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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들이닥친 위기 속에 큰 틀을 짜다

들이닥친 위기 속에 큰 틀을 짜다

1997년 말은 심각한 위기였다

위기라는 단어는 평범해졌다. 매일같이 신문에서 그 단어를 만난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제 진짜 위기를 잊었는가

1997년 말의 위기는 지금 이 정도가 아니었다. 무서운 풍경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시장이 무너졌다. 연말 연쇄부도 먹구름(27일), '금융업 정리해고' 입법 진통(28일), 전 업종 정리해고 조기 단행(29일)*, 종금사 5~6곳만 생존(30일), 개인부도 들이닥친다(31일)⋯⋯. 1997년 12월 말의 중앙일보 1면 톱 기사들**이다. 하루에 100여 개의 기업이 부도를 냈다. 외환 금고는 텅텅 비었다 했다. 나라는 풍랑 속 조각배 같았다. (중략)

* 관련 기사: '全업종 정리해고 조기 단행' (중앙일보, 1997.12.29)

** 1997년 12월 말 당시 중앙일보 지면: [12.27] [12.28] [12.29] [12.30] [12.31]

 

YS 정부도 '뭔가 심각하다'는 낌새를 채고 있었다. 그해 1월 한보철강이 무너졌다*. 정부는 금융개혁위원회(금개위)를 꾸렸다. "금융 부문을 수술하겠다."고 나섰다. 서른한 명의 위원 중 나도 한 명이었다.

* 국가기록원의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부도 관련 기록 참고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가 얼마나 심각한 응급 상황인지를 인식하는 이는 소수였다. 금개위에선 틀이 큰 논의들이 오갔다. "중소기업 지원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중앙은행과 금융 감독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한가했다. 당시 나는 한국조세연구원 자문위원, 권한 없는 자문역인 셈이다. "이렇게 한가한 논의를 할 때가 아니다."는 말을 꺼낼 위치가 아니었다. 우울한 마음만 커져갔다. 금개위 자문위원을 맡은 젊은 학자들과 가끔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을 뿐이었다.

요즘 은행 대출 부실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전문위원 최범수가 내게 자료를 보여줬다. 은행 대출의 15퍼센트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였다. 이 통계가 한 경제신문에 흘러 나가는 바람에 정부는 발칵 뒤집힌다. 정부는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또 다른 위원은 "잠재적 부실까지 따지면 부실채권이 30퍼센트 안팎일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중략)

갑자기 몰아닥친 위기,
모라토리엄을 말하다

위기는 별안간 다가온다. 3월에 삼미그룹, 4월에 진로, 7월에 기아그룹이 쓰러졌다. 동남아 위기*도 본격화하고 있었다. 각국이 대책 마련에 초비상이었다. 태국은 바트화 환율이 뛰자 바스켓(합성통화단위제도)을 포기했다. 말레이시아와 홍콩은 페그제(고정환율제)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국만 멈칫거렸다. "동남아와 다르다. 펀더멘탈이 강하다."며 버텼다. 외국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한국에 '못 믿을 정부, 아무것도 안 하는 정부'라는 불신의 딱지가 붙었다. 그 바람에 위기는 한번에 몰아쳤다.

* 국제금융센터 보고서 「1970년대 이후 외환위기 주요 사례 조사」 중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1997년 12월 초, 결국 닥쳐온 위기 속에서 나는 혼자 보고서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아무 권한도 없는 사람이 '선거 뒤 위기 대처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쓰다니. 나는 1997년 대선 때 조순 전 신한국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이회창 캠프 일을 잠깐 도왔다. '선거에 이기면 내야겠다'고 만들어본 5장짜리 짧은 보고서였다.

 

'이까짓 위기 이런 식으로 하면 될 텐데⋯⋯' 길이 보였다.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공직을 떠난 지 20년이 다 돼가던 때다. 1970년대 온갖 비상 경제 조치를 담당했던 재무부 공무원의 혈기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을까. 보고서의 핵심은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이었다. '채무불이행 선언을 할 각오로 외채 협상을 해야 한다'고 썼다. 괄호 안에 뚜렷하게 명시했다. 나라를 부도낼 각오를 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 모라토리엄은 라틴어 'morari(지체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국가 경제가 혼란에 빠져 대외 채무 이행에 관해 일정 기간 상환을 연기 또는 유예하는 일을 말한다. 지급 거절을 의미하는 채무불이행(디폴트, default)과 구별되지만, 책에서는 '채무불이행'이라는 큰 틀에 속하는 의미로서 모라토리엄을 언급하고 있다.

