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초고속 합병

1998년 6월 20일, 신라호텔 일식집. 내가 들어서자 은행장들이 일어섰다. 나는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했다. 류시열 제일은행장, 신복영 서울은행장, 홍세표 외환은행장, 라응찬 신한은행장, 김진만 한미은행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모두 표정이 밝다. (중략)

 

이 자리에선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자리가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만든 자리다. 이들 은행이 아니라 다른 은행에 던지는 메시지다. 여럿이 모인 자리,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금감위원장이 이런이런 은행장들을 불러 저녁을 먹었다더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 뒤에 숨은 내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국민· 주택은행을 빼면 괜찮은 은행은 이들 여섯 정도다. 나머지는 불안하다. 살길을 찾아라." 메시지는 정확히 전달됐다. 상업·한일·조흥은행이 몸이 달았다. 부실 딱지가 붙었지만 퇴출은 되지 않을 것 같은, 역시 아슬아슬한 은행들이다. (중략)

 

배찬병 전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전 한일은행장. 1998년 7월의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우선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은행이 벼랑 끝에 서 있었다. 6월 말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 판정을 받았다. 살기 위해선 한 달 안에 경영 정상화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한복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한 달 안에 내놓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중략)

 

1998년 7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감위원장실.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이 함께 위원장실로 들어왔다. 배찬병은 대뜸 결론부터 꺼냈다.

위원장님. 우리 합병하기로 했습니다.

"둘이 합병하면 어떠냐."는 내 제안이 열흘쯤 됐을까. 그사이에 합병을 결심한 것이다. 하긴 요즘처럼 한가한 때가 아니었다. 하루를 한 달처럼 쓰던 때였다. 나는 며칠 전 "7월 말과 8월 1일은 다르다."며 7월까지 경영 정상화 계획을 내라고 한 차례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