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와 노가리의 상징, 서울 원조 호프집
'매일 아침 가게 앞 골목을 쓴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10시에 닫는다, 사람이 인정해줄 때까지 매일 가게에서 담요 깔고 자면서 일한다, 생맥주의 온도는 여름 2도, 겨울 4도다…'
매일 일정한 루틴으로 가게를 돌보며 생맥주를 따르고 노가리를 구웠다. 남보다 먼저 자신만의 메뉴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이 노가리였다. 소소한 안줏거리이지만, 이 집의 노가리가 지금 서울에 급속도로 번진 노가리 호프의 어떤 원조 격이 되었다.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가게에서 이룬 성공의 내막은 어쩌면 경건하게 삶을 살아갔던 한 실향민의 수도자 같은 태도가 핵심이었다. 구순(九旬)의 노익장 강효근 선생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아침 10시에 열고 밤 10시에 닫는 걸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게 우리 가게였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심장이 두근거린다.
'을지로 야장'의 역사적 거점
을지로3가역 4번 출구. 어둠이 내리기도 전, 퇴근 시간 무렵이면 여러 무리의 '와이샤쓰' 부대들이 이동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어떤 거대한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야장'이다.
야장이란 밤 야(夜)에 마당이라는 뜻의 장(場)이 합쳐진 말이라고들 한다. 문자 그대로 밤에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소재가 바로 맥주 아닌가.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빗대어 '을지로 페스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을지로는 여러분도 서울에 산다면 한 번쯤 친구의 손에 끌려가보았을 이른바 명물 거리이고 골목이다. 본디 인쇄골목과 조명 설비, 위생 설비 가게와 철공소가 즐비한 곳이었다. 또 사이사이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퇴근 후 한잔을 원했고, 그 수요에 맞춰 야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생맥주와 노가리의 상징, 서울 원조 호프집
'매일 아침 가게 앞 골목을 쓴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10시에 닫는다, 사람이 인정해줄 때까지 매일 가게에서 담요 깔고 자면서 일한다, 생맥주의 온도는 여름 2도, 겨울 4도다…'
매일 일정한 루틴으로 가게를 돌보며 생맥주를 따르고 노가리를 구웠다. 남보다 먼저 자신만의 메뉴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이 노가리였다. 소소한 안줏거리이지만, 이 집의 노가리가 지금 서울에 급속도로 번진 노가리 호프의 어떤 원조 격이 되었다.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가게에서 이룬 성공의 내막은 어쩌면 경건하게 삶을 살아갔던 한 실향민의 수도자 같은 태도가 핵심이었다. 구순(九旬)의 노익장 강효근 선생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아침 10시에 열고 밤 10시에 닫는 걸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게 우리 가게였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심장이 두근거린다.
'을지로 야장'의 역사적 거점
을지로3가역 4번 출구. 어둠이 내리기도 전, 퇴근 시간 무렵이면 여러 무리의 '와이샤쓰' 부대들이 이동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어떤 거대한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야장'이다.
야장이란 밤 야(夜)에 마당이라는 뜻의 장(場)이 합쳐진 말이라고들 한다. 문자 그대로 밤에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소재가 바로 맥주 아닌가.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빗대어 '을지로 페스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을지로는 여러분도 서울에 산다면 한 번쯤 친구의 손에 끌려가보았을 이른바 명물 거리이고 골목이다. 본디 인쇄골목과 조명 설비, 위생 설비 가게와 철공소가 즐비한 곳이었다. 또 사이사이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퇴근 후 한잔을 원했고, 그 수요에 맞춰 야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단돈 천 원짜리(근 10년 넘게 안 오른) 노가리에 막 뽑은 싱싱한 생맥주를 싼값에 마실 수 있는 을지로 야장은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특히 밤이 깊으면 야장에서 내뿜는 열기와 노란 불빛, 술꾼들의 소음으로 환상적인 무대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본디 호모사피엔스가 놀기 좋아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외국인에게도 환상적인 곳이라는 평을 듣는 이 을지로의 밤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 밤의 열기를 일단 무시하고, 대낮에 골목을 찾는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이 집이 바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시작인 을지오비베어입니다.