 

공직에 있지 않은 몸이니 겁 없이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무한정 끌려가던 외채 협상에서 우리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고 봤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중략)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 이회창 캠프에 내려고 썼던 '선거 뒤 대처 방안'이란 보고서는 당선자 DJ에게 흘러 들어갔다. 한 일간지 기자를 거쳐 당시 DJ 비서였던 장성민에게 전달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DJ가 주목한 건 '모라토리엄'이 아니라 보고서 뒷부분이었다고 한다. '4월쯤 실업으로 인해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그전에 노조 문제를 해결할 큰 틀을 잡아야 한다' 대충 이런 골자였다. DJ가 이 부분에 밑줄을 치며 "정무적 판단을 곁들인 좋은 보고서."라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신뢰의 위기에서 첫 삽을 뜨다

"왜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느냐. 왜 간도 쓸개도 다 내어주었느냐."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 일을 얘기할 땐 모두가 현명해진다. 이랬으면 혹은 저랬으면 좋았을 텐데, 쉽게 얘기할 수 있다.

 

DJ 정권은 IMF 협약*을 쉽게 깰 수 없었다. 그랬다면 국제 사회가 한국에 등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얘기하겠지만,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기업들은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빌려 과잉 투자를 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별안간 '한국은 못 믿을 나라'라는 인식이 퍼졌다. 썰물처럼 시장에서 돈이 빠져 나갔다. 그것이 위기의 본질이었다. DJ가 그렇게 '국제 신뢰의 회복'과 '외자 유치'에 매달렸던 이유다.

*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조건으로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1997년 12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 총괄을 맡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꾸릴 무렵이었다. (중략) 그때 나는 '무엇도' 아니었다. 관직을 떠난 지 이미 20년. 대기업 임원, 신용평가사 사장, 로펌 고문, 국책 연구소 자문⋯⋯. 정처 없이 살아온 낭인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때 나는 낙선자인 이회창 캠프의 사람으로 분류돼 있기도 했다.

 

사흘 뒤인 성탄절 저녁. 집사람과 골프를 치고 집에 돌아오니 다급한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휴대전화가 흔하지 않던 때였다.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의 비서 김형준이었다.

위원장님이 급하게 보자고 하십니다.

 

어딥니까.

 

내일 아침 8시까지 하얏트 호텔 커피숍으로 오십시오.

다음날 아침. 커피숍엔 이미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정인용 전 부총리와 김용환 비상경제대책위원장, 그리고 비대위 대변인을 맡고 있던 김민석 의원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셋 다 표정이 심각하다. 나를 발견한 김 위원장이 손짓을 했다. 예나 다름없이 침착한 모습이다. 눈앞에 위기를 둔 사람 같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와 함께 일했던 게 벌써 20년 전이다.

비대위 와서 일 좀 해야겠네.

항상 그렇듯 단호한 어조다.

무슨 일 말입니까.

 

당장 일이 돌아가야 돼. 그런데 중구난방이야. 내가 장관 물러난지가 20년이 지났어. 그동안 정치만 했고. 자네가 와서 실무를 챙겨야겠어.

잠시 심호흡했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그 이름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임시 기구다. 정부 편제에도 없다. 하지만 공직이다. 여느 공직과는 크게 다르다. 지금같이 나라가 어려울 때 정말 제대로 된 일을 해볼 만한 공직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비대위 실무를 총괄하는 기획단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기획단을 맡겠습니다. (중략)

명단이 확정되자마자 직원들을 호출했다. 27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빌딩 15층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김용환 장관의 청을 받은 지 채 이틀이 안 돼 기획단이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파견 명령을 받은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6명이 그로부터 63일간 '초미니 정부'로 불리며 해치울 일들을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1997년 12월 27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이 출범한 첫날. 김용환 비대위원장이 봉투를 건넸다. 5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당장 필요한 데 쓰라는 것이었다. 당시 비대위는 '무소불위'였다. 기획단은 그 비대위의 '초미니 정부'로 불렸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현실은 딴판이었다. 정식 기관도 아닌 비대위인지라 예산 한 푼 배정돼 있지 않았다. 그 비대위의 산하 조직 뻘인 기획단임에랴. 당장 '기획단장'인 나부터 월급 한 푼 없는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1998년 1월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한국투자신탁 건물 15층.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의 여의도 집무실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임 부총리의 여의도 집무실을 비대위가 사실상 접수한 셈이다. (중략)

