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인터뷰 일시/장소 : 8월 5일/KAIST 연구실

오혜연 교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주위를 탐색했다. 전산학부 게시판에는 학생들을 소개하는 사진과 함께 부임 초기 그와 남편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가 붙어있었다. 두 자녀의 사진으로 만든 사랑스런 카드였다. 태식 리 & 앨리스 오. 부부 교수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관계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가정 내에서도, 밖에서도.

 

오혜연 교수의 인터뷰와 신문 기고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대전 지역 '워킹맘'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이공계 여성 문제에 대해, 특히 육아와 경력단절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었다. 대전은 워낙 특수지역이라 박사급 여성 인력이 많았다. 대부분 교수거나 국책기관의 연구원들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잘 한다고 해서 육아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의 '가방끈'이 길면 길수록, 육아와 살림에 얽힌 갈등과 회의도 커지는 경우가 많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그들에게 좋은 결과를 내라고 압박하는 건 옳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KAIST가 참여한 한국형 오픈 유니버시티의 강연 파일도 받아봤다. 그는 인공지능에 관한 어려운 내용을 하나도 어렵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수강생 뷰 기준 톱 랭킹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KAIST 여성주의연구회

 

들어가며

인터뷰 일시/장소 : 8월 5일/KAIST 연구실

오혜연 교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주위를 탐색했다. 전산학부 게시판에는 학생들을 소개하는 사진과 함께 부임 초기 그와 남편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가 붙어있었다. 두 자녀의 사진으로 만든 사랑스런 카드였다. 태식 리 & 앨리스 오. 부부 교수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관계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가정 내에서도, 밖에서도.

 

오혜연 교수의 인터뷰와 신문 기고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대전 지역 '워킹맘'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이공계 여성 문제에 대해, 특히 육아와 경력단절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었다. 대전은 워낙 특수지역이라 박사급 여성 인력이 많았다. 대부분 교수거나 국책기관의 연구원들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잘 한다고 해서 육아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의 '가방끈'이 길면 길수록, 육아와 살림에 얽힌 갈등과 회의도 커지는 경우가 많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그들에게 좋은 결과를 내라고 압박하는 건 옳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KAIST가 참여한 한국형 오픈 유니버시티의 강연 파일도 받아봤다. 그는 인공지능에 관한 어려운 내용을 하나도 어렵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수강생 뷰 기준 톱 랭킹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KAIST 여성주의연구회

 

'예쁘고, 인기 많고, 가정적으로 안정돼 있는 KAIST의 여교수가 여성에 대해 발언을 한다.', 굳이 라벨을 붙이자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일 터였다. 실은 그를 만나기 얼마 전부터 내가 가장 고민하던 주제가 바로 그거였다. 부르주아란 어떤 운동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들의 진정성과 선명성은 언제나 의심받는다. '먹고 살기 편한 여자들이 여가로 하는 운동'이라는 이미지도 따라 붙는다. '강남 좌파', '캐비어 좌파', '아르마니 좌파'가 다 그런 종류의 비난이었다. 페미니즘에도 그런 혐의가 붙는다. 한편으로는 반발심도 들었다. "부르주아는 말하면 안 되나? 여성으로서 겪어온 어떤 불편한 지점을 문제제기하면 안 되나?"

 

로봇계 인사들을 통해 로봇 관련 학과 'KAIST 3대 여걸'에 대해 이미 듣고 있던 차였다. 기계공학과의 신현정, 박수경 교수, 그리고 전산학과의 오혜연 교수였다. 비슷한 또래들이었고,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유명한 단짝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오랜 우정이, 그들이 같은 여성 연구자들로서 KAIST를 바꿔나간 그 활동 내역이 궁금했다.

