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시작하며

Editor's Comment

이 인터뷰는 2018년 5월부터 7월까지 촬영한 'How to Design'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2018년 10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인터뷰이의 확인 및 수정 작업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단, 일부 데이터는 현재 시점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재민 디자이너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리디 주식회사(RIDI Corporation, 이하 리디)의 CDO(Chief Design Officer)였다. 그는 전자책 플랫폼 리디북스(RIDIBOOKS)와 전자책 단말기 페이퍼(PAPER)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디자이너의 전통적 업무인 그래픽 결과물, 아트워크, UI(User Interface) 디자인부터 디자인 시스템 확립, 팀 매니징, 비즈니스 의사결정까지 책임졌다. 당시 리디는 초기 스타트업이었기에 그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2017년 말, 배재민 디자이너는 여행에 관한 모든 상품을 파는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MyRealTrip)으로 이직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넘은 2019년 초, 그는 새로운 팀과 변화한 스타트업 환경에서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을까. 또한,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숫자와 친한 디자인이란?

배재민, 마이리얼트립 디자인 팀장

김지홍(이하 생략): 마이리얼트립 합류 전에도 리디 등을 거치면서 디자이너로서 많은 경험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간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배재민(이하 생략): 제가 디자인을 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에는 UX(User eXperience)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했습니다. 그때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언가를 예쁘게 만드는 것에 가까웠어요. 저도 인터페이스를 세련되게 디자인하는 등 시각적인 결과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디바이스와 서비스 환경이 바뀌면서 'UX', '사용성'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인터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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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2018년 5월부터 7월까지 촬영한 'How to Design'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2018년 10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인터뷰이의 확인 및 수정 작업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단, 일부 데이터는 현재 시점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재민 디자이너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리디 주식회사(RIDI Corporation, 이하 리디)의 CDO(Chief Design Officer)였다. 그는 전자책 플랫폼 리디북스(RIDIBOOKS)와 전자책 단말기 페이퍼(PAPER)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디자이너의 전통적 업무인 그래픽 결과물, 아트워크, UI(User Interface) 디자인부터 디자인 시스템 확립, 팀 매니징, 비즈니스 의사결정까지 책임졌다. 당시 리디는 초기 스타트업이었기에 그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2017년 말, 배재민 디자이너는 여행에 관한 모든 상품을 파는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MyRealTrip)으로 이직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넘은 2019년 초, 그는 새로운 팀과 변화한 스타트업 환경에서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을까. 또한,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숫자와 친한 디자인이란?

배재민, 마이리얼트립 디자인 팀장

김지홍(이하 생략): 마이리얼트립 합류 전에도 리디 등을 거치면서 디자이너로서 많은 경험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간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배재민(이하 생략): 제가 디자인을 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에는 UX(User eXperience)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했습니다. 그때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언가를 예쁘게 만드는 것에 가까웠어요. 저도 인터페이스를 세련되게 디자인하는 등 시각적인 결과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디바이스와 서비스 환경이 바뀌면서 'UX', '사용성'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최근에는 서비스까지 만들어내는 디자이너를 아예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해요. 프로덕트 디자이너라 지칭되는 사람들은 과거 IT·테크 분야에서 디자이너라 불렸던 이들과 조금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드는 디자인이 사용자의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예측하죠. 기획 단계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매출에 도움을 줄 방법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디자이너의 역할이 확대된 셈이죠.

 

마이리얼트립에서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으로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2018년 오픈한 호텔 홈페이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현재 마이리얼트립에서는 호텔 상품을 부킹닷컴(Booking.com)이라는 회사와 연계해서 판매하는데요. 예전에는 클릭하면 마이리얼트립에서 부킹닷컴 홈페이지로 이동하는 링크만 있었어요.

 

그러다 '마이리얼트립에서 좀 더 구체적인 옵션을 미리 설정해서 부킹닷컴으로 보내면 사용자가 구매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가령, 오사카에 가고 싶어서 '오사카 호텔'이라고 검색했을 때 바로 부킹닷컴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고 인원, 기간 등 필수 옵션에 따른 검색값이 나오는 거죠.

마이리얼트립 숙소 검색 페이지 Before(위) After(아래) (이미지 제공: 배재민)

실제로 이 가설에 맞춰 디자인을 구현했는데, 예약 수와 매출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디자인을 바꾸었을 때, 비즈니스 임팩트가 발생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네요.