 

김 위원장이 건넨 500만 원으로는 사무용품 사기도 빠듯했다. 직원들은 자기 컴퓨터를 가져와 썼다. 사무용품은 대부분 한국투자신탁 창고에서 꺼내 썼다. 스테이플러, 포스트잇도 없어 한투 직원들 눈치를 봤다.

 

비대위 사무실로 부총리 집무실을 선택한 건 나였다. 나는 그곳을 일종의 고지(高地)로 봤다. 공산주의자 레닌은 '커맨딩 하이츠(The Commanding Heights·지휘소가 있는 고지)'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국가가 경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제권을 쥐는 행위'를 그렇게 표현했다. 비대위 초기에 내 머릿속을 꽉 채웠던 단어가 바로 그 '커맨딩 하이츠'였다. '비대위는 DJ 대통령 당선자의 들어오는 권력이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고지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상징이 부총리 집무실이었다. 평상시라면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것은 경제부총리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다. "지금은 비대위가 지휘를 맡아야 한다. 위기 극복의 큰 틀을 짜는 것도, 다음 정권의 경제 정책을 그리는 것도 비대위다." 그러나 이런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다.

사령권을 쥔 자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내려다본다
집무실 하나만 장악하면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이다
나는 그런 효과를 노렸다
(중략) 비대위 기획단은 부총리 비서실에 터를 잡았다. 10평 남짓한 공간 이었다. 비서까지 8명이 서로 마주보며 책상을 붙여 앉았다. 칸막이도 없었다. 회의하는 소리, 전화하는 소리, 타자 치는 소리가 뒤엉켜 와글거렸다. 기자들까지 취재한다고 왔다 갔다 하니 이런 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칸막이를 치지 않았다. 이곳은 일종의 '전시 상황실'이었다. 서로 나뉘어 앉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보가 한 곳에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시카고트리뷴 같은 해외 신문사의 편집국을 둘러보고 얻은 교훈이다.

 

그러나 나가는 정부, 김영삼 정권의 재정경제원은 호락호락 통제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신경전이 치열했다. 집무실뿐 아니다. 외환 자료도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으려 했다. 당시는 외환위기의 정점이었다. 위기에 대처하려면 외화 자금과 대외 부채 통계 상황 파악은 필수였다. 그런데 통 자료를 넘겨주지 않았다. 자료를 쥔 건 재정경제원 외화자금과장 김석동이었다. 지금 금융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 김석동이다.

* 「위기를 쏘다」가 쓰인 2012년 기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임기는 2011년 1월 3일부터 2013년 2월 25일까지였다.

김 과장, 통계 좀 빨리 보내주게.

 

아직 부총리가 자료 검토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검토하고 사인을 해주셔야 외부 반출이 가능합니다.

 

아니,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데, 언제 검토를 한단 말인가.

 

오전에 국회 일정, 오후에 청와대 일정이 있으셔서⋯⋯. 과천에는 저녁에나 오실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런 식이었다. 나는 한국은행 창구를 직접 장악해 외화 자금 통계를 챙겼다. 재경원에 기초 자료를 전달하는 게 한은이기 때문이다. 1월 중순이 되자 힘의 중심이 비대위로 본격적으로 넘어왔다. 그제야 재경원도 외화 통계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비대위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변양호 국제금융담당관과 김석동 외화자금과장이 그 과정에서 힘을 썼다. 우리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외환일보를 만들었다. 매일 이른 새벽 대통령 당선인 DJ를 깨우게 되는 바로 그 외환일보였다.

풍전등화의 대한민국, 외환일보를 작성하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의 첫 임무는 외환일보 작성이었다. 한국의 외환 금고는 물이 들어찬 소금 창고 같았다. 외환 사라지는 것이 꼭 소금 녹아내리듯 했다. 두 달 사이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신용등급이 10단계 추락한 나라였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라. 외국인들은 앞다퉈 돈을 빼갔다.