오혜연 교수는 KAIST 여교수들의 당사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여교수 네트워크를 동원해, 학내 어린이집을 만들고, 출산/육아시 테뉴어 심사를 2년 유보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이진주

세 자매의 막내

인터뷰 질문
1. 먼저 부모님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1-1.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따님에게 기대가 많으셨는지, 아드님만 편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버님 당신의 인생은 어떠셨나요? 성취가 큰 유명인사인지, 평범한 가장이셨는지, 좌절을 겪으셨는지, 그런 모습이 따님/아드님께는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1-2.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자녀들에 대해선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지요. 워킹맘이었는지, 주부였는지, 살림의 여왕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성공한 '여류'였는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셨는지, 페미니스트셨는지, 어머님께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나누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2. 형제 자매들에 대해 여쭙습니다.
형제 자매는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하니까요. 어떤 관계였나요? 공부로 경쟁했나요? 부모님 사랑을 두고 다퉜나요? 어떤 특질들을 나눠 받고, 무슨 장난을 쳤나요? 바비? 키티? 레고? 로봇?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셨습니까? 

3. 주위 환경에 대해 여쭙습니다.
사는 지역이나 환경에 특징이 있었나요? 대치동 한복판의 경쟁적인 환경이었는지, 해외 체험을 했는지, 달동네나 시골 깡촌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런 특성이 본인의 지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어쩌면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나본 이들 중 가장 풍요로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좋은 시대)*'라 부를 만한 시절의 삼성에서 임원으로 일을 했고, 세 자매는 미국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다. 막내딸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은, 사랑받는 딸이었다.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를 그리워하는 후대에서 부르는 말입니다. - PUBLY.

"아버지는 삼성에 계셨어요. 1980년대 삼성이 반도체 부문으로 미국에 진출하는 일을 하셨죠. 86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갔어요.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기업 임원 정도까지 하셨으니까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신 거겠죠. 공학 전공은 아니고 경영을 하셨는데요, 당시 많은 아버지들처럼 열심히 일하느라 집에선 자주 뵙지 못했어요.

 

언니가 둘이고, 제가 세 자매 중 막내인데요, 제가 아빠를 제일 많이 닮은 딸이었어요. 외모적으로도 그렇고, 하는 일도요. 대학 들어갈 때 '전자공학이나 컴퓨터공학을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해 주셨어요. 처음엔 제가 반항하는 의미로 수학과를 갔는데, 결국은 대학원부터는 컴퓨터 쪽으로 돌렸죠."

어머니는 주부였다. 자녀가 셋이고, 미국까지 갔으니, 당시 주부 이외의 다른 일을 꿈꾸긴 어려웠으리라.

"결혼 이후로는 전혀 일을 안 하시고 가정에 헌신하셨어요. 아직도 '남존여비' 같은 생각이 조금 있으신 거 같아요. 

 

한 번은 남편이 애 둘을 데리고 대전에서 서울을 갔는데, 저희 엄마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어떻게 남자가 애 둘을 데리고 다닐 수가 있느냐'고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남자는 왜 못해요? 힘도 더 센데? 제가 딸인데도 엄마는 사위 편을 드시더라고요."

자매들은 고만고만한 나이였고, 친구 같았다.

"저희 자매는 평범했어요. 자매들 같이 놀았어요. 한국에 있을 땐 마론 인형 놀이도 하고, TV도 봤죠.

 

다섯 살 위 큰 언니는 통계학 전공하고 회사 다니고요, 세 살 위 작은 언니는 오보에 연주자예요. 전혀 다른 일을 하죠? 둘 다 미국에 있어요.

 

(공부는 선생님이 제일 잘하셨나요?) 네, 인정해요."

거의 모든 답변을 겸양을 띤 "그런 것 같아요."로 마무리하던 그가, 모처럼 "네-"하곤 해맑게 웃었다.

"한국에서는 여의도 아파트촌에 살았고, 미국에서는 산호세 삼성 본사 있는 곳에 살았어요. 지금은 산호세 쪽이 대단한데 그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 때는 다 농장 같은 데였어요. 80년대 후반부터 인텔, 시스코 같은 전자회사들이 막 생기고 삼성도 급격히 성장하면서 동네가 변했죠.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동양인이 20% 정도였어요. 지금은 동양인이 백인보다 많아요. 큰 언니가 계속 그 동네 살아서 친숙합니다. 작은 언니는 LA에 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 가서 제일 어려운 건 영어였죠. 그 때는 지금처럼 영어 공부를 많이 시킬 때가 아니어서 ABC 정도 알았던 것 같아요. 완전히 새로 배운 거죠. KAIST에는 2008년에 왔는데, 22년 만에 돌아온 거예요."

