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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현주 공과대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이현주 공과대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들어가며

인터뷰 일시/장소 : 8월 10, 11일/KAIST 연구실

 

이현주 공과대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KAIST 전자및전기공학부 80여 명의 교수들 중 최초의, 유일한 여성 교원이다. 지난해 임용된 새내기 교수다. 1999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KAIST에서는 탤런트 이휘향 씨가 전자과 여교수 역으로 등장했었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2015년에야 실현된 것이다. 단연 학내외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해외 파견으로 홍콩 유학길에 올라 싱가포르를 거쳐 미국 MIT에서 학사를, 스탠포드에서 석박사를 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상태로 호된 사춘기를 치렀다. 지금은 다문화적인 이력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솔직하면서도 친화력 있게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두 차례 대화를 나누며 관찰한 바로, 그는 사람을 만나 조직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시키는 일에 거의 타고났다고 해도 좋을만큼의 관심과 흥미와 재능이 있어 보였다. 학자로서의 그의 행보도 물론 주목할 만 했지만,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로서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결혼과 가정, 모성, 여성의 커리어에 대해 가장 최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었고, 또 기존에 들었던 어떤 여교수님들의 사례와도 사뭇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결혼제도와 모성이라는 환상에 대해 그처럼 솔직하게, 양가적인 마음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그는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의 '자아분열'을 집약해 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여자는 결혼과 출산 이외의 선택지에 대해 결혼이나 출산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결혼과 출산 전후의 삶이 이전까지와는 극명하게 달라지는 데도, 그런 중요한 선택에 대해 충분히 교육받거나 훈련받지 못했다. 그 선택이 사실은 자율적인 선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회적 압력일 수 있는데 말이다.

 

또한 많은 여자들이 결혼과 출산 때문에 생기는 기회비용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로, 마치 당연히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이전까지 쌓아올린 것들, 특히 커리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좌절감을 맛보는 이들도 많다. 나는 그와 자라온 환경은 전혀 달랐지만, 처해 있는 상황과 고민에는 거의 100퍼센트 이입했다.

이현주 교수의 말에는 대화는 유머가 가득했다. 그가 고른 단어들에는 묘한 위트가 있었고, 표정에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스타워즈의 BB-8이 놓여있었다. ⓒ이진주

여자라도 억울하지 않았었다

인터뷰 질문
1. 먼저 부모님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1-1.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따님에게 기대가 많으셨는지, 아드님만 편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버님 당신의 인생은 어떠셨나요? 성취가 큰 유명인사인지, 평범한 가장이셨는지, 좌절을 겪으셨는지, 그런 모습이 따님/아드님께는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1-2.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자녀들에 대해선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지요. 워킹맘이었는지, 주부였는지, 살림의 여왕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성공한 '여류'였는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셨는지, 페미니스트셨는지, 어머님께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나누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2. 형제 자매들에 대해 여쭙습니다. 형제 자매는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하니까요. 어떤 관계였나요? 공부로 경쟁했나요? 부모님 사랑을 두고 다퉜나요? 어떤 특질들을 나눠 받고, 무슨 장난을 쳤나요? 바비? 키티? 레고? 로봇?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셨습니까?

이현주 교수는 오혜연 전산학과 교수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해외 체험을 했다.

"아버지는 파이낸스 쪽에 계셨어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한국에 살았고, 홍콩 주재원을 거쳐 말레이시아로 발령을 받으셨어요. 언니와 저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해외생활을 했어요. 말레이시아로 떠나실 때 저는 싱가포르에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갔고, 언니는 곧바로 미국으로 갔죠.

 

그 시절 다른 집들은 해외근무 후 귀국할 때 아들은 미국으로 보내고, 딸은 한국으로 보냈었어요. 저희 집은 자매니까 그런 일은 없었죠. 아버지는 저희 자매를 아들처럼 키우셨어요. 집에서는 한 번도 여자라서 억울한 일은 겪은 적이 없어요."

인터뷰를 했던 여교수들은 자매들 가운데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들 딸 차별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뜻이었다. 또한 부모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딸들이 공부하고 일하는 것에 대해 강한 지지를 보냈다.

"대신 딸이라고 보듬어주지 않고 되게 강하게 키우셨어요. 여자도 커리어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고, 공부든 일이든 엑설런시(Excellency)를 강조하셨어요. 항상 제가 잘 하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회사 생활을 많이 하셨으니까 현실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어떤 직원들이 일을 잘한다는 얘기들이요. 일할 때는 되게 프로페셔널하고 임신 막달까지 일하다가도, 돌아서면 가정에 올인하는 그런 여직원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게 옳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버지 기준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죠. 커리어에서는 엑설런트 하면서도 그렇다고 또 일에 올인은 하지 말고, 그런 요구요. 아빠가 보기에 좋은 여직원은 일과 가정, 양쪽에 밸런스를 잘 잡는 사람이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일할 때 여성이란 걸 굳이 감추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얼마든지 여성으로서 어필할 수 있는데 장점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요. 남성처럼 할 필요 없다고, 그런 건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하셨죠. 왜 굳이 갖고 태어난 메리트를 버리느냐고요.

