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에 거대한 충격을 준 전시, <센세이션>

고등학교 영어 시간이었다. 당시 담당 교과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온화한 성품의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수업 시작에 앞서 선생님께서 항상 한 편씩 읽어주시던 영시는, 학생들의 다양한 반응을 끌어 냈다. 수업에는 언제나 영어 받아쓰기 연습이 뒤따르곤 했었다. 짤막한 영어 기사의 일부분을 손수 잘라내 만드신 시험지에서는 선생님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내내 치렀던 받아쓰기 시험 문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바로 1997년 영국 로얄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에서 열린 <센세이션(Sensation)> 전시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230년이 된 영국의 갤러리에 하루 2,800명의 관람객이 최대 7파운드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를 관람했다는 것이다.

 

이 전시의 관람객은 총 284,734명에 이르렀다. 시험지는 한눈에 봐도 숫자 연습이 그 주된 목표였을 테지만, 이 기사가 가지는 진짜 의미를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마침내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2014년에야 말이다. 

 

영국 로얄아카데미, 우리말로 바꾸면 왕립미술원이 된다.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상징하는 장소에서 벌어진 이 기절초풍할 전시는,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며, 자녀 동반 여부는 부모의 판단에 맡긴다"라는 문구를 안내문으로 당당히 내걸며 영국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미술계에 거대한 충격을 준 전시, <센세이션>

고등학교 영어 시간이었다. 당시 담당 교과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온화한 성품의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수업 시작에 앞서 선생님께서 항상 한 편씩 읽어주시던 영시는, 학생들의 다양한 반응을 끌어 냈다. 수업에는 언제나 영어 받아쓰기 연습이 뒤따르곤 했었다. 짤막한 영어 기사의 일부분을 손수 잘라내 만드신 시험지에서는 선생님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내내 치렀던 받아쓰기 시험 문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바로 1997년 영국 로얄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에서 열린 <센세이션(Sensation)> 전시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230년이 된 영국의 갤러리에 하루 2,800명의 관람객이 최대 7파운드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를 관람했다는 것이다.

 

이 전시의 관람객은 총 284,734명에 이르렀다. 시험지는 한눈에 봐도 숫자 연습이 그 주된 목표였을 테지만, 이 기사가 가지는 진짜 의미를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마침내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2014년에야 말이다. 

 

영국 로얄아카데미, 우리말로 바꾸면 왕립미술원이 된다.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상징하는 장소에서 벌어진 이 기절초풍할 전시는,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며, 자녀 동반 여부는 부모의 판단에 맡긴다"라는 문구를 안내문으로 당당히 내걸며 영국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총 42명의 서로 다른 작가가 출품한 작품 110점 중에는 이미 언론에 유명세를 탄 데미안 스티븐 허스트(Damien Steven Hirst, 1965~)의 상어 작품,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의 텐트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1995)>, 마크 퀸(Marc Quinn, 1964~)이 자신의 몸을 캐스팅하고 자신의 피 약 4.5리터를 이용하여 만든 <셀프(Self, 1991)>라는 작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을 작품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고, 이것은 미술계에 수많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온 대사건이 되었다. 전시 도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접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작품들이 예술이 될 수 있나? 여기서 예술이란 무엇일까? 왕립미술원은 어떤 전시를 진행했었기에 충격이라는 단어가 연일 터져나왔던 것일까?'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은 천재, 찰스 사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의 질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언론과 미술계가 보도했던 바로 그 이슈들과 일치했고, 그것이 바로 이 전시가 지닌 힘이었다. 이 전시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시를 기획했던 천재 마케터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1943~)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어떤 능력이
전시를 이토록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당시는 1990년대 후반으로, 미국에서는 갑자기 힙합 문화가 부상하면서 대중들이 기존에 공유하고 있었던 삶의 리듬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식자층들은 위기의 시대, 야만스런 문화의 시대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표명하고 대중을 비판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사회적 혼란과 정체로 인해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선이 점차 사라지고, 고급문화가 무차별적으로 함몰되는 과정 속에서 문화가 오히려 점점 더 '야만스러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1996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1969~2010)이 정체기에 빠진 상류층 하이브랜드인 지방시(Givenchy)에 스카웃되었다. 성, 폭력, 마약을 통해 점점 더 사비지(savage)*화되는 문화적 흐름 속에서 지방시가 맥퀸을 선택한 것은, '야만'이 일종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확실한 사례가 되었다. 사치는 맥퀸의 사례를 목격하면서 죽음이라는 주제가 시대적인 문화 코드가 될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 주제를 자신의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로 삼았다.

* 야만적인, 끝내주게 멋진, 기막히게 좋은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2011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진행된 알렉산더 맥퀸의 전시명 '사비지 뷰티(Savage Beauty)'는 맥퀸의 작품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사치는 1943년 이라크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가족이 영국의 직물 공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영국으로 이주했고, 미국의 팝 문화에 푹 빠져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이때부터 담뱃갑 속에 들어있던 카드들이나 슈퍼맨 코믹스와 같은 만화책들을 열광적으로 모으며 수집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26살이 되던 1969년에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작품을 구입한다. 그것이 그가 수집한 첫 번째 미술 작품이었다. 나는 이것을 안전한 출발이라고 부르고 싶다. 1970년대는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시대로 미국 뉴욕이 미술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대였다. 1985년 오픈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조차, 오픈했을 당시에는 작가 5명 중 4명이 미국의 작가였을 정도로 당시에는 미국의 미니멀리즘과 팝아트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 미국의 개념미술가이자 미니멀리즘 작가

 

사치는 1988년,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데미안 허스트가 기획하고 참여한 전시 <프리즈(Freeze)>를 접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영국의 젊은 작가들을 키울 결심을 하고 본격적으로 전략적인 딜러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데미안 허스트와 마크 퀸을 직접 지원하기로 하면서 미국 뉴욕에 전시회를 열고, 언론매체를 이용하여 두 작가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는 사치앤사치(Saatchi & Saatchi) 미디어 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언론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알았다.

