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마케터의 일

Editor's comment
이 글은 소속 회사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닌 저자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SK-II의 마케터로 일하는 첫 2년 반 동안, 저는 모든 마켓에서 동시에 론칭되는 브랜드 캠페인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미국, 중국, 일본, 홍콩,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 등 약 10개 국가에서 브랜드가 마주한 과제를 파악하고, 프로젝트 리더로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캠페인을 기획했습니다. 캠페인 기획은 주로 50개가 넘는 모든 매체에서 방영될 콘텐츠 (디지털 비디오, TV 광고, SNS 광고물) 제작 뿐만 아니라 미디어 및 홍보 전략 기획을 포함합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과 4명의 셀럽이 진행한 캠페인부터 상해 인민 광장의 결혼 시장을 주제로, 중국 사회의 결혼 스트레스에 관해 이야기한 'Marriage Market Takeover', 매그넘 포토하우스(Magnum Photo House)와 6명의 글로벌 셀럽이 진행한 '#민낯 프로젝트, #BareSkinProject'* 등 브랜드의 글로벌 캠페인을 담당했습니다.

* 관련 기사: 톱 셀럽들의 '민낯'이 주목 받는 진짜 이유 (허핑턴포스트, 2018.6.8)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함께한  <Face the Wild, Face the Camera> 캠페인 ⓒSK-II세상에 나와 소비자를 만나는 콘텐츠의 이면에는 소비자를 이해하고 비즈니스 이슈를 분석하는 무수히 많은 작업이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왔던 수십 가지의 아이디어와 촬영 후 사용하지 않는 수많은 버전의 편집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밤새워 고민한 미디어 홍보 전략이 있고, 이를 10개 마켓에 동시에 집행하기 위해 손발을 맞춘 에이전시와 임원진들이 있고, 그들과 했던 수없이 많은 컨퍼런스 콜이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리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코드와 여러 가지 목적, 서로 다른 배경지식을 지닌 이들과 일해야 합니다. SK-II에서 일할 때는 함께 일하는 광고 에이전시와 6명의 마케팅 임원진 모두 국적이 달랐습니다. 회사 내 관련 부서 사람들도 국적과 배경이 제각각이었어요. 이렇다보니 일하면서 가지각색의 영어 악센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어요.

 

다양한 사람과 일하는 만큼 일은 광범위하고 복잡합니다. 광고 기획 에이전시와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임원진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홍보, 법무, 규제팀과 협력하고 외부적으로는 미디어 및 광고 기획, 홍보 에이전시와 긴밀하게 일해야 하죠.

 

앞서 언급한 'Marriage Market Takeover'*는 제가 싱가포르에서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입니다. SK-II가 처음으로 스웨덴 광고 에이전시, 덴마크 미디어 에이전시와 중국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만드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전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였어요.

* 관련 기사: Emotional advert about China's 'leftover women' goes viral (BBC, 2016.4.8)

 

* 글로벌팀에서 진행했던 첫 프로젝트, SK-II: Marriage Market Takeover ⓒSK-II

 

내부적으로는 중국 법무팀과 홍보팀, 마케팅팀을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소비자와 미디어의 반응을 예상해 대응 방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TV는 물론, 유튜브나 유쿠(Youku)* 등의 비디오 사이트, 그리고 SNS에 이르는 모든 미디어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캠페인을 기획했습니다. 계획된 시간에 모든 국가에서 동일하게 캠페인이 출시될 수 있도록 밤낮없이 각국의 마케팅팀, 그리고 에이전시와 이를 조율했습니다.

* 중국의 동영상 공유 서비스

사공 많은 함선에서 살아남는 '소프트 스킬'

이런 업무의 속성상, SK-II 글로벌팀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것은 거대 함선에서 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커다란 함선에는 사공도 많고 선장도 하나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선장과 사공이 많은 함선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죠.

 

지시에 맞게 손발을 움직여 집행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부족한데, 저는 상대적으로 업무 경력이 짧고 언어 장벽도 있었기에 더 위축되는 느낌이었습니다. 1등 조타수가 되는 일조차 버거웠어요. 하지만 스스로 하고 싶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선장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제가 일했던 회사의 인사 제도입니다.

 

'조타수가 되는 것'과 '선장이 되는 것'의 차이는 이러한 조직 구조를 이해하고, 이런 구조 속에서 '일 잘하는 방식'을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분석력이나 전략적 사고 등의 경험과 지식에서 얻어지는 하드 스킬은 기본입니다. 태도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대표되는 소프트 스킬, 즉 복잡한 조직 구조 안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는지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저는, 조직에서 요구하는 소프트 스킬을 쌓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중에서도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외국어는 외국어답게 사용하자

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상대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규모도 작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죠. 더군다나 제가 일했던 SK-II 한국팀은 서로 굉장히 친밀했습니다. 함께 일하며 반대 의견이 생길 때도 이를 조율하고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싱가포르는 조직의 규모가 훨씬 크고 복잡합니다. 같은 국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서로를 이해시키는 일이 큰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영어가 편한 상태도 아니었고, 교환 학생 경험조차 없었어요. 외국인과 어떤 방식의 교류 경험도 없었던 제게는 정말 난제였죠.

