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스펙트럼을 만들기까지

스마트 TV 플랫폼 GUI 디자이너

첫 직장, 첫 팀에서의 첫 직함이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항상 UI팀에서 전달한 와이어프레임(Wireframe)* PDF 문서, 마케팅팀에서 보내준 프로젝트 기획 메일, 포토샵 아트보드가 열려 있었다.

* 화면 단위의 레이아웃을 설계하여 뼈대를 만드는 작업

 

일이 많기로 유명했던 회사답게 쉴 틈 없이 일이 몰아쳤다. 정확히 '내가 지금 어떤 디자인을 하고 있다'라고 인식하기 전에, 들어오는 일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를 올리기 바빴던 시간이었다. 또한, 1년에서 1년 6개월 주기로 하나의 제품 혹은 서비스 사이클이 끝날 때마다 소속 팀이 바뀌었다. 잦은 조직 개편으로 팀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곤 했다.

 

MIT 미디어 랩(MIT Media Lab)에서 온 리더가 이끄는 새로운 팀에 메인 디자이너로 합류했을 때였다. 그 팀은 대량 생산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작하기보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별도의 기획자가 없는 첫 팀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개발자였던 터라, 초반 1년 동안은 대부분 혼자 디자인 작업을 해야만 했다.

 

모든 팀원이 기획 회의에 참여했고, 토론을 통해 주요한 의사결정을 했다. 정적·동적 디자인 작업을 넘어 기획의 밑그림부터 정보구조 설계, 와이어프레임 제작, 비주얼 디자인, 인터랙션 디자인까지 수많은 영역을 넘나들어야 했다. 외국 디자이너들과 협업도 잦아 각종 협업 툴의 초기 버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여러 직군과 효율적으로 협업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최근 스타트업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수행하는 일의 형태와 비슷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 기술과 환경에 비해 국내 디자인 환경은 각 회사의 사정에 맞추어 고착화될 때가 많았다. 변화하는 디자인 환경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이를 개선하고자 실무를 하는 디자이너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부터 새롭게 출발했다.

 

2017년부터 뜻이 맞는 멤버들과 함께 디자인 커뮤니티 플랫폼 '디자인 스펙트럼(Design Spectrum)'을 운영했다. 디자인 스펙트럼은 기본적으로 국내 디자이너들이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장을 만들기 위한 커뮤니티로 다양한 디자이너와 함께 세미나,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온라인에서 아티클을 나누고 팟캐스트를 내보내며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고자 노력 중이다.

ⓒDesign Spectrum

지난 2년 동안 인하우스, 에이전시, 스타트업, 프리랜서 등 각각 다른 형태로 일하는 디자이너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부분 현재 디자이너를 둘러싼 환경에 관한 것이었다. 일하는 방식, 발전하는 디자인 도구, 디자인팀 내부 혹은 다른 직군과의 커뮤니케이션,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법…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 수많은 디자이너가 있음에도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다른 디자이너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옆 회사의 디자이너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며
디자인하는지 몰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각자 어떻게 일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목적에 맞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자세한 상황은 다를지언정, 내·외부에서 변화가 필요하며 실제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공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 퍼블리와 함께 이야기하다

'디자인 환경의 변화'는 어떤 의미일까? 이 논의가 추상적으로 그치지 않고, 일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로 엮였으면 했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에만 집중하길 꿈꾸지만, 실제 디자이너의 생활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현업에서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상황에 부딪힌다. 다양한 사람에게 나의 디자인을 설득하고, 내가 한 디자인이 맞는 선택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들은 내 디자인을 평가하고 수정을 요청한다.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디자인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동료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디자이너 모두의 이야기다