 

아빠는 여자가 설득하는 방식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런 식으로 아버지는 커리어, 어머니는 인성을 담당하셨어요."

파이낸스 분야 역시 여성에게 친절한 곳은 아니었다. 그 바닥에서 성공하는 여성의 자질 또한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업무의 가정생활의 완벽한 조화,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목표는 일하는 여성에 대한 과거의 이상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원래 고등학교 가정 과목 선생님이셨어요. 아버지를 따라 해외로 나가면서 집에서 살림을 하셨지만, 자기 커리어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으셨어요. 굉장히 가부장적이에요.

 

버릇없는 것, 까다로운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고 저희 자매를 키우실 땐 그런 부분을 되게 중시하셨어요. '여자는 까탈스러우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제 성격 중 강한 부분을 많이 톤다운(Tone down) 시키셨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불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회생활 하는 데는 도움이 많이 되기도 했어요. 엄마가 기를 죽이면, 아빠는 오히려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해야 된다고 하셨죠."

오혜연 교수와 마찬가지로 이현주 교수 역시,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딸들에게 해외에서의 교육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취를 지원하는 동안, 본인의 커리어를 희생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여성상을 내재화하여, 공부 잘 하는 딸들이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소 경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콩 국제학교→싱가포르 UWC→MIT

3. 주위 환경에 대해 여쭙습니다.
사는 지역이나 환경에 특징이 있었나요? 대치동 한복판의 경쟁적인 환경이었는지, 해외 체험을 했는지, 달동네나 시골 깡촌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런 특성이 본인의 지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4. 학교생활에 대해 여쭙습니다.
과학고나 외고 등의 특목고 출신이신가요? 경시대회나 우열반, 특별활동 같은 걸 경험하셨나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인상적이었던 체험이 있으신가요? 선생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걸까요?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면?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기까지 연결돼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5. 성적에 대해 여쭙습니다.
학력고사 혹은 수능, 내신은 어떠셨나요? 어떤 이유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셨습니까? 성적에 맞추신 건지, 특별한 희망이나 비전이 있었는지, 부모나 선생님, 지인들의 강압에 의한 건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막상 들어온 학교/학과는 적성이나 기대에 부합했는지요? 혹 재수/전과/유학/취업 등을 통해 진로를 바꾸셨는지요?

6. 교우관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친구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요? 혹여 잘난 척한다고 왕따나 폭력을 겪지는 않으셨나요? 반장, 회장을 도맡아 하셨나요? 학교에서는 시험성적 외엔 존재를 드러나지 않았나요? 단짝이 있었나요?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그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사람은 일생에 걸쳐 변한다지만, 이현주 교수에게는 더 급격하고 본질적인 변화의 시기가 존재했다. 해외로 뿌리를 뽑아 옮겼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 게 좋았어요. 혼자 있으면서 사색하고, 공상 좋아하고요. 자존심은 셌던 것 같아요. 전교 1등하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는데, 충분히 만족했어요. 송파 쪽 학군이 좋은 곳에 살아서 학원 뺑뺑이를 도는 데는 익숙했어요. 하교길에 학원차 타고 독서실까지 가서 자정에 돌아오는 생활을 다 같이 했죠.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홍콩으로 나가게 된 거예요.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이게 되게 축복받은 환경이었더라고요. 고등학교도 국제학교 다녔으니까요. 중학교 땐 사춘기 시작하자마자 홍콩으로 건너가서, 영어를 못하니까 '왕따' 되고 그랬어요. 숙제하는 것도 못 알아듣고 좀 모자란 취급 받는 아이,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고 나서는 '내가 공부라도 잘해야지' 하고 공부를 했죠."

철들기 전의 아이들은 정글 같은 생태계를 이룬다. 학교나 교사 차원의 제약이 없다면, 강자와 약자는 명확한 위계를 이룬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제로라도 자기 자신을 열어야 했다.

"국제학교에서 가장 쇼킹했던 건 드라마 수업이었어요. 건너가기 전까지 학원 뺑뺑이 돌다가 그런 걸 배우려니, 상상도 못하죠. 둥그렇게 앉아서 다 쳐다보는데 어색한 가운데 영어로 연기를 해야 했어요. 시키니까 했는데 애들은 웃고요.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스스로를 강제적으로 열어 보이는 체험이었어요.

 

살다 보면 조개껍데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되게 안티 소셜(Anti-social)해지는 날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영어를 배우고, 살아남으려면 나를 열어야겠다 그랬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부럽기 짝이 없는 환경이어도 한 꺼풀만 열어 보면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다. 해외체험이 그렇다. 한국 사회에선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단지 한 언어에 능숙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건 최상급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특히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획득하게 해준다거나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힐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자녀에게는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도전일 수 있다.

"중학교 때 간 거니까 한국어를 완벽하게 배운 다음에 영어를 배운 거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나쁜 게 아니었지만, 그때는 자아가 완전하게 생기기 전이라 사춘기 시절을 혼돈 속에서 보냈죠. 영국 아이들만이 아니라 선생님들한테도 엄청 서운했거든요.