을지로 야장의 역사적 거점이다. 현재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창업주의 사위 최주영 씨의 설명이다. 본디 모든 역사는 미미한 데서 시작하는 법이라는 걸 깨우쳐주는 작고 소박한 가게다. 이젠 찾아보기 힘든 바닥재인 일명 '도끼다시'가 깔려 있고, 청결하면서도 세월의 묵직한 공기가 가게에 서려 있다.
가게 내부라고 해봐야 대여섯 평 남짓, 4인용 테이블 네 개를 채 놓지 못할 공간이다. 그 바람에 탁자 대신 나무 바로 구성되어 있다. 벽돌을 얹어 튼튼하게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두꺼운 나무를 깔았다. 이 자리를 거쳐간 이, 수십만 명에 이를 것 같다.
반질반질한 탁자에 역사가 깃들었다. 자리가 얼마나 좁은지, 가게 벽을 따라 기역자로 꺾어 붙인 바는 폭이 아주 좁다. 겨울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다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서 더 좁아지니까. 취했다가는 유리로 된 맥주잔을 떨어뜨리기 딱 좋다.
우리 집은 점잖은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만 자리가 비좁고 해서 늘 송구한 마음이지요.
구순의 노익장, 악착같이 살아남은 삶
나는 이 가게 창업주와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연로하여 은퇴한 후 신월동 자택에서 아내와 여생을 즐기고 계신다. 올해* 연세 무려 아흔. 과연 나오실 수 있을까. 어렵게 청을 넣었다.
* 책이 나온 2018년 기준
낮 2시. 이미 오비베어는 혼자 온 낮술 손님이 두엇 앉아 있다. 밖에서 택시가 도착한다. 창업주이신 강효근 선생이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거동하신 것이다. 나는, 솔직히 미리 마신 두어 잔의 맥주에 혈관이 뜨거워져 있었는데, 그의 등장에 눈시울까지 뜨겁고 묵직해졌다. 아아, 한 시대를 살아낸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 그는 그런 낯빛으로 차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내 팔을 붙드는 그의 악력이 단단했다. 기억력은 더 또렷했고, 밝았다. 우리는 가게를 물려받은 따님(호신 씨)이 따라주는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수인사를 나눴다. 조금 후의 일이지만, 그는 인터뷰를 하다가 상기되었는지 담배도 두어 대 청해서 피우셨다. 그야말로 노익장이었다.
그의 오랜 술회를 듣던 따님이 간혹 눈물을 닦아냈다. 모든 딸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것, "아버지" 하고 부르는 따님의 말투에는 정이 담뿍 배어 있었다. 그렇게 인터뷰는 따뜻한 여정을 시작했다.
강효근 선생은 황해도 송화군 태생이다. 지도를 보면 연평도・백령도가 있는 옹진에서 얼마 멀지 않은, 바닷가 면이다. 한국전쟁으로 흔한 피란민이 되었다. '1・4후퇴'였다. 1951년 '중공군'에 밀려서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수많은 피란민이 이북을 탈출하게 된 사건이었다.
형님과 딱 둘만 내려온 길이었다. 그때 다들 그랬듯이, 몇 달 전화(戰禍)를 피하면 다시 고향에 가서 살 줄 알았던 것이 이미 66년이 되었다. "백령도로 갔다가 엘에스티(미군 상륙선)를 타고 인천으로 왔지. 살아온 게 신기해. 그러다가 동두천으로 갔어." 그는 동두천의 미군 부대에서 유엔경찰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일했다. 일종의 한국인 군속이었다.
일가붙이 없는 남쪽에서 그는 대개 피란민들이 그랬듯이 생존 게임에 내몰렸다. 디아스포라, 고향 잃은 이들의 운명이었다. 그의 그런 악착스러운 생활력이 후에 을지오비베어의 오늘을 만들어낸다.
여담인데, 이 집은 몇 가지 '전설'이 있다. 노가리를 처음으로 이 골목에서 판 것, 당시 오비맥주에서 공급한 1천 시시짜리 잔*이 여럿 보관되어 있는 것, 30년 넘은 단골이 수두룩한 것, 낮 12시가 넘으면 손님이 찾아오는,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빨리 문을 여는 생맥주 전문점이라는 것… 끝도 없다. 역사는 본디 전설을 만드는 것이니까. 아니, 전설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니까.
* 지금은 손님에게 제공되지 않는 기념품이다.
내가 저 디스펜사를 놓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다가 탈장 수술을 하고, 자연스레 딸아이에게 물려주게 된 거지.
