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고 투명하게 평가해주십시오
1998년 6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오후 5시, 나는 인천시 심곡동 한국은행 연수원의 회의실에 들어섰다. 12명의 은행 경영평가위원의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합숙에 들어간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도 말이다.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로구나⋯⋯' 하긴 당연할 일이다. 사상 최초의 은행 구조조정이다. 모두 12개 은행이 그들 손바닥 위에 놓였다. 자신들 판단에 따라 어떤 은행은 죽고, 어떤 은행은 산다.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위원장을 맡은 양승우 당시 안진회계법인 대표는 눈에 비장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은행 퇴출*. 시나리오는 이미 1998년 2월에 나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5차 의향서에서 정부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8퍼센트가 안 되는 은행 12개의 구조조정을 6월까지 끝내겠다."고 약속한 터다. 어떤 은행이 퇴출될지 정하는 판관 역할을 경평위가 맡은 것이다.
* 관련 기사: '은행 구조조정 일지' (한국경제, 1998.6.30)
경평위는 6대 회계 법인에서 고른 회계사들과 대형 로펌의 금융 전문 변호사 등으로 구성됐다. 특이한 인물도 한 명 있었다. 윌리엄 헌세이커 당시 ING베어링증권 이사다. 미국인으로 모르몬교 신자였다. 술·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한 성격'이라고 전해 들었다. 외국인인 그를 경영평가위원회에 끼워 넣자는 건 내 아이디어였다.
평가위원들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됐다. 가족들과 딱 한 차례 통화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게 전부였다. 연원영 구조개혁기획단 총괄반장이 양승우 경평위원장에게 두어 차례 전화해 진도를 체크했다. 경평위 회의 내용은 모두 녹취됐다. (중략)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세계에 알려야 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평가였다. 내외 압력이 간단치 않을 것이다. '한국이 어떻게 은행을 구조조정할 것인가' 그 결과에 따라 한국 시장이 신뢰를 회복할 수도 있고, 더 잃을 수도 있다. 헌세이커가 그 모든 것을 증언해줄 것이다.
수고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