'와 같은 공허하게 들리는 구호가 회사 로비에 걸려 있는 것과, 직원들이 실제 글로벌 1위 기업을 경쟁사로 생각하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업문화에 대한 이해가 구성원 개인과 조직 전체의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다.

진짜 소통이 되고 있는지 확인해라

CJ ENM은 조직의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 행동원칙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물어본다. 매년 두 차례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설문조사 '사이다'는 중요한 소통창구다. 속 시원하게 다 말하라는 의미에서 사이다로 불린다.

 

직원들은 회사에서 실시하는 각종 설문조사를 귀찮아하기 마련이다. 의견을 내도 반영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불신이 쌓여서일 테다. CJ ENM이 처음 사이다를 시행할 때도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접수된 의견 열에 하나는 반영되고,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솔직한 의견을 내놓는 직원들이 많아졌다.

 

회사는 사이다를 통해 각종 제도가 실제 얼마나 실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직원들의 불편사항을 듣는다. 또 리더들이 이를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고 개선을 위한 피드백을 준다.

 

신입사원의 의견은 더욱 민감하게 듣는다. CJ ENM에선 대표이사가 직접 젊은 직원들과 소통하는 '주니어 간담회'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허민회 대표이사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 6월까지 거의 매주 주니어 간담회를 열었다. 5년 차 이하 모든 직원들을 10명씩 나눠서 점심이나 티타임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회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주니어 직원들의 불만사항이 공유됐다.

 

모든 간담회마다 인사지원실 직원이 배석해 나온 의견을 기록하고 개선된 내용에 대해 피드백을 줬다. 뒤에 소개될 신입 PD 교육프로그램도 주니어 간담회에서 나온 건의사항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입직원과 임원 간 멘토링 제도도 운영한다. 임원마다 5~7명의 멘티를 배정해서 한 달에 한 번 점심이나 저녁을 먹거나 공연을 함께 보면서 신입 직원들이 조직 생활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듣고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신입 PD는 "팀 회의 시간에 팀장이 끊임없이 의견을 말하라고 독려한다"며 "설사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매년 8월엔 CJ그룹 모든 계열사가 기업문화 진단을 실시한다. 그룹의 비전, 미션, 핵심가치, 행동원칙에 대한 구성원의 이해도를 진단하고 각 조직 리더가 이를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으로 구성된다. 이 평가점수는 계열사 임원진의 핵심성과지표(KPI)에 반영된다. 직원들에게는 기업문화의 내용을 환기하는 기능도 한다.

 

직원들과 기업문화에 대한 소통을 할 땐 인사지원실 직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CJ ENM은 사업본부별로 2~5명의 인사 담당자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본부 회의에 거의 다 들어가며 상시로 소통하고 있다.

 

사업부서 입장에서 평가를 담당하는 인사부서는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사 담당 직원이 해당 사업부서 직원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직원 대 직원으로 신뢰 관계가 쌓이면, 장벽은 허물어지고 솔직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게 해라

통합 CJ E&M이 출범 당시 던진 승부수는 스타급 인재 영입이었다. 2013년 KBS 간판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을 진두지휘했던 나영석 PD를 영입하며 <꽃보다> 시리즈, <삼시 세끼> 시리즈 등이 차례로 흥행했다. 드라마 부문에서는 KBS에서 넘어온 신원호 PD가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성공시켰다. 역시 KBS 출신으로 CJ ENM 계열사인 스튜디오드래곤 소속의 김원석 PD는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 등 성공작을 잇달아 냈다.

나영석 PD가 '시즌제' 예능 형식을 도입한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시리즈 ©CJ ENM스타 PD들이 CJ ENM을 선택한 배경에는 제작자들이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CJ ENM의 기업문화가 있었다. 나 PD는 2013년 12월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특집 아니면 정규 편성에 국한되는 지상파 방송사에 비해 프로젝트를 비정기적으로 낼 수 있는 점이 제작자 입장에서는 유연하게 느껴진다"며 CJ ENM 제작환경의 이점을 설명했다.