그는 여든일곱 살까지 이 가게에서 맥주 따르는 '디스펜사'(디스펜서)를 잡았다. 놀라운 일이다. 그가 은퇴한 뒤에는 아내 함한명 씨가 2년을 더 잡았다. 그리고 2015년 10월 6일, 그 세대는 완전히 물러났다. 이것이 을지오비베어의 역사다.
예술적 디스펜싱으로 만들어낸 생맥주의 맛
강 선생은 맥주 공급기를 '디스펜사'라고 불렀다. 생맥주를 연결하여 맥주를 공급해주는 손잡이 장치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이 집의 역사를 이어온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맥주 공급 장치야 뭐 전화만 하면 맥주 도매상에서 설치해주고, 맥주를 따라 내면 장사를 하는 것이니 대단한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강 선생의 팔뚝과 손에서 알 수 있다. 연로하시어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과거 은퇴 전에 그의 맥주 디스펜싱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고 단골들은 말한다. 한 손님의 증언.
주문이 밀려들어도 전혀 내색이 없으셨어요. 잔을 기울이고, 디스펜서를 당기고, 차아악 밑술이 깔리고 거품을 얹어내는데, 그게 이른바 일관작업이에요. 정확해요. 생활의 달인 같은 건데 뭐랄까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술, 그거 말고 달리 설명할 말이 없네요.
이제 따님 호신 씨가 전수받아 따르는 맥주를 마실 수 있다. 그이도 '수제자'답게 완벽한 디스펜싱을 한다. 따를 때 엄격한 표정까지 닮았다. 이 집 맥주 맛은 어떤지 내가 말로 설명해야 할 차례다. 독자들의 목이 마를 테니.
우선 부드럽다. 목을 치는 탄산의 힘이 지나치지 않다. 맥주계의 사찰음식 같다. 자극이 유연하다. 물리적 통각으로 마시는 맥주가 아니라 맛과 향으로 마시게 된다. 온도도 적당하다. 너무 차가운 맥주가 종종 저지르는, 온도가 맛을 내치는 일이 없다.
잔은 냉각보관하지 않는다. 그럴 공간도 부족하지만, 아주 차가운 맥주 온도와 상온에 놓인 잔의 온도가 적절히 최적의 온도를 맞춘다. 그래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강 선생이 영업 비밀(?) 하나를 내놓는다.
겨울에는 4도고, 여름에는 2도야. 그게 적정 온도야. 모자라거나 넘치면 맛이 없어요. 맥주 맛이 그게 그거 같아도 다 다른 이유야.
그날의 날씨와 습도도 생맥주의 온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한다. 한 잔의 맥주에 과학이 숨어있다. 그는 생맥주 냉각기에 대해 일찍이 관심이 있었다. 전기냉장고가 아주 드물어서 옛날식으로 얼음 통에 맥주 넣어 히야시*해서 팔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전기냉장고의 힘을 알았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이었다.
* 차갑게 냉각한다는 뜻의 통용 일본어
시내에 유명한 고층 빌딩이 있었어. 삼일빌딩이라고. 그 뒤에 만리향인가 하는 중국집에서 디스펜사를 수입했다고 하는 거야. 당시 돈으로 110만 원이라고. 엄청난 돈이야. 70년대니까. 나도 수입해야 갔다(황해도 사투리),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너무 비싸, 돈이 없어. 그래서 동두천 미군 부대에 가서 비슷한 걸 얻었어. 거기에 모다(모터) 구해다가 내가 달았어. 그렇게 디스펜사를 만들었던 거야.
그는 본래 생맥주를 이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종로3가에서 노르망디라고 하는 경양식집을 운영했다. 당시 생맥주 파는 경양식집은 고급에 속했다. 신문에 실린 광고에서 보듯이 멋진 설비를 차려놓고 생맥주를 '쪽끼'로 팔았다. 쪽끼, 또는 조끼라고 부르는 건 영어의 'jug'가 일본어 발음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는 동양맥주*에서 당시 모집하기 시작한 프랜차이즈형 생맥줏집을 따냈다.