* 관련 기사: '손발 갖추는 비상경제대책위' (서울신문, 1998.1.4)

** 무디스, 피치와 함께 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 인정 받는 미국의 금융 기업. 국가나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발표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녹아내렸나. 외환보유액*을 확인하는 것은 응급 조치의 시작이었다. "외환보유액 숫자는 비대위가 가장 먼저 확인한다." 숫자를 확보해야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서 파견 온 오진규가 그 일을 맡았다. 외환집중제.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모든 외환은 한은 창구를 거친다. 오진규는 매일 자정 창구에서 따끈따끈한 숫자를 받아왔다. 런던 외환시장이 문을 닫는 시각이었다.

* 외환보유액이 많다는 것은 국가의 지급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낸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가진 외화는 4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정에 숫자를 받으면 일보는 새벽 서너 시에야 완성됐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날 들락거린 외환과 남은 외환보유액 정도였다. 보고서 양식은 김용환 위원장이 직접 손질했다. 보고서는 아주 간명해졌다. 나는 김 전 장관의 솜씨에 항상 감탄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김용환 전 비대위원장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1998년 2월 5일자 외환일보. 정식 제목은 '외환보유고, 금리 및 주가 동향 일일보고'다. / 「위기를 쏘다」 (중앙북스) 56페이지 / 사진: 손현

완성된 보고서는 김용환 위원장을 거쳐 대통령 당선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외환일보가 당선자의 경기도 일산 집에 팩스로 들어가는 시각이 보통 새벽 4시 30분쯤. 비서가 그 종이 한 장을 침실 문틈으로 밀어 넣으면 어김없이 침실에 불이 켜졌다고 했다. DJ가 새벽마다 일어나 숫자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김용환 전 장관이 직접 전해준 일화다.

 

종이 한 장 내려앉는 소리에 잠을 깨는 대통령 당선자. 얼마나 처연한 얘긴가. 누구나 들으면 혀를 찼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밤새 애를 태우며 외환일보를 기다리는 대통령 당선자, 그가 맡게 될 풍전등화의 나라. 이 이야기가 관가에 퍼지며 비대위의 위상이 굳건해졌다. '대통령 당선자는 비대위의 보고서로 새벽을 시작한다'가 정설이 됐으니. 재정경제원과 정보 공유를 둘러싸고 벌이던 실랑이도 이즈음 마무리됐다.

20년 전의 교훈,
항상 외환을 챙겨라

지금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3,000억 달러*를 오간다. 덕분에 최근 지구촌 재정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덜 흔들렸다. '외환 방패'라는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한때 "외환보유액이 지나치게 많다.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 헛웃음이 나왔다. 말이 안 되는 얘기라서가 아니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구나 싶어서였다. 외환이 바닥나 속이 타들어 가던 것이 불과 14년 전이다.

* 현재(2017. 10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845억 달러

 

적정한 외환보유액 수준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고 중간 사이즈인 나라는 항상 외환을 챙겨야 한다. 한때 완전히 구멍이 났던 외환 금고를 다시 쌓느라 국민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 고생을 잊지 않는 것,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이다.

진짜 개혁은 시스템으로 해야 한다

1998년 1월, 재벌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선은 많이 차가웠다. '재벌=환란 죄인'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500퍼센트를 넘나드는 부채비율, 문어발식 확장, 무분별한 외자 차입⋯⋯. 은행을 망가뜨리고 나라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이 재벌이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꼭 개혁해야 할 대상. 당시 국민 눈에 비친 재벌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내외 언론은 연일 재벌 개혁에 대해 써댔다.