 

어느 날 숙제를 열심히 해갔더니 '누가 도와줬느냐'고 물어서 엄청 속상한 일도 있었어요. 영어를 못하면 선생님들이 불러서 따뜻하게 대해주는 게 아니라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보내라고 하고요.

 

영어랑 관련한 건 아무 것도 못했어요. 영어, 역사, 종교 그런 건 아무 것도요. 대신 수학, 과학 그런 데서 성적을 받았어요. 물리를 잘했죠. 하도 영어 때문에 무시를 당해서, 책 하나 갖다 놓고 번역해서 외우고 다시 외우고, 남들 한 시간 공부할 때 저는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 거예요.

 

영어는 점수가 안 나오는 게 당연한데, 역사는 아무리 잘 썼다고 생각해도 항상 B, C인 것이 이해가 안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말로 하는 것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구나' 싶어져요. 역사 에세이라고 줄곧 팩트만 갖다 나열했거든요. 타고난 게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다행히 고등학교 때 반전이 있었다.

"싱가포르 UWCSEA(United World Colleges South East Asia)로 고등학교를 간 다음에 완전히 달라졌어요. UWC(United World Colleges)는 전세계적으로 체인이 있는 학교 네트워크예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나 영국 찰스 황태자가 UWC 회장을 지냈죠. 

 

'멀티컬츄럴(Multicultural)'을 내세우는 곳이에요. '국가 간의 장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경계가 없는 한 가족이다,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 학교 설립목표가 그거니까 무조건 그에 따라야 해요. 졸업하려면 무조건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그래서 사회봉사가 머릿속에 박혀있었어요.

 

영어를 잘 못해도 당연히 놀리지도 않고요. 선생님들도 오픈 마인드였어요. 학생들도 다같이 어울리고 기숙사도 열려 있었죠. 왕따 같은 건 전혀 없고 너무 좋았어요. 그 때 성격이 완전 좋아졌어요."

인터뷰 내내 이현주 교수는 솔직했고, 잘 웃었고, 사용하는 단어마다 위트가 있었다. 외로웠던 시절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일까. 

"미국 MIT가서는 또 완전히 컬쳐 쇼크를 겪었어요. 아무리 국제학교를 다녔지만, 홍콩이나 싱가포르 모두 동양이었잖아요. 동양의 국제학교는 서양과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보더리스(Borderless)'를 외치며 서로 돕고 어울리는 문화에서, 개인을 강조하는 미국 문화로 들어가니까 정말 다르더라고요.

 

MIT에서 만난 아이들은 정말 단 한 번도 다른 걸 생각해 본 적 없고, 수학과 과학만 보며 자란 아이들이었어요. 엄마가 시켰든 스스로 좋아서 그랬든, 그런 정도의 아이들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니까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요. '나는 기숙사 생활 해봤고 얘네는 처음이니까 커뮤니티를 만들어줘야겠다' 그런 오지랖을 떨기 시작했어요.

 

국제학생회에서 1학년 때부터 활동하고 2학년 때 회장을 했죠. 다른 봉사활동 동아리도 많이 하고요. 그 때 배운 건 오히려 역설적으로 '난 참 리더십이 없구나' 그런 걸 느꼈어요. 타고난 리더십이 없어요.

 

제가 신입생이던 당시 회장이 되게 멋있었어요. 인도계 미국인인데 말을 너무 잘해서 미팅을 마칠 때쯤엔 모두가 소명감을 갖고 일을 나눠 들고 나오는 거에요. 제가 회장일 땐 제 성격이 너무 소심하고 소극적이어서 남을 못 시켰어요. 그 일을 다 떠안고 하려니까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교수가 된 뒤에는 역할을 잘 배분합니다.

 

국제학생회에선 업체의 협찬을 받고 행사를 되게 크게 해요. 코리안, 타이, 등등 국가별로 조직해서 밥도 팔고 축제 준비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내가 이벤트 플래너를 했었어야 하나 그랬어요. 숙제하는 거 보단 재밌으니까요.

 

대부분이 파이낸스를 복수전공해서 뱅킹 업계에서 일해요. 돈을 엄청 벌고 있어요. 그나마 공부 중시하는 한국 친구들은 석사, 박사까지 했고요, 일본 친구들도 그렇고요."

얼마나 재미있었을지 상상이 갔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천재 혹은 천재에 가까운 친구들과의 교류. 그런데 한계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헤어지다 보니까, 저는 사람을 되게 아까워해요. 외국 친구들은 당시는 좋은데, 학교를 떠나고 나면 만날 수가 없어요. 각자 사는 데도 너무 멀어지고요.  

 

관계에 연연하는 편이예요. 이전부터 3-4년마다 거주지를 옮기는 주기가 있었거든요. 너무 좋은데 헤어지면 평생 못 보잖아요.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못 만나는 건, 어쩌면 사람이 죽는 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득바득 이익 챙기는 거보다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 주변 사람한테 잘해줘야 되겠다 그랬던 것 같아요.