* 오비맥주로 상호가 변경된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지금 건물이 골조만 올라갔을 때야. 우리 가게가 2호였어. 1호는 을지로 오비맥주 빌딩(현 두산타워) 지하에 있는 호프였고. 그러니 맥주 하나는 확실하게 받았지. 흔히 오비호프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호프(hof)가 안 되었어. 열 평 이상은 호프였고, 우리는 그냥 오비베어가 된 거야. 호프가 뭐야? 독일어로 광장이라는 뜻이니까 열 평이상 큰 가게만 해당이 되는 거지.
우리가 생맥주를 속칭 호프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때 나온 관습이다. 맥주에 들어가는 홉에서 온 말이라는 건 와전이고 정설은 오비맥주에서 '호프'라는 말을 프랜차이즈 상호로 쓰면서 시작된 일이다.
맥주는 어떻게 조선에 왔을까
원래 맥주는 서양 것이었다. 러시아인이 처음 아시아에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이 중국 칭다오에 조차*하면서 맥주 문화도 이식했다.
* 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
우리에게도 이젠 유명한 칭다오맥주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본의 '다이닛폰'사가 칭다오맥주를 인수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고 맥주 국가로 등극하는 계기였다. 일본은 다이닛폰과 기린의 양대사 체제로 들어갔다. 식민지 조선에 조선맥주*, 쇼와기린**을 세웠다. 이 자산이 나중에 해방 후 적산 시설로 국내에 팔리게 되고, 우리 브랜드의 맥주가 열린 계기가 되었다.
* 옛 크라운, 하이트의 전신
** 동양맥주의 전신
일제강점기에 맥주는 크게 인기를 끌었다. 고급술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도쿄 긴자에나 있던 비어홀도 수입되어 수도 경성에 여럿 생겼다. 1933년 3월의 신문 기사를 보면 "작년 경성부 내 맥주 소비량은 전 조선의 3할인데 생맥주준 1백 40석, 병맥주 4만 1천 상자…" 하는 기사가 나온다. 생맥주준의 '준'이란 지금의 케그 술통을 뜻하는 준(樽)을 말한다.
또 1934년 5월 26일의 기사에는 "삿뽀로 기린 양대 맥주가 원활히 수급되어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남조선에서는 내지 제품이 보급되고, 생맥주는 경성부에 한정한 것을 인천까지 확정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1934년의 어느 기사에는 독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에는 영등포에 조선맥주회사와 소화기린맥주 양대 회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두 회사는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영등포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 나도 1990년대에 무슨 퀴즈에 당첨되어 조선맥주사의 크라운맥주 한 박스를 받으러 영등포 공장에 간 기억이 있다.
1940년 6월 8일의 기사를 보면 조선총독부에서 물가 기준을 정하는데 "맥주는 큰 것 1병에 1엔, 생맥주는 1립(立)에 1엔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1립은 1리터다. 큰 병은 아마도 국제 표준인 750밀리리터일 것이다. 그때는 병맥주와 생맥주 가격이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도, 세척, 압력. 원칙은 단순하다
이 집이 좁은 것은 이미 충분히 말했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는 설비가 있다. 엄청난 크기의 맥주 공급 장치, 즉 디스펜서와 연결된 냉장고다. 단순한 냉장고가 아니라 온도를 제어해주는 컨트롤러가 달려 있다. 요즘은 순간 강제 냉각 방식의 생맥주가 99.9퍼센트라는 걸 안다면, 이 장치의 수고로움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에는 다 이 장비였어. 점차 안 쓰게 된 거지.
기억이 난다. 1980년대 맥줏집. 모든 가게가 컨트롤러 달린 커다란 냉장고 안에 맥주 케그를 넣어서 맥주를 뽑았다. 그때 이런 기계를 '호프 기계'라고 불렀다. 으레 이 기계를 달아야 생맥주를 뽑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 데다 가격도 비싸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래도 맥주 맛 하나는 확실하다. 요즘 방식은 생맥주 케그를 상온에 비치하고, 순간적으로 냉각할 수 있는 장치를 달아서 온도를 급격히 내려 뽑은 후 제공한다.
저희는 일단 맥주 케그(통)가 들어오면 가게 뒤 공간에 냉장 보관을 해요. 단 한시도 상온에 노출시키지 않는 거죠. 그러고는 필요할 때마다 이 가게 안의 냉장고로 옮겨서 뽑아내죠.
따님의 설명이다. 원래 생맥주는 살아 있는 술이다. 제조 단계에서는 병맥주와 똑같은 술이되, 가는 길이 다르다. 만들어낸 맥주 중에 병맥주가 될 놈은 병에 담겨 저온 살균을 거친다. 생맥주는 케그로 옮겨져 산소와 차단된 상태로 유통된다.