 

회사는 PD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보장한다. 그래야 제작자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던 신원호 PD가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분야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문화였기에 가능했다.

 

유연한 제작환경을 제공한 덕분에 내용과 형식 면에서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다. 나 PD는 동일한 출연진이 다른 여행지나 장소에 등장하며 촬영하는 '시즌제' 예능 형식을 정착시켰으며, 최근엔 '5분 예능'을 새롭게 선보였다. TV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옮겨간 이용자의 니즈에 맞춰 지난 9월 시작한 '신서유기 외전'을 TV에는 예고편 성격의 5분 분량으로 편성하고, 유튜브에 20분 분량의 '본편'을 내보내는 실험을 했다.

 

김원석 PD는 '러브라인'이 없는 직장인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생>부터, 판타지적 내용을 담은 범죄 스릴러 장르를 시도한 <시그널>, 최초로 상고시대를 다룬 <아스달연대기>까지 새로운 도전을 계속했다.

 

제작자들은 성과연동형 인센티브를 받는다. 나 PD는 2018년 40억 7600만 원에 달하는 그룹 내 최고 연봉을 기록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은 것이다. 나 PD의 실제 급여는 2억여 원이지만 제작 콘텐츠 시청률, 화제성, 콘텐츠 판매액 등에 따라 지급되는 성과급에서 '대박'이 난 덕분이다. 신원호 PD(27억 4600만 원)와 김원석 PD(21억 7780만 원)도 2018년 20억 원이 넘게 몸값을 올렸다.

 

CJ ENM은 핵심 인재군으로 구분된 PD에 대해 높은 연봉 인상률과 인센티브를 제시하고 있다. 내부의 크리에이터가 처우 수준이 낮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공중파 방송 3사가 갖고 있던 인센티브 구조의 불합리함과 경직성을 깬 것이다.

 

반대로 성과가 좋지 않을 땐 어떻게 될까. 제작자들에게 시청률은 일종의 성적표다. CJ ENM 역시 콘텐츠 시청률을 성과연동형 인센티브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성과를 시청률로 따지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실패를 하더라도 새로운 도전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제작자의 창의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다. 성과가 저조할 경우엔 제작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회를 박탈하기보다는, 뒤에서 소개될 PD 교육 등 창의성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성공 가능성을 끌어올리고 있다.

주전선수로 빨리 뛰게 해라

CJ ENM이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잇따라 성공시킨 배경엔 젊은 PD의 창의적인 역량을 극대화한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CJ ENM은 방송 3사 비해 PD의 입봉 시기를 3년가량 앞당겼다.

 

CJ E&M은 2011년 출범하자마자 신입 PD를 대거 공개 채용하며 방송 3사 중심이었던 예능 방송 경쟁 구도에 포문을 열었다. 이후 5~6년 차 젊은 PD들에게 입봉 기회를 제공하는 파격 행보를 했다. <윤식당>의 이진주 PD, <알쓸신잡>의 양정우 PD, <신혼일기>의 이우형 PD 모두 CJ E&M 공채 1기로 5~6년 차에 입봉해 메인 PD로 활약하고 있다. 방송 3사 PD들의 입봉 시기가 보통 8~10년 차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빠르다.

 

'나영석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은 공동연출을 맡은 나 PD로부터 조언과 코치를 받는 협력 제작 프로세스를 통해 입봉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꽃보다> 같은 시즌제 예능에서 조연출로 경험을 쌓은 뒤, 한 시즌의 메인 PD를 맡았다.

 

협력 제작 프로세스에선 '진짜 협력'이 이뤄졌을까. 이진주 PD는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영석 PD는 후배 연출자의 자율성을 인정한다"며 "후배가 어떤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무시하거나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정우 PD는 한 인터뷰에서 나 PD에 대해 "의사 결정을 중요한 순간에 해주고 내가 실수를 해도 만회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평했다.

