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을 파는 사람들, 딜러

2004년 5월,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 Gallery)는 영국 런던에서 연 첫 번째 전시 작가로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1928~2011)를 선택했다. 거무죽죽한 두꺼운 선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다소 난해한 회화 작품들이었다.

 

전시 오픈에 앞서 가고시안 갤러리의 직원들은 컬렉터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고시안이 이 작품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고객은 모두 작품을 샀는데 그 중 25%는 어떤 작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작품을 구매했다.

 

어떤 작품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이들은 왜 1억 원 가까이 되는 작품을 선뜻 구입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컬렉터들은 투자 자문가의 결정을 믿듯 미술계의 슈퍼파워 딜러인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 1945~)의 결정을 무조건 믿고 따른 것이다.

 

여기서 래리 가고시안이 판매한 것은 단순히 사이 트웜블리라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안목이었다.

컬렉터들은 작품이 아닌
아트 딜러의
안목을 구매했다
이렇게 자신의 신념과 시대를 읽는 눈을 판매하여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세계적인 아트 딜러들은 초보 컬렉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안목을 파는 사람들, 딜러

2004년 5월,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 Gallery)는 영국 런던에서 연 첫 번째 전시 작가로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1928~2011)를 선택했다. 거무죽죽한 두꺼운 선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다소 난해한 회화 작품들이었다.

 

전시 오픈에 앞서 가고시안 갤러리의 직원들은 컬렉터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고시안이 이 작품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고객은 모두 작품을 샀는데 그 중 25%는 어떤 작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작품을 구매했다.

 

어떤 작품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이들은 왜 1억 원 가까이 되는 작품을 선뜻 구입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컬렉터들은 투자 자문가의 결정을 믿듯 미술계의 슈퍼파워 딜러인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 1945~)의 결정을 무조건 믿고 따른 것이다.

 

여기서 래리 가고시안이 판매한 것은 단순히 사이 트웜블리라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안목이었다.

컬렉터들은 작품이 아닌
아트 딜러의
안목을 구매했다
이렇게 자신의 신념과 시대를 읽는 눈을 판매하여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세계적인 아트 딜러들은 초보 컬렉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컬렉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당연히 작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을 직접 구매해 함께 지내고 다루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요. 때때로 이런 질문들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내가 이 작품을 5년 후에도 좋아할지 어떻게 알죠?" 물론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당신이 직접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작품과 더불어 생활하고, 그것이 당신의 사고와 인식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를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0년 후에도 그 작품이 매력적이고 흥미로울 것이라 확신하고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림의 가격이 크게 상승하거나 취향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일단 작품 구입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술품 수집은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당신이 작품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과정 자체가 발생하지 않겠죠.


- 아담 린데만, <컬렉팅 컨템포러리 아트>, TASCHEN(2013)

그렇다. 이젠 마이다스의 손이 아니라 마이다스의 '눈(眼目)'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자본으로 부상한 '미적 가치'는 마르크스 시대 이후의 현대 경제학자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똑같은 원자재인 실크로 넥타이를 만들어도 디자인에 따라 2천 원에서 40만 원까지 20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면으로 같은 티셔츠를 만들어도 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30배의 이상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렇게 상식적인 경제개념을 넘어서 수십 배에서 수백 배, 때로는 수천 배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호 가치의 소비들 사이에서, 특히 미술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살아있는 거위로 부상했다.

 

이 황금알을 만드는 눈이 바로 안목이다. 근대 미술 시장에서는 50년 사이에 실크 넥타이가 만든 수백 배의 차액을 수천 배의 차액으로 올리는 것 같은 현상이 수도 없이 목격되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자신의 안목을 믿고 실천하는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백수십 년 전 3백 프랑에 사들인 그림이 수십억 프랑으로 오르고, 수천 달러에 사들인 그림이 1천 2백만 달러에 팔린 사례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황금 눈이 가져온 '당연한 행운'이라 부른다.

 

작품이 내뿜는 황금 기운을 알아보는 사람들, 딜러.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유명 작가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딜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폴 뒤랑 뤼엘, 인상파의 가치를 알아본 딜러

2015년 3월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서는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전시, <인상파 창설전(Inventing Impressionism)>이 열렸다. 주제가 암시하는 것과 같이 이 전시는 인상파 그림이나 화가를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인상파를 탄생시킨 화상, 폴 뒤랑 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시의 큐레이터는 그를 '인상파 발명가'라고 불렀다.

 

폴 뒤랑 뤼엘, 아트 딜러인 그는 그리다 만 그림이라고 혹평을 받던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여 경제적으로 그들을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화상이었다. 오늘날 미술계에서는 그를 국제예술품 시장을 개설한 화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 큐레이터는 그를 회고하고 기념하기 위해 이 전시회를 마련했다.