그런데도 교포 억양이랄까 그런 망설임이 없이,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잘했다.

"다 클 때까지 쓰던 모국어였으니까요. 잊지는 않았지만, 사실 둘 다 어려워요. 모국어가 없어진 느낌이랄까요. 그런 아득한 느낌이 있어요.

 

언어라는 건 아무래도 쓸수록 느는 거잖아요. 강의나 전공 분야 내용은 공부를 영어로 했으니까 괜찮은데, 한국어로 강의하거나 제안서를 쓴다거나 하는 건 아직도 정말 어려워요."

고등학생 NASA 인턴, 부부 연구자로 돌아오다

4. 학교생활에 대해 여쭙습니다.
과학고나 외고 등의 특목고 출신이신가요? 경시대회나 우열반, 특별활동 같은 걸 경험하셨나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인상적이었던 체험이 있으신가요? 선생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걸까요?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면?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기까지 연결돼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5. 성적에 대해 여쭙습니다.
학력고사 혹은 수능, 내신은 어떠셨나요? 어떤 이유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셨습니까? 성적에 맞추신 건지, 특별한 희망이나 비전이 있었는지, 부모나 선생님, 지인들의 강압에 의한 건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막상 들어온 학교/학과는 적성이나 기대에 부합했는지요? 혹 재수/전과/유학/취업 등을 통해 진로를 바꾸셨는지요? 

6. 교우관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친구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요? 혹여 잘난 척한다고 왕따나 폭력을 겪지는 않으셨나요? 반장, 회장을 도맡아 하셨나요? 학교에서는 시험성적 외엔 존재를 드러나지 않았나요? 단짝이 있었나요?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그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여의도초등학교에 다녔고, 미국에선 쭉 공립학교를 다녔어요. 미국에서는 중학교 정도부터 수학 같은 게 반이 갈려요. 진도를 빨리 나가는 반에 있기는 있었는데. 경시대회를 그렇게 활발히 하지는 않았어요. 한국에서들 나가는 올림피아드는 하지 않았고요."

대신 프로그래밍을 했다. 아주 일찍 시작한 거였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인터뷰이들이 어린 시절 받은 교육 중 가장 부러운 것이었다.

"중학교 한 2학년 때부터였어요. 방학 특강 같은 걸 통해서 프로그래밍을 배웠어요. 당시 배운 언어는 '파스칼', '베이직'이었고요, 고등학교 때 NASA에서 인턴을 했는데, 거기서 'C'를 좀 짜봤어요."

고등학생이 NASA 인턴이라니.

"당시 NASA에 고등학생 인턴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소수인종과 여성 등 마이너리티를 키우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전체 10여 명 중에 여학생이 저까지 한 두 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있는 '나사 에임스 리서치 센터(NASA Ames Research Center)'에서 일했어요. 그 때부터 연구라는 것에 대한 동경이 생겼어요.

 

그 때 했던 게 뭐였냐면,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실험하는 걸 보조해주는 IT팀의 일이었어요. 당시 이메일이란 게 처음 생겼는데, 과학자들이 이메일을 쓸 수 있도록 보조해주고,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는 체험이었어요. '과학자가 이런 걸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걸 본 첫 경험이었죠. 오히려 아빠 회사 견학은 안 갔던 것 같아요. NASA가 처음이었어요."

체험의 스케일이 다르니 사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입시 위주의 선행학습에 찌든 우리 학생들이 떠올랐다.

"대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수학, 과학을 제일 잘했어요.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는 어려워졌어요. 수학과에서는 컴퓨터 사이언스에서 필요한 수학을 배웠죠. 이산수학, 알고리즘 그런 것이요. 수학과를 졸업할 때쯤엔 '아, 나는 수학을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을 쉽게 잘했던 게 대학 가서는 오히려 어려워지게 만든 것 같아요. 내가 잘하는 게 '진짜 수학'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 나는 진짜 수학은 못하는구나' 그걸 깨달았어요.

