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금융감독위원장 되어 개혁의 칼을 쥐다

1998년 2월 초,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중국집.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듯했다. TV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TV속 그는 늘 초조한 표정이었다. 당선 직후부터 무엇에 쫓기는 듯했다. 그럴 만했다. 평생 소원하던 국정 운영을 맡았지만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다 1월 28일, 채권단과의 외채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만기별로 연 7.85~8.35퍼센트의 고금리였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두 자릿수가 아닌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DJ는 외채 협상이 마무리되자 비로소 한숨을 돌린 듯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들을 모아 점심을 사겠다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 이다. 기획단장인 나를 데려간 것은 김용환 위원장이었다. "제일 고생한 이 단장이 빠져선 안 된다."고 했다.

 

DJ를 직접 대면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1월 13일 4대 그룹 총수들과의 모임에선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비대위원들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어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 하지만 힘이 있다. 위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나를 쳐다봤다.

실무기획단을 맡은 이헌재 단장입니다.

김용환 위원장이 소개하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일을 아주 잘한다고. 수고 많았어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중략)

급한 불만 끄고 떠난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 시절 '지속 가능성'에 정책 초점을 맞춘 것도 그래서였다. 누가 맡아도 일정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 시쳇말로 '시스템화'를 노렸다. 예컨대 기업 구조조정을 은행에 맡긴 것도, 시장이 감시하게 하기 위해서다. 정권과 재벌 간 협상·타협이 불가능하도록 장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