 

스탠포드에 가서는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많기도 했고요. 한국에서 쭉 공부하다가 대학원을 미국으로 온 친구들은 가족들이랑 쭉 함께 자란 거잖아요. 뭔가 저한테 없는 안정감 같은 게 있어 보여서 부러웠어요.

 

주변 사람한테 많이 휘둘리지 않는 중심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되게 좋아보였어요. 저는 언제나 제 자신보다는 주변 사람이 더 중요했거든요. 다행히 결혼하고 애 낳으니까 안정감이 생기네요."

정체성의 문제가 한 개인에게 이토록 뿌리 깊고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것인 줄 몰랐다. 아이를 유학보내는 부모가 갖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고백이었다.  

"혼자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좋아보이면서도, 오히려 '가족이라고 꼭 같이 살아야 되나' 그런 생각도 있어요. 부모님이 서운하실 수도 있지만, 오래 떨어져 지내다가 귀국하니 처음에는 낯설었습니다. '다 같이 모여 살면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정답인가' 하는 의문이 들죠.

 

시댁은 부모님이 엄청 가족을 챙기는 타입이에요. 어머니가 진짜 좋으세요. 며느리가 서울에서 살다가 혼자 대전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저 같아도 한 소리 했을 거 같아요. 가족이 흩어져 살아야 하잖아요. 당신도 당연히 속이 좋지 않으셨겠죠. 그런데도 아무 말씀 없이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시고, 당신 딸이 커리어를 쌓는 것처럼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다. 활달한 성격과는 별개의 것이었고, 계산된 겸양 같은 것과도 달랐다. 그건 정말로 자기가 가진 것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믿고 있었다. MIT를 간 것도, KAIST 교수가 된 것도 진심으로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성인이 돼서도 흔히 갖기 쉬운 자기확신이나 에고(Ego)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천주교 신자셨어요. 제게 너는 정말 많이 가지고 태어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죠. 엄마가 '믹스드 메시지(Mixed Message)'를 주시긴 했어요.

 

어렸을 때 한 번은 올백을 받았어요. 당연히 칭찬해 주실 줄 알았는데,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네' 그러시는 거예요. 맥이 쭉 빠졌죠. 아, 내가 한 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셨어요. 선생님이셔서 그런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워낙 많이 보셨고, 그 애들이 갖는 에고란 게 사실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저한테도요."

'믹스드 메시지', 우리 사회의 잘난 여자들이 흔히 받아온 주문. "너는 대단하지만, 사실은 별 게 아니다. 아니, 너무 별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남자아이에게는 자존감을 부풀리도록 교육하는 다수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양육 방식. 누구의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게 보편적인 사회적 코드였다.

여전한 자아 찾기

7. 기억에 남는 스승/제자에 대해 여쭙습니다.
저는 학문적인 가족관계에도 관심이 많은데요, 대학 입학 전이나 후에 롤모델로 모실만한 분을 만나셨는지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만한 제자를 만나셨는지요? 학문만이 아니라 전생애적인 관점에서도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멘토링의 관점에서든, 갈등의 관점에서든 나누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고등학교 이중언어 교실의 영어 선생님이 너무나 좋은 분이었어요. 영국 분이셨는데, 한 나라에 오래 뿌리 내리고 살지 못한 우리들만의 '위어드(Weird)'한 문화를 너무 잘 이해해 주셨어요. 홍콩의 중학교에서는 '무조건 네가 틀렸어. 이게 옳은 거야' 그렇게 배웠는데, 이 학교에서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의 자아 찾기', '멀티컬츄럴(Multicultural)의 자아찾기' 그런 걸 읽고 우리에게 딱 맞는 수업을 해주셨지요."

인터뷰 중 옛 스승을 떠올리던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저 드디어 스스로를 이해했어요!

 

제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어요. 중학교 때는 정체성에 혼란이 왔고, 고등학교 때는 개방적인 다문화 기숙사에서 열린 사회를 겪었죠. 그러다 미국에선 또 다른 백인 개인주의 사회의 문화충격을 받았고요.

 

이 세 가지가 제 속에서 충돌하고 있어요. 그 와중에 저는 아버지의 당부대로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맞추며 잘 살고 싶었던 거예요."

남편과 아이가 있고, 직업을 찾은 지금도, 자기 안에서 그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아를 찾고 있다고 고백했다.

"저는 단 한 번도 외국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엄마 말씀대로 저는 보수적이 돼요. 밥 못 챙겨주고 함께 살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죠. 그러다가 또 유럽식으로 생각하면 자유롭게 살고 싶어져요.

 

미국에서는 가족과 함께 여행 가고 캠핑 가고 그런 게 자연스러웠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오니까 '백플래시(Backflash)' 되면서 모두가 야근을 하고 일에 찌들어 힘들게 살고 있어요.

 

저희 랩 학생들은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제가 어떤 때는 보수적인 예의를 강조하다가 어떤 때는 자유롭게 발언하는걸 원하니까요. 이 부분은 고민을 많이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찾는 이 시대의 여자들이 갖는, 일치하지 않는 모순이 그의 삶 속에도 존재했다.