 

무언가를 증명하고 하나의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를, 오래 푸는 것. 그런 게 진짜 수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이 이미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의 정석」을 푸는 우리나라 '수학영재'들이 막상 수학이나 관련 분야로 진출해서 겪는 고민도 바로 저런 것이다. 그렇게 몰리지 않았던 오혜연 교수도 그럴진대, 스스로 즐기지 못하고 문제풀이에 집중했던 아이들이 겪는 좌절감은 얼마나 큰 것일까. 

"전공을 수학에서 컴퓨터사이언스로 바꾼 이후 만족해요. 새로운 걸 계속 추구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물론 모든 연구가 새로운 걸 추구하는 일이긴 한데, 다른 학문들은 이미 쌓인 게 너무 많아서 한계를 갖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생물 같은 건, 실험하는 방법론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은데, 컴퓨터 쪽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걸 좀 덜 알아도 되거든요. 왜냐면 컴퓨터 자체도 계속해서 새로운 게 나오기 때문에, 예전 걸 배우는 게 무의미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 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이 있다면 계속 업데이트를 해야 된다는 점이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업데이트를 하셔서인지 전산학과 교수님들은 50, 60대 교수님들도 굉장히 젊은 사고방식을 갖고 계세요. 외부에서 볼 때는 그게 콩가루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자유롭다고 할까요. 애초에 전길남* 명예교수님 때부터 그랬어요."

* 인터뷰 내용은 교수편 마지막 인터뷰(전길남 공과대 전산학부 명예교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UBLY

 

KAIST 안에서도 유독 자유로운 전산학부의 전통은, 오히려 학문의 역사가 짧은 데에서 왔다는 것이다.

"저는 전교 1등은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영어를 잘 못했거든요. 미국에서 쭉 자란 학생들에 비해서는요.

 

우리나라에서도 국어가 중요하듯, 미국에서도 영어의 비중이 높아요. 그런데 저는 '영어의 역사' 그런 걸 되게 싫어했어요. 수학 정도는 1, 2등이었지만요.

 

한국에서는 반장을 했는데 미국 가서는 반이란 개념이 없으니까 전교 학생회 총무 같은 걸 했어요. 서기 그런 역할이었죠. 커뮤니티 봉사 활동하는 클럽 같은 걸 오래 했어요. 부회장도 맡았었고요. 노인 복지관 봉사, 어린이집 공부 도우미 등을 했죠.

 

대학교 때 기숙사 같이 살았던 친구가 KAIST에 와 있어요. 신현정 기계과 교수요. 거의 20년 동안 알았던 것 같아요. 남편이랑도 친하고 애들이랑도 친하고. 저희 큰 애를 MIT 시절에 낳았는데, 그 때 애도 잘 봐줬어요. 남편과 신현정 교수까지 셋 다 박사과정 중이었거든요.

 

신현정 교수가 먼저 KAIST 들어와 있었고, 저보다 3-4년 일찍 왔어요. 잘 하고 있길래 긍정적인 생각이 있었어요. 남편은 2007년, 저는 2008년에 왔죠."

부부교수라니,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였다.

"요새 부부교수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박종철-박진아 교수님, 최성희-조성호 교수님은 전산학부 내 부부교수고요. 류석영(전산학과)-오왕렬(기계과) 교수님도 부부예요. 최근에 오신 김주호(전산학과) 교수님 부인은 경영공학 김지희 교수님이에요.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학교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좋죠."