보통 생맥주는 몇 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맛이 좋다. 상당수가 이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맛이 떨어지고 냄새가 난다.
첫째, 세척이다. 맥주 공급사에서는 교육과 매뉴얼을 통해 '매일 세척'을 권고하고 있다. 세척 방법도 가르쳐준다. 대개는 주인이 이런 관리에 소홀하고, '알바'에서 '알바'로 세척 방법이 전수되다가 어느 순간에 망각된다. 구린내 나는 맥주는 바로 이런 경우다. 맥주는 유기물이라 상한다. 음식물처럼. 극단적으로 말해서 유기물의 시체가 맥주 호스에 쌓이는 것이다. 구린내의 원인이다.
또 생맥주의 압력이 적절하지 않아서 맥주가 싱거워지는 경우도 있다. 맥주의 상쾌한 맛은 거의 전적으로 주입하는 탄산가스 때문이다. 너무 많이 넣으면 거품이 나고, 적으면 밋밋해진다. 가스 압력이 엉망인데도 주인이 몰라서, 또는 압력이 적으면 거품 적게 잘 따라지니까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비 오는 날은 높은 습도 때문에 압력이 잘 안 받아 맥주가 맛이 없다고 할 만큼 이 탄산가스가 맥주 맛에 큰 영향을 끼친다.
흥미로운 건 주입하는 탄산가스가 맥주에 섞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맥주 안에 탄산가스가 이미 들어 있다. 생맥주를 뽑을 때 주입하는 탄산가스는 맥주가 뿜어져 잘 올라오게 하는 일종의 압력 분출 장치다. 보통 탄산가스 한 통은 생맥주 케그 40개분이다.
매일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다
강 선생은 1980년 12월에 이 가게를 개업했다. 그때 맥주 한 잔에 380원, 안주는 일괄로 100원이었다. 김, 땅콩, 어포류였다. 모두 오비맥주 본사에서 공급했다.
그러다가 공정거래위에서 공급사가 안주까지 일괄 공급하고 파는 건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했어. 그러니 각자 가게서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지. 각 업장마다 치킨도 팔고, 대구포도 팔았지. 우리는 노가리였고.
자, 문제의(?) 노가리가 등장한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이 동네를 을지로 노가리골목이라 하고, 근방의 다른 가게에서도 모두 이것을 구워 팔고 있으며, 서울 시내 숱한 노가리 파는 집의 다수가 이 을지오비베어를 모델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집 노가리 맛은 구수하고 바삭하다. 거기에 양념은 특이하다.
우선, 개업하면서 시작한 강 선생의 습관을 얘기하자.
매일 새벽에 우선 길을 쓸어. 여기 아무 술집도 없을 때야. 여기서 저기까지, 동네 길을 다 쓸어. 다 호감을 갖는 거지. 그렇게 살아왔어.
그는 길을 쓸면서 깐깐한 동네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원래 이 동네는 인쇄업이 많아 인쇄골목이라고도 불렀다. 종이밥, 인쇄밥 먹는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그들이 강 선생을 믿기 시작했다. 그의 술집을 들렀다. 맥주 맛이 좋았다.
거기에다 노가리를 뜯으며 고단한 세상도 씹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니까. 술자리에서 말 잘못했다가는 보안법에 걸려 들어가는 일이 다분했던 때였으니까.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술자리에서 막걸리에 취해 대통령 욕했다가 실제로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그저 사람들은 울화를 생맥주로 식히고, 노가리처럼 세상을 씹었다.
그는 아침에 떼어온 노가리를 길에서 매일 두들겼다. 일일이 손으로. 당시 양념 용액에 적셔 말린 달달한 노가리도 있었지만, 그는 순전히 두들겨 패야 맛이 나는 딱딱한 노가리를 샀다. 특제 소스도 한몫했다. 고추장은 고추장인데 맛이 삼삼하다. 그는 절대 이 고추장 맛의 비결을 털어놓지 않는다.