과학하는 '여자'이기에

8. 여성으로서 과학/공학 분야를 공부하고 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여쭙습니다.
여자가 왜 이과를 가는지 같은 질문에 부딪힌 바 있으신지요?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으신 적은요? 남성이시라면 동료 여학생이나 여교수님들께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유리천장'이나 '새는 파이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과 커리어의 양립이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관용어들인데요, 실제로 여성이라는 게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 장벽이 되는지, 본인이 경험하거나 관찰하신 바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유럽 투어 갔다가 우연히 한국 남학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자기 실험실에는 여자가 없는데, 여자가 있는 게 도움이 안 된다고 단언을 하더라고요. 무거운 장비도 안 들고 민폐만 끼친다고요.

 

미국은 일적인 면에서 여성을 이퀄(Equal)하게 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없어요. 저는 부탁하기 싫어서 제가 장비를 안고 돌돌 돌리면서 건물에서 건물로 직접 옮겨 와서 실험을 했었어요. 미국에선 메인스트림에 들어가려면 열심히 해야 해요. 남자들만큼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요.

 

그런데 한국에선 오히려 미국보다 여성을 더 챙기는 것 같은 문화가 있어요. 처음 들어와선 대단히 임프레시브(Impressive) 했죠. '여자는 힘든 일 하면 안 된다', '무거운 거 들면 안 된다', 그렇게 '보호'하는 느낌인데요. 여성을 약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일에서는 공평하지가 않더라고요. 일에서는 공평했으면 좋겠고, 일상생활에선 보호받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둘 다 가질 수는 없겠더군요."

재미있는 관찰이었다. 전자과의 첫 여교수로 들어왔을 때 어떤 부담을 느꼈을까.

"두 가지 감정이 들었어요. 첫째로, 저는 역차별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부담감을 느꼈어요. 제가 '역차별 받아서 왔다'고 하니까 다른 여교수님들이 되게 싫어하셨어요. '그게 아니라 네 실력'이라고 정정해 주셨죠.

 

이미 십 몇 년씩 잘 하고 계신 문수복, 박수경 교수님 등이 불러서 밥 사주시고, 너무 서포티브(Supportive)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선배 여교수님들이 북돋아 주시기는 하지만, 저는 같이 공부했던 동기들 생각을 하다보니 책임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이 분야에 15년 있었으니까 정말 잘하는 남자 동기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런 친구들도 교수되기 힘들어서 어디라도 들어가려고 자리를 찾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한편으론 이런 기회가 주어졌으니 기회를 잘 살려야지,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제가 속한 공동체가 기회를 줬을 때, 첫 몇 명이 잘해야 다른 여자 후배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갈 것 같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한 몫 하게 될 것 같아요. 퍼포먼스도 퍼포먼스지만, 여자도 커리어를 남자만큼 데스퍼레이트(Desperate)하게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이번 총장님, 저번 총장님 두 분께 너무 감사드리고 있어요. 정말 KAIST 여기는 천국이죠. 여교수님들이 그래도 10퍼센트 가깝게 있고, 핵심 그룹에 있는 거잖아요.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아요.

 

저도 석박사 때 또래들은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 세대는 항상 걱정은 많은데 물어볼 사람도 별로 없고요. 여자 선배들이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지 않으니까, 진로를 바꿔볼까 그런 걸 상담할 수가 없었던 거죠.

 

오히려 여기 오니까 선배들이 많고, 문제가 있으면 달려가서 상담하고 그러니까 너무 좋아요. 교수란 게 상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료로 받아들여 주시니까요."

1년차 허니문이라지만, 그 역시 KAIST와 사랑에 빠진 여자들 중 하나였다.

"저는 교수를 정말 원했던 이유가, 뭔가 사회적으로 안정이 된다면 여학생들을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어요. 한국 사회에선 교수직이 제일 효과적인 것 같아 보였죠. 100프로 연구를 사랑했다기보다는요. 저는 흥미가 다양하고 모임 만드는 걸 좋아해요. 국제학생회 활동 같은 건 공대생치고는 좀 안 어울리는 활동들이었죠.

 

학교에 오면 학생들과 바로 인터랙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어요. 나이 차가 있으니 바로 어울리지는 못하고, 밥이라도 사주고 하는 거지만요. 테뉴어를 따면 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려고 고민 중이에요. 이런 액티비티는 정말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교수 사회, 학계라는 곳은 남자들한테도 크리티컬(Critical)해요. 아주 월등히 뛰어나야 '아, 잘하는구나' 인정해 주죠. 성과를 내기 전에 너무 알려지면 끝이 별로 안 좋더라고요. 특히 여자들은요.

 

김빛내리 교수님(서울대 생명과학부) 같은 분이 여러 명이 나오면 그게 답인 것 같아요. 자기 분야에서 진짜 잘하는 톱클래스 연구자 여러 분이 생길수록 '여자도 잘하는구나'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특정 성이 이공계 영역에 더 적합하다는 주장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선천적 재능에는 차이가 없다고 본 것이다. 