이제야 공감하는 여자 교수님의 고충

7. 기억에 남는 스승/제자에 대해 여쭙습니다.
저는 학문적인 가족관계에도 관심이 많은데요, 대학 입학 전이나 후에 롤 모델로 모실만한 분을 만나셨는지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만한 제자를 만나셨는지요? 학문만이 아니라 전생애적인 관점에서도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멘토링의 관점에서든, 갈등의 관점에서든 나누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고등학교 때는 화학 선생님, 생물 선생님이 굉장히 좋으셨어요. 한국은 선생님들이 몇 년 단위로 바뀌는데 미국은 한 학교에 계속 계세요. 한 20-30년 계신 분들이죠. 과학에 너무 열정이 넘치는 분들이었어요. 제가 MIT 갈 때 '평생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해주셨어요.

 

MIT 학부는 여학생이 반 정도 되는데요, 올라갈수록 적어져요. 특히 컴퓨터 사이언스 쪽에는 여학생들이 거의 없어요. 멘토링, 간담회 그런 게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은 정말 유명하고 대단한 분들이 많은데, 레즐리 캘블링(Leslie Kaelbling) 교수님이라고, 여자 교수님이 계셨어요. 아이들도 가끔 학교에 데려오셨어요.제가 레슬리 교수님 수업 중 기계학습(머신러닝) 조교를 했는데 가까이에서 조언을 많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교수님 아이들이 어렸을 때 대만인가 중국인가 출장을 다녀오신 적이 있어요. 미국 동부에서 15시간 걸리는 곳인데요, '아이들이 없고, 나를 아무도 안 괴롭히고, 그 열다섯 시간이 너무너무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엄마가 아닌 나로서 혼자서 하고 싶은 걸 온전히 할 수 있는 열 몇 시간, 진짜 공감돼요. 그 때는 제가 애기가 없을 때였는데 지금은 정말 이해 돼요."

'여자이기 때문에'

8. 여성으로서 과학/공학 분야를 공부하고 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여쭙습니다.
여자가 왜 이과를 가는지 같은 질문에 부딪힌 바 있으신지요?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으신 적은요? 남성이시라면 동료 여학생이나 여교수님들께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유리천장'이나 '새는 파이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과 커리어의 양립이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관용어들인데요, 실제로 여성이라는 게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 장벽이 되는지, 본인이 경험하거나 관찰하신 바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항상 주위에 여학생이 많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때 수학경시대회를 했는데, 그 때도 여자는 혼자였어요. '여자가 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냐'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오히려 그런 챌린지를 더 좋아했어요. 잘해서 증명해 보이면 통쾌한 거 있죠.

 

주변에 공부 좀 잘하는 친구들은 의대를 많이 가는 것 같아요. 이공계 쪽으로 잘 하는 친구들이 거의 의대를 갔어요. 특히 MIT에서 박사를 한다고 하면 여자가 정말 적잖아요. 그때까지 어려운 환경에 있었으니까 워낙 그 다음은 잘 하는 것 같네요."

의대라는 선택지는 남녀와 동서양을 떠나 모든 이공계 학생들을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미국 대선에 제가 관심이 많아요. 미국 같은 나라도 사실 지금까지 여자 대통령이 안 나왔지만 언젠가는 나오겠죠. 힐러리도 참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여자도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가정사적인 문제도 그렇고, '정말 엄청난 사람이구나' 느끼면서 지켜보고 있어요. 정치권에도 여자가 참 적어요. 힐러리는 워낙 희소한 사람이었죠. 민주당 여성 상원의원도 처음이었고.

 

누군가 힐러리를 소개하면서 '여성 리더란 것은 추가적으로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당신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 짐을 계속해서 안고 가야 한다' 그랬어요. 그거에 굉장히 공감해요. 지금은 힐러리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서포트를 해주는데, 그래도 어딘가 누군가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잖아요."

이어 대덕넷(대전의 과학기술 연구단지 일대를 커버하는 전문 미디어) 워킹맘 토론회를 인상 깊게 봤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그냥 평범한 교수로 연구하며 살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여성 멘토가 없기 때문에 더 푸시를 하는 것처럼 보여요. 저는 아직 괜찮지만, 같은 과 문수복 교수님 같은 분을 보면 그런 프레셔가 굉장히 강할 것 같아요. 여성 리더가 나와야 밑의 사람들이 보고 따라할 테니까요.

