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차 광고쟁이가 스웨덴까지 날아간 이유, 그 이후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스톡홀름으로 넘어온 지 8개월이 지났다. 하이퍼 아일랜드(Hyper Island*)에서 인터랙티브 아트 디렉터(현 디자인 리드)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걸 배웠다.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와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2017년 9월 브런치에 남긴 출사표 그다음 이야기를 해보자.
* 1996년에 창립되어 스톡홀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스쿨. 현재 스웨덴을 비롯하여 영국, 미국, 브라질, 싱가포르에도 캠퍼스와 오피스가 있다.
나는 이노션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디지털 비즈니스팀에서 디지털 전략과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들었다. 1년 후, 팀이 VR 솔루션팀으로 바뀌면서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과 캠페인 운영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일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팀이 없어졌다. 전문성을 기르기도 전에 하는 일이 계속 바뀌다 보니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 1년 반 동안 진행한 현대자동차 WRC 가상현실 캠페인. 사람들이 실제 차에 타서 랠리 코스를 주행하는듯한 체험이 가능한 360도 영상과 모바일 앱, 그리고 이를 체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를 만들었다. (Hyundai WRC Real Play ©현대자동차, 이노션 월드와이드)
리서치, 마케팅 기획, 경영 전략, 테크놀로지,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건 없어도, 모든 걸 조금씩 경험해봤다는 것. 이게 내 장점이었다.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싶었다. 업무하는 동안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을 만큼 설레는 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하이퍼 아일랜드에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3년 차 광고쟁이가 스웨덴까지 날아간 이유, 그 이후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스톡홀름으로 넘어온 지 8개월이 지났다. 하이퍼 아일랜드(Hyper Island*)에서 인터랙티브 아트 디렉터(현 디자인 리드)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걸 배웠다.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와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2017년 9월 브런치에 남긴 출사표 그다음 이야기를 해보자.
* 1996년에 창립되어 스톡홀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스쿨. 현재 스웨덴을 비롯하여 영국, 미국, 브라질, 싱가포르에도 캠퍼스와 오피스가 있다.
나는 이노션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디지털 비즈니스팀에서 디지털 전략과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들었다. 1년 후, 팀이 VR 솔루션팀으로 바뀌면서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과 캠페인 운영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일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팀이 없어졌다. 전문성을 기르기도 전에 하는 일이 계속 바뀌다 보니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 1년 반 동안 진행한 현대자동차 WRC 가상현실 캠페인. 사람들이 실제 차에 타서 랠리 코스를 주행하는듯한 체험이 가능한 360도 영상과 모바일 앱, 그리고 이를 체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를 만들었다. (Hyundai WRC Real Play ©현대자동차, 이노션 월드와이드)
리서치, 마케팅 기획, 경영 전략, 테크놀로지,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건 없어도, 모든 걸 조금씩 경험해봤다는 것. 이게 내 장점이었다.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싶었다. 업무하는 동안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을 만큼 설레는 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하이퍼 아일랜드에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하이퍼 아일랜드는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스쿨이다. 누구는 '디지털 하버드'라고도 부른다. 전통적인 디자인 학교와는 달리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고, 교수도, 학점도 없다. 디자인 과정이지만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상관없고, 디자이너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스케치, 인비전 같은 디자인 툴보다 팀 워크, 커뮤니케이션, 퍼실리테이션, 디자인 씽킹 같은 소프트 스킬에 집중한다.
모든 교육은 온전히 학생 몫이다. 학교는 틀과 도구를 제공할 뿐이다. 학생은 그 안에서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반복하고,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볼보, 셀피 등 실제 클라이언트의 브랜딩, 사용자 경험 개선, 경험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UX 디자이너, 프로토타이퍼, 테크니컬 매니저 등으로 불리며 사용자 리서치를 하고 사용자 경험과 인터랙션*을 구현하는 일을 맡았다.
* 사용자와 디지털 인터페이스 사이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일
이 과정에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디지털과 물리적 세상을 연결해
사람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제공하기
* 싱가포르에서 진행한 나이키의 인터랙티브 광고 캠페인. 디지털 기술과 물리적 세상을 연결해 새롭고 자연스러운 경험을 만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BBH Singapore/Nike
지금까지 하던 일과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다른 점은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사용자에게 테스트해보고, 세상에 내보내는 그 순간까지 계속 수정하고 개선해나가는 것.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라고 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좁고, 휴먼 컴퓨터 인터랙션(Human-Computer Interaction**)이라고 하기엔 디자인에 가까웠다. 이렇게 디지털과 물리적 세상을 연결하는 일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디자인 분야가 있을까. 이런 디자인은 누가 할까. 어떻게 해야 계속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궁금증을 품고 스톡홀름 신학대학교 리브랜딩 프로젝트 때 멘토였던 스타이너를 찾아갔다.
* 방황하는 UX 디자인 참고
** 인간과 컴퓨터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 Intro: HCI, 거의 모든 것의 연결 참고
Do what you love, 인터랙션 디자인
스타이너는 스웨덴 이노베이션 에이전시 어보브(Above)에서 수석 서비스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인터페이스와 경험으로서의 브랜드'라는 강의에서 경험 디자인은 시각 요소뿐 아니라 사용자가 경험하는 모든 요소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한참 로고 디자인에 지쳐서 디자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좌절하고 있던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스타이너에게 물었다.
