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영국 사람 헨리 메인(Henry Maine)이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분에서 계약으로.

맞다. 엄격한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정해졌던 중세 이전과 달리, 우리는 분명히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약속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정해지는 '계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계약은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계약'이라는 과목을 들어본 적 있는가? 놀라운 것은 중고등학교는 물론 로스쿨, 즉 '법학전문대학원'에서도 안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계약은 안 가르치고 계약에 관한 법만 가르쳐 준다.

 

그러니까,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써 보는 수업은 로스쿨에 없다. 계약을 잘못 쓰거나 계약을 어겨서 문제가 된 소송 사건을 해결하는 실습수업만 있다.

 

보통은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계약에 관한 인생 첫 스승이다. 대학에 들어간 뒤 당차게 집을 박차고 나와 열심히 고른 나의 첫 원룸을 계약할 때, 부동산에서 한 장짜리 임대차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물어보는 것이 계약에 관한 생애 첫 질문이자 진지한 의문인 경우가 많다.

도장 없는데 사인해도 되나요?

그렇다. 사인을 해도 된다. 하지만 그 사인이라는 것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처럼 몇 날 며칠을 연습해서 만들어낸, 엄청 복잡하거나 톡톡 튀는 그 사인이 아니다. 계약서에 그런 사인을 하면 안 된다.

 

계약서에 하는 사인은, 그냥 또박또박 이름을 쓰는 것이다. 악필이라도 괜찮다. 어차피 계약서의 맨 앞에는 자신의 이름이 잘 인쇄되어 있다. 남들이 따라 할 수 없게 자기 이름을 썼다면 계약서 목적에 잘 들어맞는 좋은 서명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질문은, 계약의 유효성과 적법성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을 보여준 훌륭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A4용지에 잘 보이는 글자로 인쇄된 정식 계약서를 볼 일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 계약서를 보게 되어도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잘 느끼지 못한다. 사실 변호사가 되어 계약서를 처음 접했을 때, 모두 똑같이 하얀 A4용지에 똑같이 '맑은고딕체'로 인쇄되어 있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던 적이 있었다. 중요한 내용은 볼드체나 빨간색으로 써 놓아야 더 중요하게 느끼고 꼼꼼히 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