 

처음에는 많은 시간을 기울여서 영어 실력 자체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영어가 능숙한 동료들은 어떻게 말해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고 효과적이어서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의 표현을 그대로 따라 했어요. 그들의 표현 방법을 기억했다가 실제 미팅에 적용하는 데 제 노력의 99%를 기울였죠. 이 시기에는 스스로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늘었다'며 뿌듯해했습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인 후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제 발목을 잡았어요. 특히 저를 가장 괴롭힌 것은 광고 에이전시의 기획안에 대해 피드백하는 미팅이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 미팅이었는데 수요일마다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어요.

 

일단 미팅이 주로 컨퍼런스 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표 내용 자체를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에이전시가 1시간 남짓 기획안을 설명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제 생각을 전달해야 합니다. 항상 빠듯한 타임라인으로 일하기 때문에 실수 없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했어요.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부담감도 컸습니다. 광고 기획에 대한 피드백이라 일상적인 비즈니스 대화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해야 했거든요. 예를 들어 '인위적이다, 개연성이 없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다' 같은 표현이죠.

 

무엇보다 이런 미팅은 사전에 준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매번 마케팅 디렉터 이상의 임원진이 참석하는 데다, 논의 순서상 저 같은 실무진이 먼저 의견을 펼쳐야 하니 엄청난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민범. 매번 너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 잘 정리해서 누구나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봐.

미팅이 끝난 어느 날, 마케팅 디렉터가 제게 했던 말이었어요. 사실 피드백의 내용보다 당시 느꼈던 창피함과 당황스러움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입사 1년 차 때 받을 법한 피드백을 4년 차에 받게 되었으니, 쥐구멍에 숨고 싶었어요.

 

게다가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할 때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건가? 어떻게 더 영어를 잘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 서 있던 제게 디렉터는 예상치 못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는 이 프레임으로 이야기해봐. 우선 '아이디어가 좋은지, 싫은지'부터 시작해. 그다음에 개선하거나 보완할 부분이 무엇인지 구체화해봐. 다만, 최대 3가지 포인트만 이야기하는 거야.

돌이켜보면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 자체를 잊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 전달이지,
'원어민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데 말이죠

미팅에서 저는 표현을 찾는데 많은 고민을 쏟았어요. 예를 들어 simple과 succinct 사이에서 어떤 단어를 쓸지 고심했죠. 상대방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기보다 어떤 단어나 표현을 쓸지 고르는 데 더 집중했어요. 원어민이 아니라는 자격지심에 '소통과 명확한 의사 전달'이 아닌 '보여지는 모습'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후에는 아예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멋있고 유창하게,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말하기를 포기하고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많이 쓰고, 쉬운 단어들을 주로 사용하며, 디렉터의 조언대로 '좋다 혹은 싫다, 예 혹은 아니오'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Priscilla Du Preez ⓒUnsplash결론적으로는 이 방법이 훨씬 잘 통했습니다. 영어가 제 모국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듣는 사람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오히려 의사전달이 명확하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싱가포르처럼 다인종, 다민족 환경에서 일할 때는 어차피 모두가 고유의 악센트를 사용합니다.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콤플렉스가 될 필요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소통의 수단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이 제 기능을 하도록 본인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 맑고 투명한 피부보다 '두꺼운 피부'

처음 싱가포르에 와서 당시 마케팅 디렉터에게 업무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어요.

여기서는 얼굴이 좀 두꺼워야 해(You have to have thick skin).

당시에는 웃고 넘어갔는데, 지금까지 들었던 조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이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이해관계와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하는 결정'이 많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본인이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뚝심 있게 해내야 합니다

한국은 싱가포르보다 훨씬 소규모의 팀이었고, 비슷한 생각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제 계획이나 생각이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공유하는 가치가 비슷하기 때문에 '왜'를 설명하는 일이 적었다고 할까요?

 

다양한 관점 사이에서 일해야 하는 싱가포르에서는 자신을 의심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 그만큼 자신감을 잃기도 쉽습니다. 본인의 생각을 뚜렷하게 혹은 강하게 표현하는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일하면서 제가 늘 '목소리 없는 사람'이 된 이유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메일이 있어요. 북유럽에 위치한 광고 기획 에이전시와 처음으로 일할 때였는데요. 마케팅 캠페인 방향을 아예 바꾸자는 중요한 피드백을 정리해서 수정 요청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에이전시에서 온 답장의 첫 문장은 이랬습니다.

네가 준 피드백에 강력하게 반대해(I strongly disagree with your feedback).