UI 디자인을 약간 변경해서 실제 매출이 상승한 것이군요.
맞습니다. 마이리얼트립의 2018년 하반기 주요 목표였던 크로스셀링(Cross-Selling)에도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다고 봐요. 현재 마이리얼트립은 여행에 관한 모든 상품을 팔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항공권이나 가이드 투어만 단일 상품으로 사면 매출 상승을 기대하기가 어렵죠.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마이리얼트립에서 항공권을 구매한 사람이 호텔도 예약하고, 가이드 투어와 입장권까지 연속적으로 구매하는 거예요. 이러한 크로스셀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전적으로 화면의 몫입니다. 사용자가 보는 핸드폰이나 모니터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상품을 살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거죠. 만약 사용자에게 연관 상품의 구매를 유도했다면, 디자인이 비즈니스에 임팩트를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크로스셀링을 촉진하는 방법
1. A 상품을 구매할 때 주로 어떤 상품을 함께 구매하는지 알아낸다.
2. A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B 상품을 구매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3. A 상품을 구매하는 프로세스에서 B 상품을 구매하도록 지속적으로 제안한다.

마이리얼트립의 그로스팀은 크로스셀링의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주도하고, 디자인팀은 구체적인 방법 설계에 집중한다. 그로스팀은 교차 구매 가능성이 있는 실험을 제안하고(1번), 경향성을 파악한다(2번). 이후 이를 가속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고, 결과를 보면서 다시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3번). 마지막으로 제안한 방법을 직접 디자인해 실험한다.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역량이 예전과 달라졌는데, 디자이너라면 어떤 측면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디자인이 비즈니스에 임팩트를 주려면 숫자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이건 디자인 영역 안에서 서체나 이미지 크기 등의 수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디자인하기 전후로
비즈니스상 어떤 수치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

변경한 디자인이 실제 매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디자인 변화였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건 마이리얼트립 같은 마켓플레이스, 커머스 서비스에 해당하는 부분이긴 해요. 디자인으로 매출을 개선하기보다 인터페이스 사용성을 높이는 게 우선인 서비스도 있으니까요.

 

디자이너가 숫자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저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어떤 숫자의 변화를 기대하는지 먼저 정의합니다. 그 숫자는 매출일 수도, 사용자일 수도, 특정 콘텐츠의 조회일 수도 있어요. 그게 해당 프로젝트의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핵심성과지표)가 됩니다.

 

물론, 정량적인 측정이 어려운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숫자의 변화 폭은 크지 않더라도 정성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도 있고요. 그럼에도 프로젝트 KPI를 명확하게 정의하면 '내가 한 일이 프로덕트에 객관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저는 진행한 프로젝트와 관계가 없어도 회사의 부문별 거래액과 매출을 매일 관찰합니다. 마이리얼트립에서는 회사 내 그로스팀*의 도움으로 부문별 일간 매출 데이터를 대시보드에서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 매출의 증감을 살펴보면 디자인이 숫자에 미치는 영향을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거든요. 디자이너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마케팅팀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고, 회사의 목표에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속한 마이리얼트립의 그로스팀은 각 팀이 필요한 데이터를 파악, 분석, 전달한다.

 

저도 디자인과 비즈니스를 밀접하게 연결해 작업하는 방식이 완전히 익숙하진 않아요. 조금씩 익숙해지는 중이죠. 정리하자면, 디자이너에게는 숫자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그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이리얼트립 디자인팀에서도 이를 준비하는 스터디를 진행하려고 해요.

 

디자이너는 어떻게 데이터를 스터디하나요? 접근 방식이 궁금합니다.
현재 디자인팀에서는 GA(Google Analytics, 이하 GA)*처럼 웹사이트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로스팀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데이터를 추출하고 활용하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요. 다만,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에게 마냥 분석을 맡겨놓기보다는 데이터를 직접 추출하고 해석하려는 노력도 어느 정도 하고 있어요. 요청한 데이터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데, 답을 찾기 위한 데이터를 다시 요청하고 받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한참 걸리기 때문이에요. 바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업무를 요청하지 않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죠.

* 구글에서 지원하는 웹사이트 데이터 통계 및 지표 분석 도구

 

마이리얼트립 디자이너들은 GA나 앱스플라이어(AppsFlyer)*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수준이더라도 쿼리(query)**를 통해 필요한 데이터를 직접 조회합니다. 그러면 데이터를 요청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크게 줄어드는 데다 궁금한 지점을 파고들 기회가 생기거든요. 문제를 더욱 정교화하고, 해결책의 퀄리티를 높이니 성과가 좋아지는 건 당연하겠죠.