"미국에 유명한 광고가 있었어요. '하늘은 왜 파란색이에요.' 딸이 물으면 '네 눈빛이 너무 밝아서야.' 그렇게 대답하는 거였는데, 여자아이라고 논사이언티픽(Non-sicentific)하게 대답하면 안 된다는 캠페인이었죠. 그런데 저도 어릴 때 차를 좋아했지만, 지금 제 아들이 환장하는 것처럼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는 꿈이 과학자였어요. 그래서 좀 헷갈려요.

 

사회에서 아무 인풋을 안줬을 때 과학을 좋아하는 여성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MIT 여자들 중에 정말 잘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은 악바리라고 봤어요. 남자애들이 공부를 잘하면 탁월하다고 보면서요.

 

조교 시절 시험 채점을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여자애가 점수를 잘 받았어요. 잘하는 여자애구나 하고 저는 너무 뿌듯했는데, 교수님은 '열심히 했구나' 그렇게 판단하시곤 잘한 남학생에게는 '똑똑하구나'라고 평가를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남학생이 성실했고 여학생이 똑똑한거일수도 있는데... 타고난 재능에 대한 편견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이 "가장 높은 수준의 수학과 과학 영역에는 남녀 간의 선천적인 소질 차이가 있다"고 발언했다가, 격렬한 반발과 불신임 끝에 결국 총장직을 사임하게 된지 꼭 10년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심지어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런 종류의 생각을 갖고 있다.

'여적여'가 불가능한 과학계

9. 여자들끼리의 관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그 담론이 통용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실제 경험한 여성들과의 관계는 어떠십니까?

"미국에서 유학하다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 어떤 유명한 잘 나가는 여자를 아주머니들이 욕하는 걸 들었어요. '쟤 이혼했다며', '애가 아프다며' 그런 험담이었어요. 프로페셔널과 가정을 왜 같이 거론하는지 저는 이해를 못했어요. 더구나 아이가 아픈 게 엄마 탓은 아니잖아요. 여자가 여자를 평가할 때 되게 짜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모르는 아주머니들 말고 실제 세계에서는 그런 게 없었어요. 워낙 여자가 없었으니까요. MIT 전자과에는 여자가 10%, 스탠포드가 20% 정도 됐을 거예요. 유난히 저 있을 때는 기계과보다 적었어요. 여자가 여자를 적으로 만들 만큼의 수가 없었어요. 수업 들으면 나 말고 한두 명씩 더 있는 정도였으니까요."

KAIST의 여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애닯아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이유였다.

성(Sex)이 중요하진 않지만...

10.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의견을 여쭙습니다.
'엔지니어처럼 생긴 여자' 논쟁이 났을 때, 일부러 섹시한 옷에 가운을 걸친 사진을 올린다거나 하는 저항운동이 있었어요. 여성성이나 섹시함을 극대화해 남성들의 호감을 사는 '여왕벌' 타입의 여성들도 있지만, 남자들에게 직업적으로/학문적으로 진지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외모를 망치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쪽이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IT 다닐 때는 대충 편하게 입고 다녔어요. 얼굴이 작아 보이는 패인 셔츠에 반바지를 즐겨 입었는데요, 스탠포드에 와서 지금 남편이랑 사귀는데 '옷 다 버리라'고 하더라고요. 남자들이 가슴을 본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었어요. 미국에선 남자친구가 옷차림에 대해 간섭하는 건 '어뷰즈(Abuse)'라고 그래요. 하지만 제 쪼개진 자아 중 하나가 보수적인 거라서 순순히 받아들였어요. 이젠 파인 옷이 없죠.

 

한국 사회는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치마를 입고 가면 다들 '오늘 어디 가?' 그러죠. 저쪽에선 그냥 관심을 표현한 건데 이쪽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요. 

 

한 번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누군가 제게 '박사처럼 입고 댕겨' 그러셨어요. 그 당시는 기분이 되게 나빴지만 여기서 도움은 됐어요. 사회생활 할 때 나의 룩이 믿음을 주냐, 안주냐 갈릴 수도 있는 거니까요.

 

여성성, 남성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프로페셔널로 보이는 게 중요하죠. 예를 들면 정장 같은 거요. 여성은 셔츠에 치마에 갖춰 입는, '(잡)인터뷰룩' 있잖아요. 저도 KAIST 교수 인터뷰 때는 그렇게 입었어요. 지금도 편하면서도 정장 같은 느낌을 주는 원피스에 카디건을 입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어떤 설문조사를 했는데, 남자는 청바지 입는 게 더 지니어스해보이고, 여자는 하이힐에 펜슬 스커트 받쳐 입는 게 그렇다고 나왔더라고요. 그것도 일종의 편견이겠죠."

미국 생활을 경험한 KAIST의 젊은 교수들은, 원칙적으로는 프로페셔널은 옷차림이 아니라 일로 평가돼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 사회가 유독 타인의 옷차림에 관심이 많은 걸 불편해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사회의 속성에 동화되고, 보수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학생들에게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는 학생들이 뭘 입든 상관이 없는데요, 딱 한 가지 모자를 쓰고 들어오는 건 거슬리더라고요. 미국에서는 그게 예의 없는 거라서요. 이유를 물어봤더니 머리를 안 감아서 그렇대요."