 

후배 PD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면서도,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엔 나 PD가 후배 PD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방식으로 협력이 가능했다. 이로써 창작 열의가 왕성한 젊은 PD들을 후보 선수(조연출)로 벤치에 앉아있게 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주전 선수(메인 PD)로 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나영석 PD와 이진주 PD가 공동 연출하는 '협력 제작 프로세스' 방식으로 만들어진 예능프로그램 <윤식당> ©CJ ENMCJ ENM은 젊은 PD들이 주전선수로 빨리 뛸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에서도 변화를 줬다. 올해부터 신입 PD들은 입사 3~4년 차까지 1년에 2개씩 프로그램에 관여하면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찾아 5년 차부터는 하고 싶은 장르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한 프로그램을 맡으면 메인 PD 밑에서 조연출로 오래 일하는 도제식 관행을 깼다.

 

이는 신입 PD들 사이에서 '메인 PD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불만이 나오자 회사 차원에서 개선책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선배 PD가 누구든 기본적으로 PD로서 갖춰야 할 역량 육성의 기회를 균일하게 얻고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게 하자는 니즈를 반영했다.

 

누가 낸 기획안인지를 드러내지 않고 제작할 만한 프로그램을 고르는 '블라인드 피칭'도 1년에 두 차례 정례화했다. 젊은 PD들의 입봉 시기를 앞당기고 그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한 제도다.

내부에서 인재를 키워라

<파워풀>의 저자인 패티 맥코드 전 넷플릭스 CTO의 말처럼 인적자원개발(HRD)는 정말 시간 낭비일까? 넷플릭스가 외부에서 최고의 인재를 끊임없이 수혈받기 위해 '채용'을 최우선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CJ ENM은 보유 인력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내부에서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방점을 찍고 있다.


CJ ENM은 통합 CJ E&M 출범 초기엔 스타급 인재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전략을 썼지만, 최근에는 내부에서 스타 PD로 성장할 만한 인재를 육성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2019년 새롭게 도입한 '직급별 크리에이터 교육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젊은 PD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업 메인 PD들과 인사지원실의 HRD 담당자들이 1년간 태스크포스팀을 운영하는 과정을 거쳐 마련됐다.


제작 직군의 크리에이터 인력은 입사 15년 차까지 총 6단계로 구분돼 교육을 받게 된다. 입사 1~2년 차, 3~4년 차, 5~6년 차, 7~9년 차, 10~12년 차, 13~15년 차로 나뉜다. 사람의 성장 단계별로 발달에 필요한 자극을 제공하는 것처럼, 직급별로 필요한 교육과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1~2년 차 PD는 방송업계 관행인 도제식 교육에 직장 내 교육훈련(OJT)을 접목한 'D-OJT'를 받게 된다.

 

그동안 해당 메인 PD가 알아서 후배들을 가르치던 것을 1~2년 차에 기본적으로 습득해야 할 내용들을 정리한 매뉴얼대로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5~6년 차에 빨리 입봉 할 수 있도록 신입 PD들의 균질한 역량 개발을 돕기 위해서다.


2019년 3월 시행한 '데뷔스쿨(Debut School)'은 가장 반응이 좋았던 교육으로 꼽힌다. 이제 막 입봉해 차기 작품 기획을 고민하거나 입봉을 준비하고 있는 입사 7~9년 차 PD들이 대상이다. 지난 3월 드라마·예능·음악·애니메이션 분야 PD 15명을 선발, 1주일간 국내에서 무엇을 벤치마킹할 것인지를 사전 준비하고, 2주간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제작 스튜디오와 IT 기업 11곳을 방문했다.

 

참가한 PD들은 글로벌 제작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지와 콘텐츠 소비 패턴 및 최신 IT 트렌드를 배우면서, 메인 PD의 역할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내놨다.
지난 3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인 '데뷔 스쿨'에 참가해 미국 LA에 위치한 '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방문한 모습 ©CJ ENM

