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독서로 인해 길을 잃지 않는다 해도, 독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서지 작업이 그러한 경우다. 한 주제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찾아보기, 그 출처로 거슬러 오르기, 어떤 이론의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그것들 사이의 관계 밝히기, 참고 서적의 목록을 쌓아올리기……. 이런 일들이 바로, 무슨 자격 취득 따위에 응모하는 자들이 채우려 하는 다나이드의 밑 빠진 독이다.
-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민음사, 2001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일상적인 삶>에서 독서와 서지 작업에 대해 '다나이드의 밑 빠진 독'이라고 정의했습니다.
*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 파리대학교에서 미학을 가르쳤다. 알제리에서 젊은 알베르 카뮈를 만나 스승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섬>(민음사), <어느 개의 죽음>(민음사), <카뮈를 추억하며>(민음사) 등의 작품이 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우스 왕의 딸들을 말합니다. 모두 쉰 명이나 되죠. 자신이 사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신탁을 받은 다나우스는 혼례를 치른 딸들에게 첫날밤을 보낸 후 남편을 죽이라 명합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마흔아홉 명의 딸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실행에 옮깁니다. 남편을 살해한 그녀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채우는 형벌을 받습니다.
오귀스트 로댕은 하얀 대리석에 자신의 제자이자 연인인 카미유 클로델을 모델로 다나이드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끝없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다나이드의 모습이 애절하지만, 죄를 지었으니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겠죠.
장 그르니에는 책을 가까이하는 자들의 속성을 꿰뚫고 그들을 '다나이드의 밑 빠진 독'에 비유했습니다. '무슨 자격 취득 따위에 응모하는 자들'이 아니더라도 책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책을 산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지 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