 

그래도 누군가 제 얘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 들어서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말하려고요. WISET(Center for Women In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 (재)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사업 중 멘토링 프로그램이 꾸준히 진행되지 않았던데요, 저희 과 박진아 교수님이 그 쪽 일을 많이 하셔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KAIST는 다르다

9. 여자들끼리의 관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그 담론이 통용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실제 경험한 여성들과의 관계는 어떠십니까?

대한민국 톱클래스의 여성들이 '소수정예'로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눈에 안 보이는 암투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KAIST에서는 적어도 안 그런 것 같아요. 워낙 여자가 적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왔을 때 여자는 600명 중에 20명, 5%도 안되던 상황이었어요. 사이가 좋다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워낙 절실하게 느끼는 거겠죠."

다행이었다. 서로가 각각 '방 안에 한 명 뿐인 여자들'이었다. 경쟁하기보다는 연대해야 했다.

 

그렇다면 존재 자체를 시새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까.

"저는 다행히 아직까지 못 만났어요.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중고등학교 때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제 친구들은 중국인, 인도인, 백인들이었어요. 그 친구들은 서로 경쟁한다기보다는 잘하는 부분을 서로 응원해주는 성향들이었어요."

역시 결론은 다양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능력과 외모의 관계는 '없다'

10.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의견을 여쭙습니다.
'엔지니어처럼 생긴 여자' 논쟁이 났을 때, 일부러 섹시한 옷에 가운을 걸친 사진을 올린다거나 하는 저항운동이 있었어요. 여성성이나 섹시함을 극대화해 남성들의 호감을 사는 '여왕벌' 타입의 여성들도 있지만, 남자들에게 직업적으로/학문적으로 진지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외모를 망치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쪽이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에 와서 제일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그거예요. 능력이랑 외모는 따로 가야 하는 건데, 마치 거기에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안 좋더라고요. 능력과 외모를 연결하는 건 포지티브일 수도 있고 네가티브일 수도 있어요.

 

'저 여자는 연구는 안 하고 쇼핑만 하나' 그런 의견도 있고요. 반대로 외모도 예의인데 화장 좀 하지, 프로페셔널리즘이 떨어진다, 이런 주장도 있어요. 저는 '둘 다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를 가꾸든 안 가꾸든 그건 개인의 자유이고, 무슨 이유로 가꾸든 그걸 왈가왈부할 수 없는 문제예요. 학회에 왔으면 연구 실력으로 내용으로 평가하는 게 맞는 것이겠죠.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숙제를 같이 하거나 연구할 때, '저 친구가 능력이 어떤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딱 처음 들어오는 게 외모인 것 같더라고요. 여성이냐, 남성이냐, 몇 살이냐, 외모는 어떠냐, 뭘 입었냐 이런 거에 포커스를 맞춰요."

다시 한 번 바라본 그는 섬세한 레이스가 들어간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고왔다.

"제 경우는 소셜 놈(Social Norm)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으려고 해요. 처음 왔을 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다녔었는데, 요샌 좀 덜 해요. 기업에 간다면 정장을 입습니다. 저도 나이 들면서 보수적으로 됐어요.

 

처음에 옷을 자유롭게 입고 다닐 때, 다른 교수님들이 한 말씀씩 하셨어요. '예쁘게 입고 왔는데 무슨 일이 있냐?' 물론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참견하는 걸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미국에서는 외모에 대한 발언을 절대 안 하잖아요, 조심스럽죠. 마흔이 넘었으니 지금은 좋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아직도 저는 생각은 그래요. 20대 여학생들이 얼마나 꾸미고 싶겠어요. 꾸미고 싶은 자연스런 욕구가 있는데, 다른 교수님이나 학생들을 의식해 그 욕망을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동시에 반대로 너무 의식해서 꾸미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그 모든 행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였으면 해요."

그게 정답이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11. 페미니즘에 대해 여쭙습니다.
수업이든 학회든 동아리든 선배든 책으로든, 여성주의나 양성평등적 시각을 접하신 바 있으셨는지요? 그것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눠 주실 수 있으신지요? 스토킹이나 성희롱 등의 문제를 겪은 바 있으십니까? 겪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니면 해결하지 못했는지, 어렵지만 말씀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요?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서도 의견 들려주세요.

