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와 과거제도

이 제도가 그렇게 쉽고 빠르게, 확고하게 이 땅에 자리 잡은 이유는 뭘까?

나는 그것이
과거제도의
전통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신춘문예가 도입될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다수 응모자의 문예 창작 능력을 누군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뛰어난 작품이 무엇인지 가릴 수도 있다.'라는 개념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 시대 과거제도의 상당 부분은 작문이었다.

 

과거제도는 대규모 공개 시험을 거쳐 엘리트를 채용하는 공채 시스템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시스템은 민주주의보다 900년 이상 먼저 이 땅에 왔다. 고려 광종이 중국에서 들여왔다. 과거제도에 대해서는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째, 사회적 낭비가 심했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의 나이는 평균 36.4세였다. 10대 중반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쳐서, 합격하는 데 20년이 걸린 셈이다. 60대, 70대까지 시험을 준비하는 장수생도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시험을 치기도 했다.

 

문과 시험(정시 초시)을 치는 사람이 정조 때에 이르면 10만 명이 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응시자가 20만 명을 넘었다. 최종 합격자는 한 해 서른 명 남짓이었다. 청년 수십 만 명이 한창 일할 나이에 수십 년 동안 공부에만 매달렸다. 실생활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유교 경전 공부였다. 그걸 외국어 원전으로 공부해서 외국어로 답안을 쓰는 훈련만 주야장천 받았다.

 

둘째, 정작 필요한 인재는 뽑지 못했다. 최종 합격자들이 과연 관료로서 유능한 인재들이었을까? 좋은 성적을 받아 높은 자리에 임명되는 사람일수록 암기력과 논리력, 그리고 중국어 독해와 작문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기술이나 경제, 민생은커녕, 그 시대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행정에 대해서도, 군사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사회생활을 오래 했다거나 처세에 능한 사람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