 

그럴 때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 된 DJ의 생각은 어땠을까. 좀체 속내를 비치지 않는 그였지만, 재벌 개혁과 관련해선 강하게 고삐를 죄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DJ는 재벌을 직접 다루고 싶어 했다. 거기엔 개인적 섭섭함도 담겼을지 모른다. (야당 후보 시절 DJ는 5대 재벌인 현대·삼성·대우·LG·SK 총수에게 몇 차례 면담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 DJ의 생각을 꿰뚫고 있던 이가 김용환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1998년 새해가 되자 일산 자택으로 DJ를 찾아가 "당선자 시절부터 재벌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DJ는 "그럽시다."고 받았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DJ를 만난 직후 나를 찾았다. 그는 "이틀 안에 기업 구조조정 원칙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서근우를 불렀다. 금융연구원에서 일하던 서근우는 내 부름을 받고 비대위 기획단에 파견 나와 있던 중이었다. (서근우는 몇 달 뒤엔 금융감독위원회 제3심의관이 돼 5대 재벌 구조조정을 총괄하게 된다.)

기업 구조조정 원칙을 만들어야 할 텐데, 이 정도면 어떨까. 1)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 2) 상호 지급 보증 해소, 3)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4) 핵심 역량 강화.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거기에 실천 원칙을 추가하면 어떨까요.

그래서 정해진 게 (다음과 같은) 실천 3원칙이다.

 

1. 기업 스스로 한다

2. 정부는 가이드라인만 제시한다

3. 수단은 은행을 통해서 한다

 

그러나 김용환 대표나 DJ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김용환 대표는 4원칙에 '기업주의 책임 강화'를 추가해 5원칙으로 만들어 DJ에게 보고했다. DJ는 "5항을 좀 더 강하게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의 5항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가 탄생한다. DJ는 5항을 통해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을 압박하고 싶어 했다.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 하기야 이만큼 정치적 효과가 큰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좀 달랐다. DJ는 5항을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는 2항, 3항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5대 그룹이 자기 책임 하에 지급보증을 해소하고 부채를 줄이려면 오너의 사재 출연은 필연이다. 그래서 일부러 5항을 뺐다." 나는 김용환 대표를 통해 DJ를 설득했다.

재벌 구조조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박정희도 몇 번 실패했다. 전두환도 못했다. 정권이나 권력이 직접 재벌을 다루기 시작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재벌과 권력간 협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 재벌은 '이만큼 하겠다'고 하고, 권력은 '그 정도면 되겠다'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결국 정부가 지게 된다. 정부-재벌간 협의에서 정부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걸 막고 제대로 개혁을 해내려면 시스템으로 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좋은 건 은행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정권이 직접 재벌 다루지 말고
은행 통해 개혁하자

김용환 대표와 DJ는 나의 이런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만이 구조조정 5원칙의 작동 원리와 효과·위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DJ는 며칠 뒤인 1월 13일 국회회관에서 4대 재벌(대우 김우중 회장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과의 만남, 2월 초 63빌딩에서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기업 개혁은 은행을 통해서 하겠다."고 말한다. 시스템에 의한 재벌 개혁의 의미를 충분히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당시 김용환 대표와 DJ는 "5항을 꼭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재벌 총수의 사재를 털어내는 정치적 효과, 환란 극복을 위해 국민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해야 했던 두 거물 정치인들로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던 셈이다.

 

(뒤이어) 비대위는 그동안 재벌의 반발로 도입하지 못했던 선진 제도도 전격 도입했다. 우선 사외이사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 제도를 도입*하고 증권거래법과 회계 제도를 개선했다. 대주주의 횡령 및 배임이 법적으로 구속을 받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이외에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 17개 법률을 개정ᆞ제정했다. 재벌 그룹의 채무 보증을 막고 필요한 경우 빠르게 기업 화의(和議)**나 파산 절차를 밟게 하는 식이었다.

* 관련 기사: '사외이사제' (한국경제매거진 제 121호, 1998.4.1)
** 법원의 중재 아래 기업이 채권자에게 빚을 어떤 방법으로 갚겠다고 서로 약속함으로써 파산을 피하는 제도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비대위는 DJ 노믹스의 큰 틀을 짰다. 기업 구조조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위기 이후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점이다. '위기 이후 어떻게 새 시대를 열 것인가' 한국 경제가 어떻게 오래 먹을거리를 장만할지를 결정할 핵심적인 일이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새 정부의 집권 세력들은 비대위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발판을 짜라. 나머지는 우리가 맡으마." 비대위가 받은 인상은 그것이었다.