"저는 페미니스트라고 생각은 하는데요, 따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고, 외모, 성별, 인종, 종교, 성적취향 그런 건 다 실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건 다 별개로 봐줘야 한다는 거예요.

 

프로페셔널 소사이어티(Professional Society)에서 사람의 평가는 실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명쾌했다.

"성희롱 같은 건 거의 모든 여자가 어느 정도는 당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그거에 대해 예민하고 불쾌했는지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제 경우엔 그냥 말로 당하는 희롱은 굉장히 많았죠. 지금은 나이가 있기도 하고, 애도 둘이나 있고, 자존감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해를 받지 않아요.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반대로 뭐라고 한 마디 해줄 수 있는 입장이 된 거죠.

 

제가 보기에 성희롱의 많은 부분은 권력 차이 중에서도 특히 나이 문제 같아요. 20대의 나는 아무리 아카데믹한 자존감이 높다 하더라도 신체적으로는 자존감이 높지 않을 때였거든요. 그럴 때 남자들의 발언을 들으면 굉장히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이 사람이 잘못한 거고, 내가 피해자다' 그런 생각조차 못했어요.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걸 모르는 거죠.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고요. 지금 돌이켜 보면 상처가 됐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혼란스럽기만 하고요. 그래서 사회적인 교육, 학교의 법 같은 게 필요합니다."

요즈음 남학생들의 카톡방이 어떤 식으로 오염되고 있는지 공개되고 있다. 그것도 이른바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라 충격은 더욱 컸다. 이 친구들은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남성성을 과시하고, 강한 남자로 인정받는 길이라고 잘못 배웠을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으면 그 사회 안에서 소외될 수 있다.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것이 사회적인 교육이고 학교의 법이다.

애가 셋인 여교수에겐 자동 테뉴어 보장이 필요하다

12. 실례가 되는지 알면서도, 여쭙게 되어 송구합니다. 매리털 스테이스(Marital Status)를 여쭈어도 될까요?
어떤 분과 결혼하셨나요? 아직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다녀오셨나요? 어떤 자질을 가진 분을 찾고 계시나요? 많은 학생들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결혼과 커리어의 관계입니다. 파트너를 찾는 방법부터 시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 있으시다면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3. 역시나 실례되는 질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두셨습니까?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인생에 어떤 의미였나요? 아이를 품고 낳고 키운다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와 양립할 수 있는 일이었나요? 육아휴직 등의 모성보호 제도는 어땠나요? 양육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살림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들려주세요. 제자들과 자녀를 키울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으십니까?

"우리 남편 잘생겼어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배우자를 선택하셨느냐는 질문에, 그는 꼭 저 한 마디를 했다. 비유하자면 연예인 팬이 연예인을 칭송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인터뷰어라는 신분을 잊고, 머리를 젖히고 웃었다.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저희는 동갑이에요. 스물여섯에,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저희는 굉장히 즉흥적으로 만나서 사랑에 빠졌어요. 조건 같은 걸 따지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니었고요,

 

남편은 MIT 박사과정을 막 시작했을 때고, 저는 MIT를 떠나 석사 과정을 공부하러 CMU(Carnegie Mellon University)에 가기 전이었어요. 다 같이 노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통해 소개를 받았어요. 두어 번 보고, 바로 사귀기 시작했어요.

 

실은 제가 되게 좋아했어요. 너무 잘생겨서요. 2년 연애하고 바로 결혼했어요. 용감했지요. 별 생각 없이 결혼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죠. 나이가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내면적으로 성숙해졌어요. 그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이 있습니다. 내면이 훨씬 더 잘생긴 남자예요."