어찌 보면, 그것은 한국적 예의차리기의 한 방식이었으니, 그는 웃고 넘어갔다.

유일한 페미니즘 수업 수강자

11. 페미니즘에 대해 여쭙습니다.
수업이든 학회든 동아리든 선배든 책으로든, 여성주의나 양성평등적 시각을 접하신 바 있으셨는지요? 그것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스토킹이나 성희롱 등의 문제를 겪은 바 있으십니까? 겪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니면 해결하지 못했는지, 어렵지만 말씀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서도 의견 들려주세요.

그는 남녀를 떠나, 학부 시절 최소한 한 번이라도 정식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들었다고 고백한 유일한 교수였다. MIT 시절의 일이었다.

"학부 때 수업을 들었어요. 교양 차원에서 누구나 들어야 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들은 건 '사이언티픽 페미니즘'이었습니다. 예전부터 남자들이 과학을 해왔기 때문에 생겨난 잔재들을 지적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저희가 쓰는 부품 이름도 피메일 코넥터(Female Connector), 메일 코넥터(Male Connector)고요. 신호분석 분야의 대가가 교과서를 집필할 때마다 항상 예시로 쓰던 이미지가 있었어요. 모자를 쓴 여자였는데, 알고 보니 그가 AV 성인물 배우였던 거예요. 

 

이 수업을 들은 시기 이후에 뭔가 불평등을 겪은 적이 없어서 페미니즘에 대해 잊고 있었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이미 미국은 평등 수준에 올라왔구나' 생각했어요. 디스커션을 해 보니 수강생들 중 엄마가 일 안하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거든요."

여자가 일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서, 페미니즘을 지성인의 교양으로 가르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불평등이나 성희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위축되는 게 있었어요. 제가 여성으로서 외모가 이쁜 편이 아니어서요. 20대 초반에는, 남자들이 여자의 외모에 대해 얘기하면 위축됐어요. 남자친구들의 관심사항은 부위별로 참 디테일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종아리 길이가 허벅지 길이보다 길어야 된대요. 당연히 날씬해야 하고요."

첨언을 하자면, 그는 예뻤다. 미의 기준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디 가서 위축될 만큼 모자라지 않았다.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만한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작아지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극복을 했죠. 여자의 외모에 대해 지적하던 친구들의 여자친구들을 보면 연예인과는 다소 거리가 멀더라고요. 그 여자친구들을 모함하자는 게 아니라요.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해 입으로 말해왔던 건, 그냥 하나의 로망이었던 거예요. 현실세계의 여자친구들을 보면서 깨달음이 왔어요. 내가 저 말들에 상처 받을 필요가 없구나, 무시해야겠구나.

 

저는 지금까지도 자존감이 가장 큰 이슈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어릴 때 한국식 교육을 받아서 그럴 수도 있고요. 한국에서 어릴 때 항상 '못 한다, 못 한다'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웬만큼 잘하지 않고는 칭찬을 안 해줘요. 미국에서 되게 충격적이었던 게, 어느 아빠가 아이 스키를 가르치는데, 애가 넘어졌어요. 그런데도 너무 잘했다고 재능 있는 거 같다고 칭찬을 하더라고요.

 

수학도 그래요. 처음 유학을 가니까 애들이 아는 것도 없는데 되게 당당해요. 제가 보기에는 거의 초등학교 수준인데요. 중 2 때 학교에서 하루 종일 나눗셈을 배우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애들이 전혀 위축감이 없어요. 못한다는 것에 대한 위축감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100프로 중에 1프로를 못하면 비난받는데. 그게 굉장히 낯설면서도 부러웠어요.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 중에서도 특히 여자아이들에 대한 교육이에요. 난이도가 똑같은 걸 주고 풀게 하면, 남학생들은 10개 중 6개만 맞아도 되게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여학생들은 10개 중 4개나 틀렸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 정확하게 그런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겉으로라도 자신감 있어 보여야 하지 않을까 노력을 많이 해요. 자존감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한국 여자들 중 내가 만난 많은 이들은 아예 탑클래스가 아니라면 섣불리 도전하지 않으려 했다. 여자아이들에게 도전하고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 특히 여자들이 적은 이공계 관련 영역에서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직접 도구를 사용하고, 기계를 만져보고, 키트를 조립하고 부수는 과정 말이다.