저는 사용자도 알고 리서치도 꽤 잘합니다. 디자인, 코딩, 프로토타이핑 다 조금씩 합니다. 비주얼은 흥미가 없고, 코딩은 자신이 없습니다. 경험 디자인에 관심 있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걸 특히 좋아합니다. 앞으로 디지털과 물리적 세상을 연결하는 경험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뭘 해야 할까요?
스타이너는 나에게 말했다.
경험을 디자인하고 싶은데 비주얼은 하기 싫고, 프로토타이핑 좋아하고, 연결된(connected) 경험을 만들고 싶다고? 네가 말하는 걸 인터랙션 디자인이라고 불러. 우리 회사에 마침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한데, 여기서 인터랙션 디자이너로 일해보지 않을래?
아, 그게 인터랙션 디자인이었구나. 분명 아는 분야인데, 어디서부터 잘못 이해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마음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자리도 이렇게 쉽게 구하다니.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뭔지도 모르고 몇 년을 헤매던 일에 이름이 붙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인터랙션 디자인을 잘할 수 있을까. 인터랙션 디자인에 관한 책이고 아티클이고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읽고, 머릿속에 있는 대로 넣었다.
근처에서 열리는 괜찮은 컨퍼런스가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마침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인터랙션 18(Interaction 18) 컨퍼런스가 눈에 들어왔다.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컨퍼런스에 간다는 것
컨퍼런스에 가면 잠시 내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2015년에 참석한 칸 라이언즈를 시작으로, 2017년 자비로 다녀온 CES, 국내외 모터쇼, 디자인 컨퍼런스와 개발자 컨퍼런스에도 참석했으며 스톡홀름에 와서는 스톡홀름 테크 페스트(Stockholm Tech Fest)와 노르딕.디자인(nordic.design)에 참석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컨퍼런스에 가는 걸 선호한다. 물론 조금 답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머리를 비우고 가야 지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더 집중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이번에 참석한 인터랙션 18은 그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글만 조금 읽었을 뿐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인 대신 배우고자 하는 내 의지는 충만했다.
머리는 비웠지만 세 가지를 챙겼다. 끊임없는 호기심, 컨퍼런스 기간 동안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용기. 게다가 이번에는 학생 신분으로 참가했다. 컨퍼런스에서 학생 신분은 프리 패스나 다름없다. 누구와도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듣기 힘든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관심이 가는 기업이면 혹시 채용하는지 물어보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학생 할인까지 받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2월 3일, 4일 이틀간 진행된 인터랙션 에듀 서밋(Interaction Edu Summit)과 2월 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인터랙션 18 본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컨퍼런스가 끝나기가 무섭게 컨퍼런스에서 들은 내용을 잊어버린다. 어쩔 수 없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뇌가 버텨낼 재간이 없는 거다. 어떻게 해야 인터랙션 18에서 들은 내용을 내 자산으로 만들 수 있을까.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모든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자. 잘못하면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연말에 후회하며 떠나보내기 십상. 그렇게 PUBLY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광고 피난민이 아닐까?
리옹에 도착한 첫날, 스톡홀름에서 같이 온 스테파노, 하파엘(Rafael Coimbra, Head of Product at Lifesum)과 저녁을 먹었다. 스테파노는 글로벌 디자인 에이전시 디자이닛(Designit)에서 리드 U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하파엘은 헬스케어 앱을 만드는 라이프섬(Lifesum)에서 헤드 오브 프로덕트로 일하고 있다. 둘 다 인터랙션 디자인 협회(IxDA) 스톡홀름 지부 오거나이저로 활동하고 있고, 나는 거기서 포토그래퍼로 참여하고 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로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세 명 모두 처음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터랙티브 미디어에 관심이 있었고, 이를 활용한 광고 캠페인을 보며 꿈을 키웠다. 광고 회사에 가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현실은 우리 생각과 조금 달랐고,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파엘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광고 피난민(advertising refugees)이 아닐까?
광고는 여전히 매력적인 일이다. 1분 내외의 짧은 영상으로 보는 이의 생각을, 더 나아가 행동까지 바꿀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데이비드 오길비 말대로 광고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광고는 문제의 본질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소비자 인식만 건드린다. 광고인들은 생각한다. 우리 역할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문제는 다른 누군가가 해결할 거라고. 광고 회사에 다닐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할 일은 소비자 인식 개선하기,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퇴사 직전에 청소년 사이버폭력 문제를 다룬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다. 사이버 폭력 피해자가 SNS와 메신저 등 온라인 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실제 앱 화면에서 재현했다. 약 2만 명이 이 앱을 다운받았고, 7천여 명이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여기까지였다. 잠깐 이슈는 되었을지 모르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하이퍼 아일랜드에서 공부하며 의문이 들었다. 과연 거기까지가 내 역할이었을까. 본질적인 문제를 찾고 그 해결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인터랙션 18에서 들은 사례들과 만난 사람들은 본질적인 문제와 그 해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본 리포트는 인터랙션 디자인에 관한 리포트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