이메일을 받고 기분이 몹시 상했어요. 고생해서 일한 에이전시 파트너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안되는 영어로) 몇 번이나 고쳐서 보낸 피드백이었는데, 상대방은 그런 노력을 단 1분도 기울이지 않은 느낌이었죠.

 

저는 프로젝트 리드로서 캠페인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전화를 걸어 왜 우리에게 이 변화가 필요한지 2시간 넘게 설명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에이전시는 저를 포함해 임원진과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고수했어요. 저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뚝심 있게 추진한 결과, 캠페인 방향을 시의적절하게 바꾸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할 때만이 아닙니다. 일을 마친 후에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본인이 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합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습관 때문에 피드백 세션에서 밤을 새워 한 일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적이 있어요. 제가 해낸 일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죠. 이런 경우에는 함께 고생한 팀의 노력까지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이 부분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 매주 금요일 30분씩 제가 했던 일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정리한 내용은 격주로 있는 매니저와의 일대일 미팅에 가져가요. 짧은 미팅 동안 비즈니스와 관련된 논의뿐만 아니라, 팀과 해낸 일을 이해시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4년 반이나' 다닌 회사를 떠나다

많이 고민하고 바랐던 일이었던 만큼 싱가포르에서 1년 반 동안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충분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원하던 브랜드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해볼 수 있었고, 항상 새로운 시도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1년 반이 지나자 공허함을 느꼈고, 처음의 열정도 잃은 듯했습니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까지는 '글로벌 캠페인을 만들겠다'는 커리어 목표가 명백했어요. 원했던 경험을 하고 나자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시간이 약 1년간 이어졌습니다.

 

저는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장점은 유지하되, 거대 매트릭스 조직에서 오는 업무상의 아쉬움을 해소하고 싶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사는 삶, 즉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고 기회와 새로움이 끊이지 않는 업무 환경은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SK-II 글로벌 헤드쿼터에서 담당했던 캠페인 기획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전반을 들여다보고 전략을 세우는 일을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SK-II 안에서 비즈니스와 밀접하게 일할 수 있는 ASEAN팀으로 옮겨 짧게나마 새로운 일을 시도했지만, 조직 구조상 여전히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힘들었어요. 결론적으로 '이직'이라는 옵션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직을 결심한 뒤에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마케터로 일하면서 제가 담당한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나'라는 브랜드가 구직 시장에서 어떤 리소스로 비추어지는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또 어떤 채널을 통해 나를 알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거죠.

 

당시 오랜 장거리 연애 후 남편과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주로 싱가포르에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며, 스스로 원하는 일의 객관적, 주관적 속성을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 다음 3가지 항목이 나왔습니다.

  • 싱가포르의 근무 문화와 잠재적 기회를 보장할 수 있는 조직
  • 소비자 캠페인 기획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전략과 분석이 가능한 포지션
  • 마케팅 혹은 그 연장선의 직무이지만, 의사 결정 권한이 더 큰 업무

정리한 속성을 바탕으로 이전 회사의 아쉬운 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직을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포지션에는 직접 지원하기도 했고, 헤드헌터나 각 회사의 리크루터에게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근무 중인 아시아태평양 존슨앤존슨, 아큐브 마케팅 매니저의 경우는 인터뷰와 연봉 협상 등의 모든 채용 프로세스를 헤드헌터를 통해 진행했습니다.

 

저는 연봉 등 객관적인 조건뿐 아니라 담당할 일과 조직 문화,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가 분명했기 때문에, 인터뷰 전에 미리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인터뷰어와 길게 대화했어요. 팀이 어떻게 일을 나누어 하는지, 의사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인터뷰 과정을 통해 알아갔습니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거치고, 연봉 협상과 워킹 비자인 EP(Employment Pass)를 받는 과정이 1~2달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이직을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이직한 후에도 그 요인들 덕분에 저도, 조직도 만족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직을 준비하며 만난 싱가포르 헤드헌터들은 제가 한 회사를 '4년 반씩이나' 다녔다며 놀라워했는데요.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노동 시장이 굉장히 유연한 국가입니다. 이직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도 없죠. 연봉이나 기업 문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온라인을 통해서도 관련 정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업계 연봉 정보가 해마다 업데이트되는 리크루팅 회사의 홈페이지

 

제가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도 '커리어 플래닝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부분을 확실히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회사 홈페이지에 이직과 입사 제안을 수락 혹은 거절하는 팁이 나와 있어요. 반면 근속 연수가 길지 않습니다. 4년 반씩이나 한 회사에 다녔다고 놀라는 이유죠.

 

누군가는 고용 안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편한 문화나 관습으로 느낄 수도 있죠. 하지만 노동 시장이 유연한 만큼 일하는 동안 회사와 나의 관계가 철저히 계약 관계로 규정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채 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구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본인의 커리어를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며 오너십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능동적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동 시장의 구조는 업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이 부분은 싱가포르에서의 일상을 다루는 챕터 10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