그들 부부는, 놀랍지만 아직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존경하고 있었다. 십 수 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우면서, 여자 입장에서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저희가 첫째는 계획해서 낳은 게 아니고 박사과정 중 논문만 남은 상황에서 가졌어요. 다행히 친구들이 거의 결혼을 안한 학생들이어서 친구들 손을 빌려가며 정신없이 키웠어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키웠어요. 돌잔치도 공원에 가서 케이크만 놓고 하고요. 물론 우리나라처럼 돌잔치 같은 거에 챙겨야 할 게 많은 상황이라면 힘들었겠지만요.

 

첫째는 부모님이 봐주실 형편이 아니었고 거의 둘이서 키웠어요. 학교 데이케어 센터 보냈죠. 미국은 데이케어가 잘 돼 있는 대신, 한국에 비해 굉장히 비싸요. 다만 장학금을 주는 것처럼 학생 부모한테는 많이 깎아줬어요.

 

그 좋은 데이케어가 한국에도 있어야 되겠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온 후 기계과 박수경 교수님이랑 저랑 KAIST 안에도 어린이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총장님께 제안했지요. 유성구청 관계자도 만나고요. 저희 아이는 이미 나이를 지나서 못 보냈지만, 어린이집을 만들었을 때 굉장히 뿌듯했어요."

KAIST 어린이집으로 가는 골목 벽에는 퀴리부인부터 뉴턴, 아인슈타인, 라이트 형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내 아이에게 혜택이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여자 후배들을 위해 제도를 바꾸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은 저희를 굉장히 성숙하게 해줬습니다. 저희 부부가 모두 미숙한 상태에서, 철이 안 든 시점에서 첫째를 낳았어요. 시행착오도 많았고요,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게 얼마나 큰 책임인지도 몰랐지요.

 

다행히 큰애는 건강하기도 했고, 성격적으로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 어디 가든 적응도 잘하고, 그래주었어요. 큰애한테는 미안하고 대견한 마음이 큽니다.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들어와서 다음해에 둘째를 낳았어요. 둘째는 실은 낳을까 말까 그랬어요. 주변에선 낳아야 한다, 아니다, 말이 많았죠. 낳고 나니 '제 할 일은 다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큰애는 외국인학교 다니고, 둘째는 초등학교 보내요. 한국 학부모 사회의 문제는 좀 덜 겪었던 것 같아요. 큰애는 혼자서 스스로 잘하는 편이에요, 여자애라서 그렇기도 하고요. 둘째는 아들인데요, 나이 차이가 나니까 누나가 잘 봐주는 것도 있고요.

 

'애가 셋인 여교수는 테뉴어(교수 정년 보장 제도)를 자동으로 줘야 된다'고 제가 그래요. 그만큼 사회에 기여하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하시죠. 엄청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요."

아이가 셋이면서 테뉴어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이 떠올랐다. 이런 언니들의 존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자 후배들의 든든한 배경이 돼 준다.

"부모님이 쭉 미국에 계셨다가 저희 귀국 후에 은퇴하고 대전에 오셨어요. 큰 언니는 아이가 둘이고, 작은 언니는 하난데, 거기는 아이들이 다 커서 엄마가 저희 애들 봐주시러 오신 셈이죠.

 

가사는 남편과 저 둘 다 별로 안 해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거의 모든 걸 해주시죠. 저는 요리나 설거지를 아주 가끔 하고, 애들 데리러 가고 숙제 봐주고 그런 건 남편이 굉장히 많이 해요. 아들 목욕시키고 축구나 야구, 이를테면 남자들이 하는 것들을 합니다.

 

결혼이나 육아에는 마음가짐이 차지하는 게 상당히 큰 일인데요, 오히려 저희 남편한테 인터뷰를 해보면 힘들었다고 할지도 몰라요. 저는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힘든 부분을 남편한테 많이 미뤘거든요. 어느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결혼생활 하면서 인내심이 늘었대요.

 

저는 (결혼 후) 커리어적으로 성장을 많이 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KAIST 올만한 실력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여교수님들처럼 잘하지도 못했고 열심히 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정말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거 보고 느낀 점도 있었고요. 결혼생활 동안 자극이 많이 됐죠."

참고, 나누고, 존경하는 이들 부부의 관계가 대단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