나는 아침 10시에 열고 밤 10시에 닫는 걸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특별하게도 이 집은 아침부터 손님이 왔다. 당시 2, 3호선이 교차하는 을지로3가역은 역 직원들이 교대 근무를 하는 '교대(交代)'역이었다. 그러니 아침에 일이 끝나는 직원들도 많았다. 그들에게는 퇴근 시간이니 한잔하는 게 당연한데, 그 시간이 아침이었다. 대폿집은 안 열었고, 마침 호프집이 열려 있으니 그리 몰렸다. 아침부터 생맥주를 팔았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그 꾸준함이 오늘의
을지오비베어를 만들었다.
맥주 맛 하나로 만든 열 평 가게의 기적
요즘 생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전보다 1도 높아요. 한마디 하고 싶은데, 생맥주에 물 탔니 어쩌니 하는 건 거짓말이야. 불가능하다고, 물 타는 건. 타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요. (웃음) 그러니 믿고들 드세요.
여담인데, 맥주에 물 탔다고 의심하는 경우는 맥주 추출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잘 따르면 맥주에 포함되어 있는 가스가 살아나서 톡 쏘는 맛이 나는데, 이 기술을 잘 표현하지 못하면 맛이 밋밋해진다. 그래서 물 탔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강 선생은 매뉴얼이 있어도 자신의 혀를 믿었다. 일단 아침에 문 열기 전 한 잔 마시고 그날의 생맥주 맛을 조절했다. 예전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30리터짜리 타원형의 은색 케그가 있었다. 그걸로 스무 통을 팔았다. 이 작은 가게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야장'을 마당에 깔아야 가능하다. 대략 1천2백 잔을 하루에 따랐던 것이다. 손목에 속칭 '엘보'가 올 일이다.
맥주를 따를 때 잔을 어떻게 갖다 대는가 하는 점도 맛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른바 '낙차(落差)'에 따른 압력 발생이다. 잔을 높였다 내렸다를 지나치게 반복하면 오히려 맛이 없다. 일정한 높이로 따라야 한다.
최악의 생맥줏집은 잔에 거품 없이 생맥주를 대충 따른 후 숟가락으로 휘젓는 집이다. 실제로 잘 살펴보면 그런 집이 있다. 심지어 그걸 '기술'로 안다. 거품 없이 따르면 빨리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님은 거품 있는 것을 원하므로 나중에 숟가락으로 휘젓는 거다. 생맥주는 일단 잔에 따른 후에는 모든 것이 '끝난' 상태다. 따를 때 나온 거품은 맛있지만, 이미 따른 후에 강제로 일으키는 거품은 죽은 거품이다.
필자가 취재하면서 들은 흥미로운 사례다. 한 맥주회사 직원에 의하면, "오픈하고 한 번도 관 청소를 안 한 집도 상당히 있다. 그러다가 문 닫는 집도 있다"고 한다. 관 청소(매일)나 관 교체(3, 4개월)를 해야 하는지도 아예 모르는 집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맥주 맛이 가장 나쁘다는 말은 맥주 자체의 품질을 떠나 이런 무지한 풍토에서도 나온다.
옛날에는 정말 맥주 잘 마셨어. 손님 서너 명이 한 케그(30리터짜리)를 서서 마셨다니까. 원래 이 집은 의자가 없었어. 다치노미(서서 먹는 집이라는 뜻의 일본어)였으니까. 나중에 의자를 놨지.
그는 개업하고 2년 5개월을 스티로폼 매트와 담요 한 장 가지고 이 가게에서 먹고 잤다. 아침에 길도 쓸고 가게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옛 아버지들의 분투였다.
그게 홍보였어. 여보쇼들, 우리 가게 와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잖어. 그랬던 거지.
지금도 이 골목의 노가리는 오랫동안 천 원에 묶여 있다. 터줏대감인 이 집이 올리지 않으니 아무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강 선생이 흡족한 표정으로 따님이 따른 생맥주를 드신다. 이렇게 한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취재 후 이 가게와 골목이 서울특별시가 증명을 발급하는 서울문화유산으로 인증되었다. 2018년 1월에 이 가게에 또 들렀다. 그의 외손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강 선생의 안부를 들었다. 지금도 정정하셔서 맥주를 하루에 두 캔씩 드신단다. 매일 태우던 한두 대의 담배는 완전히 끊으셨다고 한다.
을지오비베어 찾아가기
- 창업주: 강효근
- 주소: 서울 중구 충무로9길 12 1층 [지도 보기]
- 대표 메뉴: 생맥주, 노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