중간관리자를 변화의 지렛대로 삼아라

CJ ENM은 젊은 PD들을 빨리 주전 선수로 뛰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간관리자의 리더십 개발을 중시하고 있다. 중간관리자에게 힘을 실어줘서 이들을 기업문화 변화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전략이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중간관리자를 축소하고 있는 기업들의 최근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경제 성장기 한국 대기업에서 중간관리자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전도 상당했다. 과장은 자기 자리로 배달된 신문을 볼 수 있는 자리였고, 임원이 된다는 것은 자기만의 사무실과 차량, 비서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특전과 승진제도는 회사를 다닐만한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플랫폼 경제가 도래하면서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들의 상황이 바뀌었다. 중간관리자를 많이 늘릴 수도, 과거만큼의 특전을 줄 수도 없게 됐다. 이제 중간관리자는 밑에서 치이고, 위에서 깨지기 일쑤다. 조직이 지속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만큼 중간관리자들의 동기부여가 더욱 어렵고도 중요해진 것이다.

 

CJ ENM은 중간관리자의 양적 성장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질적 성장을 유도하는 길을 선택했다. 임원 수를 늘리지는 못하지만, 리더십 육성을 통해 역할 범위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중간관리자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이다. '선배가 롤모델이 되지 못하는 조직에선 후배들도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한국적 기업문화 정서가 깔려있다.

 

2019년 하반기부터는 16년 차 이상의 책임프로듀서(CP)를 대상으로 '글로벌 인사이트 트립'이 운영된다. 15년 차 이하 PD의 교육 프로그램이 직간접적으로 제작 경험을 확장하기 위한 학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16년 차 이상의 선배들은 후배를 양성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통찰력을 전수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치중했다. 직접 제작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후배 PD들에게 "이건 어때?"하며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컨대 이탈리아라는 큰 주제를 정하면 전문 가이드를 붙여 세부적인 문화적 배경과 역사를 폭넓게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식이다.

 

CJ ENM이 2016년 그룹 내에서 처음 도입한 '리더십 다면진단' 역시 평가보다는 리더십 코칭에 방점이 찍혀있다. 다면진단에서 부하 직원, 동료, 상사가 평가한 내용을 분석해 리더에게 피드백을 준다. 리더의 부족한 점과 구성원들이 원하는 사항은 물론 솔루션까지 담은 자세한 내용이 두꺼운 책자 형태로 전달된다.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CJ ENM이 직원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각종 HRD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넷플릭스와 가장 차별화된 지점이다. 넷플릭스는 '저성과자프로그램'이나 '갈등해결 커뮤니케이션' 같은 교육들이 효과가 없을뿐더러, 참가자에겐 시간낭비라고 여긴다. 상대적으로 해고가 자유롭고 인재수급이 용이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문화에선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인다.

 

반면 CJ ENM을 포함한 국내 대기업 문화에선 기업이 구성원의 성장과 발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해고가 쉽지 않은 영향도 있겠지만 '교육을 통해 직원의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을 계속 채용하는 것보다 기존 직원을 보유하는 것이 비용 측면에서도 효율적이라고 여긴다.

창의적인 성과를 내려면 쉬게 해라

4차 산업혁명 시대 최대 화두는 창의력이다. CJ ENM은 콘텐츠 기업답게 직원들의 창의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이 많다.

 

'창의적으로 몰입해서 일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쉬게 해야 한다.' 이것이 '창의, 자율, 몰입'을 기업문화의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CJ ENM이 생각하는 답이다.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로는 'BI(Break for an Invent)'가 대표적이다. 2주에 한 번 근무시간 내 4시간 동안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회사는 직원들이 무엇을 하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제작인력은 프로그램이 끝나면 2~3주간 해외로 '프로젝트 휴가'를 떠난다. 개인 휴가를 붙여 쓰면 한 달 정도 긴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 입사 5년 차 PD는 전원 '창의휴가'란 이름이 붙은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창의란 것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2019년 7월부터 주 52시간 근로제도가 본격 시행되면서 휴식 제도가 보다 강화됐다. 이제 '창작=무한시간'으로 여기던 오랜 습관은 버려야 할 것이 됐다. 메인 PD들은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에 '조연출의 프로젝트 휴가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연차와 BI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따라 각 조직을 신호등 색으로 구분해 분기별로 평가하고 있다. 휴식이 필요한 조직은 빨간색, 보통이면 노란색, 휴식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으면 초록색으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