 

이 전시는 당시 뒤랑 뤼엘이 거래했던 수천 점의 작품 중 전시가 가능한 약 85점의 작품만을 전시했지만, 이색적인 기획을 통해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일본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수집가들의 소장품을 빌려와 선보였던 이 전시회는 1870년대 초반 모네, 피사로, 드가, 그리고 르누아르의 초기 핵심 작품들을 선보여, 뒤랑 뤼엘이 지닌 소장가로서의 안목과 시대를 읽는 눈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1870년대와 1880년대의 파리 화단은 아카데미 미술가*인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uereau, 1825~1905) 등이 여전히 인기를 끌며 주로 거래되고 있던 터라,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투자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에서 완전히 천덕꾸러기로 소외당한 예술가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 고등교육기관의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미술가들을 지칭하는 말.

 

1894년 인상파 화가인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가 본인이 수집했던 수백 점의 인상파 그림들을 파리 문화성에 기증하고자 하였으나, 문화성의 관리들이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거절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대중들뿐만 아니라 지식인 관리들까지도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는 미술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평가를 내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뒤랑 뤼엘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천 점이나 사들인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투자였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르누아르 작품만 무려 1,500점을 사들일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었다.

Pierre-Auguste Renoir, Two Sisters(1881)

이것이 무리한 투자라는 시선을 받는 와중에도, 뒤랑 뤼엘은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고 자신의 안목에 전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가난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이런 까닭에 인상파 화가였던 모네가 이렇게 증언하기도 했다.

뒤랑 뤼엘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흘러 다시 오늘날 주목받게 된 뒤랑 뤼엘의 눈은 과연 특별했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시대를 전망할 줄 알던 그의 안목은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에게조차 성공과 영광을 주는 도구가 되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시대를 읽어낸 딜러의 승리

1848년은 역사적인 전환기로 문화예술사에도 한 획을 그은 중요한 해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카데미를 뚫고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1850)>으로 프랑스 살롱전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Jean-Francois Millet, The Sower(1850)

<씨 뿌리는 사람>은 이전까지 회화에서 주체가 된 적이 없었던 농부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밀레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의 사회 변화를 날카롭게 간파해낸 결과였다.

 

그러나 이때 영국의 문화예술계와 지식인들은 변화되는 시대를 전혀 읽지 못했고, 심지어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 르네상스 이전의 고전에 기초를 두자는 미술선언(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을 발표했다.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대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파리와 런던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직관을 따라갔고, 결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상파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라파엘 전파가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고작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인상파 화가들은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려냈다. 평가와 가격은 천지차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라파엘 전파의 예쁘기만한 그림들은 인상파와 비교조차 되지 못했고, 그림 가격도 인상파 작품들이 수십 배에서 백 배 이상 비쌌다.

 

당장 돌이켜보아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를 아는 사람들은 있어도 라파엘 전파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과 워털루 전쟁의 패배로 인해 쇠락하고 있는 프랑스, 이 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은 프랑스의 진보적 화가들(바르비종파*와 인상파 화가들)이 가진 시대를 보는 눈이었다. 이들은 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파리를 예술 근대화의 근원지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가 문화예술사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 Barbizon School. 19세기 중엽에 파리 근교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살면서 숲의 풍경이나 농민 생활을 그리던 프랑스 화가의 그룹. 자연의 단순함과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반면 힘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은 프랑스에게 밀려나, 지금까지도 문화사의 중심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시대를 읽는 눈을 가지지 못했던 영국 지식인들의 책임이 막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문화계 인사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고, 16세기의 눈을 가지고 격변하는 19세기를 헤쳐나가려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 변화하는 시대에
그것을 읽는 눈은
곧 생존의 도구가 된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냉정하게 읽어내고 각자 다른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새롭게 열린 극동의 미의식에 눈을 돌리고,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은 타이티와 같은 때묻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뿐만 아니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술집 풍경을 그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

Vincent van Gogh, The Night Café(1888)

이렇게 변화를 온몸으로 감지하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뒤랑 뤼엘 또한 시대를 읽어내며 그들의 작품을 구입했던 것이다. 여러 번의 경제적 파산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인상파 화가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89세에 마침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침내 인상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나의 광기는 지혜였다. 내가 만약 60의 나이에 죽었었더라면 나는 저평가된 보물들에 둘러쌓인 채 파산했을 것이다.

저평가되어 아무도 돌보는 이없이 사라질 수 있었던 그림들을 인류 문화의 유산으로 남겨 마침내 승리로 이끈 뒤랑 뤼엘의 눈, 그리고 전화 한통으로 작품을 완판시킨 가고시안의 안목. 이것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 그 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