* 모바일 앱의 데이터 통계 및 지표 분석 도구
** 정보 수집 요청을 이르는 컴퓨터 용어

구글 애널리틱스 사용 화면 ⓒFlickr
앱스플라이어 사용 화면 ⓒAppsFlyer

최근 몇 년간 많은 UX, 프로덕트 디자이너들이 코딩을 공부했습니다. 디자이너가 개발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면 이점이 많기 때문이죠. 일단 내가 만든 디자인을 개발자가 구현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할 때 편해요. 디자인 파일을 조금 더 개발하기 쉬운 포맷으로 리소스화해서 전달하는 등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요. 앞으로 디자이너와 데이터의 관계도 코딩처럼 되지 않을까요?

디자이너도 기획을 한다

지금까지 주로 디자이너 개인의 방향성을 이야기했는데요. 마이리얼트립의 디자인팀은 어떻게 일하고 있나요? 팀 내 디자이너들의 역할도 궁금합니다.

마이리얼트립 디자인팀은 애자일 프로세스(Agile Process)*로 움직입니다. 두 달마다 할 일을 크게 정하고, 다시 2주 단위로 쪼개서 서브 태스크(task)를 정합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팀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큰 줄기를 잡으면, 디자이너들이 하나씩 잘게 쪼개서 구체화하는 거죠. 사실상 디자이너가 기획자 역할까지 겸한다고 볼 수 있어요.

* 고객의 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그때그때 주어지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론

 

많은 회사가 여전히 기획자를 별도로 채용하는데요. 기획자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가능한가요?

조직 안에 기획자가 없는 건 맞아요. 다만, 디자이너가 기획자 역할을 전부 하는 건 아니에요.

모든 구성원이 기획자 역할을 하죠순서를 따지자면, 세부 태스크를 맡은 디자이너가 프로젝트의 목표를 정합니다. 해당 프로젝트의 가치와 대상 타깃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죠. 이를 바탕으로 와이어프레임(Wireframe), 즉 정보구조 설계 작업을 해요. 가령 A라는 상품의 구매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프로젝트라면, 구매율을 올리는 다양한 변수를 수집해서 나열한 후 인과관계를 갖춘 구조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이후 와이어프레임 리뷰를 합니다. 프로젝트에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설계된 구조와 수집된 정보들이 합리적인지, 구조적인 허점은 없는지 이야기하죠.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했을 때 UI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서 개발을 진행해요. 이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개발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의사결정권자까지 모두 리뷰에 참여하며 기획자 역할을 나눠서 하죠.

 

마이리얼트립의 디자이너들은 각자 고유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나요? 아니면 큰 틀에서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역할을 나누나요?

후자에 가깝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때에 따라 시간이 비는 사람들이 일을 맡아서 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를 저희도 인식하고 있어요.

 

크로스셀링 프로젝트를 맡은 디자이너가 다음에도 같은 프로젝트를 하면 더 잘할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스타트업 특성상 업무가 다양하고 산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정해진 한 가지 프로젝트만 밀고 나가는 게 쉽지 않아요. 조직의 규모가 커진다 해도 각 디자이너가 특정 프로젝트 혹은 고유 아이템만 맡도록 시스템을 짜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고요. 디자이너가 다양한 아이템과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면 더 좋은 기획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이자 기획자로서 마이리얼트립의 장점을 꼽는다면요?

앱스토어를 보면 여행 앱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 사이에서 마이리얼트립만의 강점을 가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럼에도 내부에서 노력하는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화면을 복잡하지 않게 구성하려 해요. 중요한 요소를 전면에 보여주고,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요소를 굳이 드러나지 않게 처리합니다.

 

커머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 많은 상품이 메인 화면에 노출돼 있어요. 어떻게든 사용자의 클릭을 유도하고, 다양한 상품을 더 눈에 띄게 하려는 시도들이 보이죠. 하지만 저희는 사용자가 원하는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끔 검색과 카테고리 요소를 강화했습니다. 가능한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보이지 않도록 했고요.

 

디자인팀의 결정을 두고 조직 내부에서는 수많은 토의를 거치며 조율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팀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 문제에서는 모든 팀이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마케팅팀은 조금 더 많은 상품과 광고를 노출하고 싶어 해요. 공급자가 그러기를 원할 때도 있고, 상품을 최대한 많이 노출해야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죠. 반면, 디자인팀은 사용자가 최소한의 방해만 받으면서 원하는 콘텐츠와 상품을 찾을 수 있게끔 디자인하려고 하고요.