어떤 남자와 살아야 하나

12. 실례가 되는지 알면서도, 여쭙게 되어 송구합니다. 매리털 스테이스(Marital Status)를 여쭈어도 될까요?
어떤 분과 결혼하셨나요? 아직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다녀오셨나요? 어떤 자질을 가진 분을 찾고 계시나요? 많은 학생들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결혼과 커리어의 관계입니다. 파트너를 찾는 방법부터 시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 있으시다면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3. 역시나 실례되는 질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두셨습니까?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인생에 어떤 의미였나요? 아이를 품고 낳고 키운다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와 양립할 수 있는 일이었나요? 육아휴직 등의 모성보호 제도는 어땠나요? 양육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살림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들려주세요. 제자들과 자녀를 키울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현주 교수는 스탠포드 유학 시절 만난 남자와 결혼해 두 살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 모 대기업에서 일하는 남편은 서울에서, 본인은 대전에서 지내는 주말 부부다. 아이는 친정어머니께 맡겨 키우다가 주말마다 올라가서 본다. 유학시절에도 가족과 떨어져 있었고, 새로 이룬 가정도 당분간은 이런 형태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가족이란 것이 꼭 서로 모여 살며 부대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선,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둘째도 갖고 싶고, 언젠가는 합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남편은 새벽 6시 반 차를 타고 나가요. 밥은 사 먹고요. 청소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번씩 와서 해주시는 정도예요. 제가 주말에 가서 음식을 해놓고 얼려놓기도 하고, 이마트 배송을 활용해 장도 봅니다.

 

결혼이란 건 자신의 영역을 조금 내어주고 서로를 초대한 걸 텐데요, 서로 힘이 되자고 초대해 놨더니, 막상 직장에서 돌아와 보면 와이프도 없고 아기도 없고 그러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남편을 생각하면, 제 마음 속에 있는 보수적인 부분이 계속 저를 나무라요.

 

아이에 대해선 오히려 모성애가 약한 편이예요. 가서 보면 이쁘지만, 일하는 동안에는 별달리 생각나지는 않아요. 모성애를 떠나서 제 친구들을 보면 육아 때문에 직장도 칼퇴근하고 여러 가지로 희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당연히 직장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평가를 잘 받을 수가 없죠.

 

여자에게 육아와 커리어의 양립은 아직까지 많이 힘든 것 같습니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니 칼퇴하는 직원에게 직장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평가를 잘 주진 않겠죠. 사회적 딜레마인거죠.

 

평생 어드밴티지(Advantage)를 주자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출산을 권장하고자 한다면 영유아 육아시기인 첫 2~3년 정도는 여자 직원에 대한 평가 기준부터 우선적으로 바꿔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예가 있는데, KAIST에서 오혜연 교수님이 출산 이후 테뉴어 평가일을 2년 연장하는 원칙을 만드셨어요."

선배 여교수들이 제도를 바꾸면, 후배들이 그 혜택을 입는다.

"저는 초반 몇 년 사이에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에요. 연구실 셋업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초반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워낙 학과에 유일한 여교수로 주목과 기회를 받기도 하고,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제가 시간을 내주고 싶어요. 제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연구실을 궤도에 올려놔야 그게 가능하겠죠.

 

제게 타임라인은 테뉴어나 그런 것보다 오히려 애가 타임라인 같아요. 아이가 엄마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순간에 곁에 있어줄 수 있을까. 오혜연 교수님이 만들어주신 제도까지 해서 남은 기간이 8년인데요, 둘째를 갖고 싶어도 그 8년 안에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커리어 욕심을 내려놓으면 가능할 수도 있을까요. 다른 여교수님들 보면 아이를 두 명, 세 명씩 키우고 계시는데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그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 있자니, 몸이 점점 더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둘째를 낳은 뒤 기존의 조직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전 같은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가장 컸다. 아이들이란 건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지만, 부모의, 특히 엄마의 헌신을 먹고 자란다는 점에서 커리어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터프한 커리어 환경 속에서 '모성애는 특별하고 엄청난 것이라는 믿음과 여자에게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워킹맘들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을 털어놓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여학생 모임만 하면 외치는 게 있어요. 여자가 애 낳고 출산하는 시기에 남자들은 킥오프 하고 한창 올라가요. 그래서 가능한 서른 전에 최대한 한 눈 팔지 말고 박사든 자격증이든 뭐라도 해놓고 시작하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커리어 서포트를 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물질적인 것, 돈이어도 좋겠지만, 마인드 문제가 되게 커요. 제 남편은 적어도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누나가 본인보다 더 공부를 잘했어요. 누나가 먼저 과학고를 가고, 본인이 자극 받아 과학고에 따라 간 케이스였어요. 그러니 여성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없고요, 자기 확신도 강했죠.

 

자신감이나 자기확신은 기본이고요. 커리어 서포트를 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건 더 많은 걸 내포해요. 독립적인 남자, 육아를 도와주진 않더라도 최소한 본인이 알아서 밥은 챙겨먹고 혼자 자기생활하고 적어도 최소한 '버든(Burden)'이 되지 않는 남자 말이예요."

아무리 여성친화적인 남자라도 여자들과의 관계에선 일정 정도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가사를 분담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일하는 여자에게 남편이란, 때로 존재만으로도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한 번 더 꺼내보게 만든다.

 

어떤 남자는 아내가 가장 바쁘고 어려운 순간, 커리어와 자신 중 선택을 강요하기도 하고, 겉으로는 관대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교묘히 훼방 놓기도 한다. 아내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남자는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젊은 여교수의 고군분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8 이현주 공과대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마침.

전길남 공과대 전산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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