콘텐츠를 풀어내는 매체는 여러 가지가 있다. 디자인 스펙트럼이 기존에 해왔던 세미나, 컨퍼런스, 팟캐스트, 브런치, 유튜브 영상 등이 모두 후보였다. 다만, 이번에는 단순히 일하는 모습만을 그리기보다 '왜' 그렇게 일하게 되었고, 디자인하게 되었는지 심층적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매체가 글이었다. 디자이너로서 글을 쓰다 보면 '이 정도는 보통 알겠지'라며 간과하는 포인트가 많다. 더욱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퍼블리(PUBLY)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디자이너와 비 디자이너 모두 공감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둘, 기민한 스타트업에서 대답을 찾다

디자인 환경의 변화를 풀어내기 위해 스타트업에 주목했다. 인하우스는 회사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시스템이 달라서 내부 변화가 쉽지 않다. 에이전시는 클라이언트와 연결된 일을 많이 하므로 주도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스타트업은 다르다. 스타트업은 다른 곳보다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케이스가 많다. 대부분 적은 인원으로 일하기에 디자인이 실제 제품에 적용될 확률도 높다. 상대적으로 디자이너는 자신들의 제품 혹은 서비스를 만든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디자인에 임한다.

 

인터뷰이로 선정한 디자이너들이 근무하는 스타트업은 각 산업 분야(여행/엔터테인먼트/음악 산업/O2O/인테리어/커뮤니티)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해당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들은 UX 디자인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어떤 곳은 스타트업임에도 꽤 탄탄한 디자인팀 구조를 갖추고 있고, 어떤 곳은 디자이너 혼자 디자인과 개발을 모두 소화하기도 한다. 여섯 명의 디자이너가 모든 스타트업의 UX 디자인을 커버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다양한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셋, 디자이너들의 고민을 나누다

회사가 속한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디자이너들은 '기술과 데이터', '사용자', 다른 직군의 '관점'을 예전보다 깊게 알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측면에서 디자이너가 가장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1. 디자이너의 경계는 어디인가

UX 디자이너, UI 디자이너, GUI 디자이너, 인터랙션 디자이너, 프로덕트 디자이너, 비주얼 디자이너, 서비스 디자이너는 모두 테크 산업에서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디자이너를 지칭하는 단어인데, 최근 그 경계가 일부 모호해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들의 회사에서 UX 디자이너,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GUI 디자이너, 인터랙션 디자이너, UI 디자이너가 했던 역할 역시 이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2. 어디까지 역할을 확장하며, 어떤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가

어떤 디자이너는 전달된 기획 문서를 토대로 시각화하는 일만 맡는다. 어떤 디자이너는 기획과 정보 구조 설계, 비주얼 디자인까지 도맡는다. 또 어떤 디자이너는 인터랙션 디자인 및 프론트엔드 코딩에 집중하며 의사결정을 한다. 여건에 따라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일의 범위가 늘어난 만큼, 디자이너가 프로젝트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늘어났을까?


3. 쏟아지는 디자인 지식과 도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가

포토샵과 파워포인트만으로 디지털 프로덕트를 디자인하는 시기는 지났다. 스케치 앱(Sketch App), 피그마(Figma), 프로토파이(ProtoPie), 프레이머(Framer) 등 정보 구조 설계와 시각화를 담당하는 새로운 도구가 많아졌다. 업무 처리 방식이 협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협업 도구, 버전 관리 도구, 리소스 공유 방법에 대한 시스템도 체계적으로 구성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몇 년 전에는 '코딩하는 디자이너'라며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프론트엔드 코딩 바람이 불었고, 최근에는 데이터 분석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학습해야 할까?

ⓒKrisztian Tabori/Unsplash이 프로젝트를 통해 각 필드에서 일하는 스타트업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인터뷰에서 다룬 내용들은 디자이너 개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주관적인 견해이기에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다른 해석이 될 수 있다. 다만, 변화하는 환경에서 분투하는 디자이너들의 고민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함께 공감하고자 했다. 부디 이 글이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디자이너들, 비즈니스에 임팩트를 주기 위해 역량을 키우는 디자이너들에게 힘을 주는 가이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