 

당시 DJ 정부는 앞으로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 채였다. '기업 경쟁력 강화'를 외치면서 정부가 간섭을 멈추지 않았던 기형적인 상황이 계속 펼쳐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정부가 직접 국가 대표 업종을 선정하려 했던 빅딜* 작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업종이 겹친 기업이 경쟁력 없는 계열의 사업을 넘겨주고 상대 기업으로부터 다른 사업을 넘겨받는 작업. 산업 비중을 조정하여 분야별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재벌 구조조정 서막이 오르다

1998년 2월 9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에 들어서자 좌중의 눈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30명이 모여 있었지만 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늦거나 빠진 사람도 없었다. 대한민국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30대 그룹, 그곳의 일선 사령관 격인 기획 조정실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 나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 관련 기사: '비대위가 재계에 강조한 사항' (한국경제, 1998.2.9)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예외는 없다
기대를 줘선 안 된다

(중략) 이 모임을 두고 누군가는 '저승사자의 호출'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청와대와 재벌 총수의 대리전'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어떻든 목적은 하나였다. 약속을 받는 것이다. 내가 이날 전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해 주십시오. 그 계획대로 구조조정을 실천해 주십시오. 결과는 시장이 평가할 것입니다.

바로 '은행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이다. DJ 정권의 재벌 다루기가 첫 단추를 끼우는 자리였다. 구조조정 계획을 받기만 하면 된다. 내용은 상관없다. 기업 스스로 구조조정 계획을 만들게 하는 것, 그래서 주거래 은행이 그 계획을 점검하게 하는 것, 이게 핵심이었다. 그 순간 기업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은행에 맡기게 된다. 은행을 우습게 알던 때였다. 웬만한 은행장이 대기업의 자금 담당 이사 만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은행과 기업의 관계는 크게 역전된다.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 제출. 빠듯한 마감 탓일까. 몇몇은 이미 얼굴색이 안 좋아졌다. (중략) 한번 침묵이 깨지자 웅성웅성, 여러 곳에서 불만이 나왔다. (중략) 내가 말을 잘랐다.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재무 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기업은 영원히 큰 빚을 지고 살아도 된다는 얘기입니까.

언성을 높이자 몇몇이 땀을 닦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진심이었다. 출발부터 예외를 인정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일단 출발을 해 놓으면, 예외는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예외를 인정하면 그게 원칙이 된다. 항공회사 사정을 봐주면 해운회사, 건설회사는 사정이 없겠으며 전자회사나 자동차회사는 할 말이 없겠는가.

기한을 넘겨선 안 됩니다. 오너의 도장을 찍어 가져오십시오.

책임을 총수에게 묻겠다는 '엄포'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올해 3월부터는 그룹 내 신규 상호지급보증은 없습니다. 은행에서 자기 신용으로 돈을 빌리든지 대출을 받지 않든지 둘 중 하납니다.

기조실에 대한 말도 했다.

정부가 기조실·비서실을 폐쇄하라는 건 아닙니다. 강제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외국 투자가 눈에는 정상적인 조직으로 비춰지지 않습니다.

사실상 폐지하라는 압력이었다. 당시 재벌 그룹의 기조실은 그룹 전체의 의사결정을 총괄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였다. 이런 조직을 그대로 두고선 오너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폐쇄 시기까지 못 박아줬다.

주총이 2월 말일 경우 정관 변경이 어렵겠지만, 3월 이후 주총을 하는 경우에는 2월 임시 국회 입법 내용에 따라 변경이 쉽게 될 겁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모른 척, 애써 무시하며 회의장을 나왔다. 기조실장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두려움, 억울함, 서러움 같은 것들이 뒤범벅된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대통령 당선자는 "재벌 개혁을 결코 흐지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 그리고 그 개혁의 최전선에 내가 서 있었다. 일부러라도 모진 말을 던질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나의 저승사자 노릇은 효과가 있었다. 닷새 만에 대부분 기업이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재벌 구조조정은 은행의 손으로 넘어오게 된다.

#3 들이닥친 위기 속에 큰 틀을 짜다 마침.

독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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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

    흡입력 있는 문장구성이 좋았다. 특히 중간중간에 당시 발행되었던 기사나 영상이 첨부되어 있어 출처나 원본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를 바로 해소할 수 있어서 좋았다.

  • 김**

    10점 만점에 100점 드리고 싶은 좋은 프로젝트입니다.

생사를 건 싸움, 개혁 최전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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