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플레이어(Player)

당신은 남의 조종을 받는 체스판의 말이 아니다. 직접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다. 직장생활이라는 파워 게임에서 자신의 파이를 키워가는 우리 역시 모두 플레이어다.

 

※ [팀장의 파워 게임] 시리즈의 콘텐츠입니다. ※

 

저자 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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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란 오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관계를 벗어나면 힘이 세고 약하다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요컨대 힘이란 관계의 당사자가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인 셈이다. 그래서 힘 자체로만 놓고 보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행사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 권력의 원리*

 

* 〈권력의 원리(Power, For All)〉, 줄리 바틸라나·티치아나 카시아로, 최윤영, 로크미디어, 2021

'이번 달쯤이었던 거 같은데…'

민지는 '읽지 않음' 표시가 쌓여 있는 메일함에서 어느 한 메일을 찾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팸 메일함도 뒤졌다. 십여분쯤 흘렀을까. 

'찾았다!' 

'자랑스러운 00인의 밤 안내'라는 제목의 메일이었다.

 

민지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들을 초대해 성공한 동문들의 강의를 듣고 상을 수여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는 전직 장관과 CEO, 법조인 등이 있었고, '○○ 라인'이라고 하면 정부 구성 때마다 TV에서도 언급될 만큼 영향력이 막강했다. 메일은 이 행사에 대한 안내장이자 추천서였다. 

 

민지는 메일을 클릭했다. 그리고는 마음 먹은대로 길고 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인, 로슬린 코스메틱 나춘석 실장을 추천합니다.'

민지와 나춘석 실장은 ○○고등학교 동문이었다. 이 사실은 예전의 민지에게라면 듣고 흘리고 말 그런 '정보(information)'에 불과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지는 아니었다. 그녀는 변했다. 나춘석 실장과 학맥으로 연결되었다는 정보는 잊고 버릴 팩트가 아니었다. 게다가 민지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호랑이들 틈에서 맨 몸으로 싸우는 중이 아니었던가. 그 중에서 왕격인 큰 호랑이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도망가지 않고 싸우기 위해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민지였다. 그러다 하늘도 올려다봤다. 그랬더니 왠걸, 머리 위에 굵고 탄탄한 동아'줄'(학맥)이 있었던 거다. 

'내가 이 줄을 잡아당겨도 될까?'

처음에는 고민했다. 톡톡 건드려도 봤다. 단단해 보였지만 다른 무기만 찾는다면 굳이 잡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소분팀 점심 회식 날이었다. 자리를 파하고 회사로 돌아가려는데 식당 창가 자리에 햄버거와 감자튀김 하나를 시켜 두고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나 실장이 보였다. 

앗, 저거 실장님 아니에요?

한영수가 나 실장에게 달려가 아는 척을 하려 했다. 민지는 재빠르게 그를 가로막았다. 민지는 나 실장의 뒷 모습을, 쓸쓸하게 굽은 등을 존중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팀장이 되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고충이 생겼다. 바로 팀원들과의 점심. 민지는 점심만큼은 편히 먹고 싶었던 자신의 팀원 시절을 떠올리며 약속이 있는 척 회사를 빠져나와 자주 혼밥을 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월급만 올라가는 줄 아니? 외로움도 올라가!"하며 맥주 한 잔을 벌컥 마시던 방 팀장도 생각이 났다. 그래서 민지는 나 실장의 그 등을 모른 척하려 했다. 동질감이었다. 

 

그 때부터였다. 그 날을 계기로 나 실장을 향한 일종의 어려움과 거리감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민지는 그에게 지금보다 한 발 더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얼마 전 팀장 모임에서 만난 서 팀장이 그랬다. 요즘 나 실장의 최고 관심이 '유명세'라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