 

많은 상품이 소비자와 맞닿길 원하는 마케터와 서비스 자체를 더 명확하고 덜 번거롭게 만들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의 입장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획하는 디자이너와 기획하는 마케터가 대립하는 상황이 가끔 나오는데, 아직까지는 잘 조율하면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인 시스템, 왜 구축해야 할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디자이너가 할 일이 많다고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상황을 감당하기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도 했나요?

저는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하자'라는 모토를 갖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회사와 개인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로서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디자인 시스템이었어요

디지털 디자인에서 디자인 시스템은 서비스를 만드는데 사용한 공통 컬러, 서체, 인터랙션, 각종 정책 및 규정에 관한 모든 컴포넌트를 정리해놓은 것을 뜻합니다.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없애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시스템이죠.*

* 대표적인 디자인 시스템으로는 구글의 머테리얼 디자인(MATERIAL DESIGN)이 있다.

 

제가 마이리얼트립에 합류하자마자 시작한 일도 디자인 시스템 구축이었어요. 서비스 전반에 공통으로 쓰이는 컬러와 각종 UI 컴포넌트가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페이지마다 형태나 색상이 조금씩 달랐고, 앱과 웹에서 쓰는 아이콘 모양이나 파일명도 약간씩 차이가 있었어요.

 

이럴 때는 어떤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프로젝트를 맡는지에 따라 결과물에 미묘한 차이가 생겨요. 불필요한 사후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할 수 있고, 정돈을 위한 추가 작업이 생기기도 하죠. 처음부터 이런 작은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해야 전체적으로 디자인에 일관성이 잡히고, 비효율적으로 디자인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습니다.

디자인 작업을 위한 공통 요소들을 정리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쓸 수 있게 해 두었다. (이미지 제공: 배재민)

예를 들어 UI 버튼을 만들 때, 저희는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에 박스 툴을 열고 텍스트를 입력하지 않아요. 먼저 만들어 놓은 공통 버튼을 사용하는 식으로 빠르게 작업하죠. 최근에는 스케치 앱(Sketch App)의 심볼, 라이브러리 기능으로 디자인 시스템을 예전보다 쉽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통으로 쓸 수 있는 UI 컴포넌트를 만들고, 이를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컬러 역시 컬러 팔레트를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서 모든 디자이너가 등록만 해두면 바로 쓸 수 있게끔 했어요.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필요할 때마다 드롭박스에 올려둔 컬러 팔레트 파일을 프로그램에서 불러와 사용하는 거죠. 이로써 모두가 같은 컬러값으로 작업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이리얼트립에서 사용하는 컬러 팔레트 (이미지 제공: 배재민)

이렇게 시스템을 구축한 후 디자인하면, 동일한 컬러와 UI 요소를 공유한 상태에서 모든 화면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개별 디자이너에게 수정 사항 반영을 맡긴다면 서로 싱크가 맞지 않는 일이 분명 발생하겠죠. 기계가 아닌 사람이 싱크를 맞추기에 휴먼 에러, 커뮤니케이션 에러가 나타나요. 그럼 또다시 싱크를 맞추기 위해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런 불필요한 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디자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작업해두면 개발자들도 좋아해요. "예전에 받은 이 아이콘과 지금 받은 이 아이콘은 모양이 같은데 왜 파일 이름이 다른가요?", "예전에 시안 작업할 때 보내준 버튼 파일과 현재 프로토타입에 적용된 버튼 파일의 크기는 왜 다른가요?" 등 불필요한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수많은 단순 디자인 작업을 자동화, 효율화했을 때 최대 장점은 무엇일까요?

일단 반복적인 작업을 없앴다는 것 자체도 좋지만, 더욱 좋은 점은 디자이너 스스로 깊이 생각할 시간이 생긴다는 겁니다. 스타트업에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기 위해 깊이 생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여기에 리소스를 최대한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필요한 단순 작업을 반복하면서 디자이너 스스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효율성은 물론이고 팀원들의 사기와 크리에이티브까지 모두 떨어져요. 그런 상황을 줄여주는 대신 디자인이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 실제 기능하는 숫자와 매출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해 볼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거죠.

 

마이리얼트립에서는 디자인 시스템을 어디까지 적용하나요? 또,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초기에 상당한 공수가 들어가는데요. 구체적인 진행 방법이 궁금합니다.