 

이때 그는 기존의 작품들을 모두 팔아치우고 동시에 많은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5천 파운드 미만으로 구입했다. 이는 모두 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치는 이미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것을 통해 미술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런던 북쪽의 스위스 코티지에 있던 거대한 창고를 갤러리로 개장하고, 사람들이 쓰레기라 생각할 법한 작품들을 이 갤러리에서 공개했다.

 

이어 그는 1997년 마침내 영국 미술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왕립미술원에서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며, 자녀 동반 여부는 부모의 판단에 맡긴다"라는 문구를 내건 전시를 진행했다.

터부를 깨면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면 돈이 된다는 것을
사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치가 1988년 허름한 창고에서 열린 YBA(Young British Artists)의 <프리즈>전을 보면서 '미래의 사람들은 이런 류의 미술품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신 그곳에서 작가들이 몸으로 읽어낸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 '쓰레기처럼 보이는 이것들을 내가 최고의 미술품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영국 로얄아카데미의 전시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으며, 사치는 황금을 빚어내는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딜러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전시를 통해 존폐 위기에 놓여 있던 영국 로얄아카데미의 재정 적자를 해결하는데 일조했다. 그 다음 해인 1999년 <센세이션> 전은 뉴욕으로 건너가 다시 한번 막을 올렸다. 사치는 말 그대로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며, 세계적인 전시 기획자 및 수집가로 데뷔했다. 

1,245억 원짜리 미술품은 과연 사기극인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만남'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꼽고 싶다. 이는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와 관객, 화상은 계속되는 만남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데에는 이 시대를 직관할 수 있는 눈, 열린 감각, 그리고 이를 알아봐주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앞으로 마주칠 자신의 삶에 대한 만남을 준비하고, 열린 눈과 시대가치를 느낄 수 있는 깨어있는 몸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진정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전시를 기획하고 미술투자강의를 진행했던 지난 1년 반 동안에도 세계 미술 시장과 학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가 터져나왔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사건은 27세로 요절한 젊은 작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의 작품이 2017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245억 원에 낙찰된 사건이다.

 

* $110.5 million Basquiat painting makes history ©CBS This Morning

 

1,245억 원이라는 금액은 과연 지불할 가치가 있는 합리적인 액수일까? 많은 이들은 이것을 비정상적인 가격이라고 폄하하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시장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이것이 일종의 사기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정말 비정상적인 사기극에 불과한 것일까? 

 

미술품의 가격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사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선수들의 몸값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지난 1월 9일 언론은 토트넘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의 몸값이 약 926억 원(7,260만 유로)에 육박하고 있음을 보도했다.* 불과 두 달 전 약 872억 원(6,750만 유로)에서 54억 원 정도가 더 상승한 것이다.

* 관련 기사: 손흥민 父 언급한 몸값 '1000억', 현실로? (골닷컴, 2018.1.9)


두 가지 사례 모두 현대 경제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수의 경우, 아무리 훌륭한 선수일지라도 부상이나 혹은 개인적인 악재로 인해 구단이 제시했던 천문학적인 연봉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사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반면 검증받은 미술품의 가격은 결코 떨어지는 일없이 계속 상승한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축구선수의 연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락하지만, 미술품의 값은 결코 제가격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미술품 가격의 합리적인 이유

금융시장의 불안은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세계 금융을 이끌며 가장 안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영국의 은행들이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정부의 도움으로 파산위기를 극복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2008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후 로이드, 바클레이즈, HSBC, RBS, 산탄데르 영국 지사는 구제금융과 보증의 형태로 1조 파운드(약 1,760조 원)의 정부 지원을 받고 나서야 겨우 회생할 수 있었다. 

 

미술 작품의 급격한 상승과 인기 원인에는 이러한 금융경제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이 있다. 올해는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경제가 동시에 성장하는 등 큰 진전이 있었지만, 전 영국은행 총재 머빈 킹(Mervyn King)은 '우리는 여전히 위기에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의장과 함께 위기 수습을 맡았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은행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은행 스스로도 기존 투자로 더 이상 수익을 올릴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투자처, 미술품 투자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미술품 투자가 주목받게 된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이런 현상을 포함하여 미술품 가격의 상승 및 인기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원인들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미술 시장에 비단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투자자들만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고 단돈 만 원 이하의 돈으로 미술에 투자를 하는 일반인들 또한, 안목 하나로 지적 유희와 투자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술품이 단순한 사치재가 아니라 '부(富)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투자 자산임을 보여준다. 미술품은 다른 재화와는 달리 감가상각의 영향에서 자유로우며,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희소성과 역사가 더해져 가치가 더 오르는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미술품 가격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투자자들은 합리적인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 곳에는 결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 합리적인 원인을 구성하는 데에는 7개의 외적 요인과 4개의 내적 요인이 작동하고 있다. 이제부터 이들 요인이 어떻게 미술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사례들과 함께 그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