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시대의 종말?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9년에 발간된 <2020 트렌드 노트: 혼자만의 시공간>의 본문 내용을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미디어에서 지겨울 정도로 자주 다루는 기사 중 하나는 한국 소비시장의 지속적인 침체에 관한 것이다. 한산한 시장, 줄줄이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조명하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면 지인들이 올린 고급 레스토랑, 고가의 브랜드 제품 쇼핑과 관련된 포스트가 넘쳐난다. 또 휴가철만 되면 올라오는 해외여행 사진들을 보면 친구들은 하나같이 유명 리조트에서 여유롭게 선베드에 누워 있다. 미디어와는 너무 동떨어져 도대체 어느 쪽이 우리 사회의 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비싼 맛집에 가고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 1년에 몇 차례씩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도 가끔은 호캉스를 즐기고 맛집에 간다. 이들이 비싼 소비를 하는 것은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스타그램의 '#호캉스' 관련 게시물

과거에 소비자들의 구매요인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가격'이었다. 치약을 사려는데 브랜드가 두 가지라면 그중 더 저렴한 것이 선택되었다. 비단 생필품 소비만이 아니라 여가생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름휴가 장소를 고를 때 이왕이면 돈을 덜 쓰는 쪽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소비 가치관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특히 서비스업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가격을 덜 따지게 된 사람들은 무엇을 고려할까? '시간'이다. 시간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매일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의 가치가 모두 커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게 특별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에는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가라는 귀하고도 귀한 시간을 한두 푼 아끼느라 대충 즐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기껏 온가족이 해외여행을 가서 식비를 아끼고자 한국에서 이고 지고 온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싫고, 입장료가 아까워 아이들만 들여보내고 부모 한 명은 주변 카페에서 기다리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이왕 간 김에 그때만큼은 돈 생각하지 않고 최대한 즐기는 것이 더 현명한 소비라고 판단한다.

 

구매결정에서 가격의 중요성이 낮아진 또 하나의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가 부자가 될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절대다수가 한두 푼 아껴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과거 부모 세대는 콩나물 값 100원 아껴서 자식들 대학 보내고 결혼도 시켰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콩나물 값 아껴서 부자가 될 수 없다. 서울의 집값 상승세는 멈출 줄을 모르고, 아이는 낳는 것 자체가 경제적 부담이다.

 

2019년 서울의 아파트 실거래가는 평균 7억 5000만 원이었다. 한 달에 100만 원씩 저금한다 해도 60년 이상 모아야 살 수 있다. 강남은 더해서, 강남의 유명 아파트를 사려면 조선시대부터 돈을 모았어도 불가능하다.

 

조상님이 원래 돈이 많았던 게 아닌 이상 자력으로 돈을 모아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미션이 되었다. 이에 따라 평생 갖은 고생을 다해 집 한 채 사고 죽을 바에야 현재를 즐기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서른 살부터 매달 100만 원씩 모아 아흔 살에 집을 살 바에는 그 돈을 나와 가족을 위해 쓰고, 또는 몇 달 모아 근사한 여행을 떠난다. 미래보다는 현재가 행복한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얼마까지 쓸 수 있을까?

어차피 소비할 것, 이왕이면 더 좋은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왕이면 더 맛있는 것, 이왕이면 더 편안한 것이 선택된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사람들은 '이왕이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점차 증가하고 있다.

 

어차피 택시를 타면 1만 원 정도는 드는 것, 몇천 원 더 내고 편안한 타다를 이용하겠다는 것이 소비자들의 마음이다. 타다는 택시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택시의 불편함만을 해소해줌으로써 소비자들의 니즈를 만족시켰다.

 

타다는 원칙적으로 기사가 손님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또한 어디를 가든 미리 지정한 지점에 군말 없이 내려준다. 이 때문에 특히 임산부나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은 더욱 타다를 선호한다.

 

에버랜드 주차장에는 유료 발렛서비스가 있다. 발렛을 맡기는 데 추가로 1만 5000원을 내야 하지만 사전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다. 가족이 나들이를 온 시점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주차시간과 1만 5000원을 비교할 때 요즘 소비자들은 망설임 없이 1만 5000원을 내고 1시간 빠르게 입장하는 쪽을 선택한다.

 

무조건 싸고 질 좋은 것을 고르기보다는 그 순간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바로 OO계의 샤넬이야'

고가의 사치품은 구매하지 못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생필품에서는 최고급을 선택하는 것이 최근 트렌드다. 치약이나 식기건조대뿐 아니라 라면, 감자칩에서도 'OO계의 샤넬'이라는 말이 붙으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 이전에는 '때르메스'라는 별칭이 붙은 때밀이 수건이 온라인에서 품절 대란을 일으킨 바 있다. 실제로 SNS에서도 'OO계의'라는 용어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생필품의 프리미엄화는 내가 지금 지불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최대한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니즈(needs)가 반영된 결과다.

치약계의 샤넬, 루치펠로 ©북스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투자하기보다는 바로 지금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담겨 있다. 그것이 형편에 안 맞게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 가능한 소소한 제품 및 서비스로 이동해가는 것이다.

 

대출을 받아 명품 외제차를 지르는 것은 이제 쿨하고 멋진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책 없는 소비라 비난받는다. 하지만 몇만 원 또는 몇천 원 단위에서의 프리미엄은 누구도 질책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준으로는 2만 원짜리 치약을 구매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변화된 가치관 속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소비 가능한 영역에서는 가장 고급의 제품을 선택한다.

애매한 것이 최악이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빠지는 오류가 바로 '중간만 하자'는 것이다. 이 마인드가 왜 문제인지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백종원이 골목식당 사장님들에게 가장 많이 조언하는 것은 가격과 메뉴에 관한 것들이다.

 

쓸데없이 많은 메뉴, 어중간한 가격은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이다. 커피전문점도 마찬가지다. 가격이 가장 중요한 소비자들은 1000원대의 편의점 커피도 충분히 맛있다. 반면 맛이 중요한 소비자는 좋은 원두를 써서 맛있기만 하다면 비싸도 상관없다.

 

하지만 3000~4000원대의 커피는 이도저도 아니다. 어중간하다. 빽다방과 스타벅스 사이에서 중간 가격과 중간 맛을 내세웠다가는 몇 달 버티기도 힘들다. 소비 가치관이 변화함에 따라 이제는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강점이 있는 것들만 살아남고 있다.

 

이제 뚜렷한 개성과 전략이 없다면 더 이상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기존의 강력한 구매요인이었던 '가격대비'의 효용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가격대비 좋다'는 언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가격에 맞춰 품질을 기대하는 '가격대비'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것이 현재 소비시장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다. 구매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이왕이면 샤넬급을 소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가성비'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자. 저렴하려면 경쟁 브랜드를 압도할 만큼 확실하게 저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성비는 잊자. 니즈를 충족시켜 준다면 가격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