디자인 시스템의 구성 요소는 회사마다 달라요. 저희는 컬러, 아이콘, 그리드, 레이아웃, UI 컴포넌트에 관한 시스템만 만들었어요. 각 조직이 가진 리소스를 고려해 필요한 요소부터 정의하는 게 비용 면에서 효율적입니다. 구글(Google), 애플(Apple), 에어비앤비(Airbnb), 스포티파이(Spotify) 등 해외 유명 서비스에서는 훨씬 더 다양하고 깊게 정의해요.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면 좋다는 사실은 모든 디자이너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눈앞에 닥치는 대로 쌓아 올린 히스토리가 넘치는 시점에서 이를 새롭게 정리하기란 쉽지 않죠. 실제로도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고요. 스타트업의 하루하루는 항상 바쁜데, 주요 업무 진행과 별개로 시간을 할애하여 디자인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회사에 어떻게 설득할지도 고민했어요.

 

구글에서는 직원들이 업무 시간의 20%를 사이드 프로젝트에 쓸 수 있도록 장려한 적이 있었는데요. 마침 마이리얼트립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매주 정해진 시각에 1시간씩 미팅을 했어요. 미팅 전까지 각자 할당받은 업무를 조금씩 해왔고요. 예를 들어 A 디자이너가 버튼 1번, 2번만 만들어 오겠다고 하면, B 디자이너는 슬라이더를 만들어 오겠다는 식으로 일을 잘게 쪼갠 겁니다.

각자 할 일을 만들고
매주 미팅에서 점검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식으로 작업한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프로젝트가 완성됩니다. 저희도 디자인 시스템의 기본적인 초안을 완성하기까지 두 달 정도 걸렸습니다.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고요. 회사에 따라서는 구축한 디자인 시스템을 개발자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마이리얼트립에서는 기존 방식을 대체하는 시스템 개편이 개발자가 일할 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배재민 디자이너가 말하는,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기회'

리디와 마이리얼트립, 두 번의 스타트업 경험과 전반적인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스타트업에서는 어떤 직군을 맡더라도 일당백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리소스가 매우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보통 초반에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하다가 회사가 성장하면서 그 역할을 조금씩 나눠 갖죠.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UX 리서처였다가 때로는 UI 디자이너가 됩니다. 능력이 받쳐준다면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할 때도 있어요.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는 건 역량 면이나 심정적인 면에서 힘든 일입니다. 각각의 역할 안에서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게 어려울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처음 스타트업에 합류한 디자이너가 당황하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함께하는 팀원들은 디자이너가 잘 적응해주기를 기대할 거예요.

 

저는 저 자신을 역할에 맞게 재정의하려고 노력합니다. 프론트엔드 개발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난 디자이너지만 지금은 예외적으로 코딩을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나는 지금 프론트엔드 개발자다!'라고 자기 암시를 걸어요. 이렇게 매번 마인드를 새롭게 세팅하니 조금 더 나은 퍼포먼스가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길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역할을 거리낌 없이 맡을 수 있고
그걸 잘 해내고 싶고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스타트업에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회사의 성장에 발맞춰 자기 자신도 폭발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랬다고 생각하고요.

마이리얼트립 배재민 디자이너 ⓒ배재민

꽤 오랜 기간 스타트업에서 일해본 입장에서 봤을 때,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충분히 많은 기회가 보장되나요?

회사나 팀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스타트업 씬 전체를 묶어서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스타트업 씬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점점 커지는 건 확실합니다.

 

IT 분야, 특히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가 그래픽 디자인만 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디자이너가 개발부터 기획자, 프론트엔드 개발자 역할까지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지 꽤 됐어요. 이 흐름에 따라 디자인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더 커질 겁니다. 팀 내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권한도 더 많이 주어질 거예요.


지금은 누구나 한 번쯤 창업을 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회사에서 정년을 보장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잖아요. 이직은 더 흔해졌고요. 이런 면에서 보면 디자이너가 기존의 역할에 속박되기보다 기획, 개발, 데이터, 나아가 비즈니스를 이해하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봐요.

 

디자인으로 비즈니스에 영향을 주는 경험은 사업가로서 수업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강점이 있어요. 훗날 창업을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요.

저는 디자이너로서 하는 일도 즐겁지만,
매출과 숫자로 비즈니스 임팩트를
만들어 낼 때 성장한다고 느껴요

정리하자면, 디자이너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힘을 기를 수 있는 곳이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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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민 디자이너가 리디를 떠날 때, 다음 행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다시 스타트업을 선택했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현재 직면한 각종 디자인 이슈, 마이리얼트립의 디자인팀과 디자인 시스템, 비즈니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택지 등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비즈니스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디자이너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디자이너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