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잇는 팔판정육점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8년 4월에 발간된 <노포의 장사법>의 본문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재벌 기업이 80억 원에 팔라고 했다던 정육점이 있다. 3대가 이어오고, 한때 전국 소시장의 제일 큰손이었던 팔판정육점이다.

 

고기 시장은 변하고 있고, 엄청난 경쟁자들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최고 정육점의 위치를 오랫동안 지켜오고 있는 노포다. 두 근을 시킨 집에 여섯 근을 보내고, 손해 보면서도 4년 동안이나 고깃값을 올리지 않고 납품했던 건 진짜 장사꾼의 자랑이다.

전통적인 장사란 무엇인가
신용과 품질은 무엇인가
이를 직선으로 보여주고 있는 팔판정육점의 황소처럼 우직한 내력 속으로 들어가본다.

좁은 골목길의 특별한 동네 정육점

고기를 잘 아는 형님이 한 분 있는데, 당신은 늘 '팔판정육점'에서 고기를 산다 했다. 팔판동은 익히 들어온 이름이었으나, 마장동도 아니고 그저 '동네' 정육점에서 특별한 고기를 산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인구가 적고 그래서 소비도 적은 북촌 동네 골목에서 좋은 고기를 다루고 팔기란 지금 시속에서 어려운 일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고기라면, 나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는 요리사이니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지는 않는다.

글쎄, 자네가 스테이크도 굽고 숙성도 하는 고기 전문가라는 걸 모를 리 없지. 그래서 일러주는 말이야. 팔판정육점에 가봐.

알쏭달쏭해지는 일이었다. 팔판동은, 삼청동이 뜨면서 랜드마크가 된 삼청파출소에서 쭉 올라가다가 왼쪽을 보고 좁은 골목길을 젖혀들어가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중학교를 인근에서 나온 터라 친구들이 더러 팔판동에 살고 있었고, 그 이름을 아는 바였다. 팔판동은, 종로구 거개*의 구역이 그렇듯 워낙 작은 동이 모여 있는 곳에 있어서 동마다 독립된 주민센터가 없다. 삼청동 주민센터 홈페이지를 들러보면 한 주민센터가 7개 동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거의 대부분

 

안국동, 소격동, 사간동과 함께 팔판동이 있다. 조선시대에 모두 여덟 명의 판서가 살았다 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팔판동은 정궁인 경복궁을 옆에 두고 있는 입지로서 조선조의 고관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다. 우리는 그 한복판의 정육점을 찾았다. 어느 해의 가을이었다.

추석 선물 들어갑니다. 요새 바쁘지요.

아이스박스 포장에 한눈에도 질 좋아 보이는 소고기 꾸러미가 들어간다. 한창때는 추석 명절이면 밤을 새워 포장했다고 한다. 주인 이경수 씨와 아들 준용 씨가 직원들과 함께 분주하다. 가게 안에 냉장고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넓은 터라, 사무실이라고 부를 공간도 없다. 이 선생이 작은 작업대에 서서 펜으로 장부를 다루면서 "이제 다 끝나가요, 인터뷰합시다"라며 웃는다.

3대가 잇는 팔판정육점은 1940년 창업했다. ⓒ박찬일호방한 체격에 호골(虎骨)이라 할 몸피의 노인인데, 눈빛이 따스하다. 가게를 둘러본다. 오래 써온 듯한 정갈한 나무 도마와 소고기 지육*을 걸어둘 게 분명한 커다란 갈고리가 여럿 걸려서 이곳이 전형적인 푸줏간임을 말해준다.

* 소나 돼지 같은 것을 도살하여 머리, 내장, 족(足)을 잘라 내고 아직 각을 뜨지 아니한 고기

고기 들어올 시간이 아니어서 볼거리가 없어요. 나랑 차나 합시다.

고기 사려는 사람이 넘치던 시대, 소시장을 장악하다

하루에 보통 열 마리에서 열서너 마리의 고기를 작업한다. 소고기만 해서 그렇다. 소매는 한눈에도 별로 없어 보인다. 이른바 '납품'이 주업인 듯하다. 그런데도 동네 정육점이니 찾는 이웃들을 위해 돼지고기도 갖추어 판다.

내가 팔판동 82번지 태생이오. 여기서 쭉살았지, 그럼요.

본디 조선 왕가의 혈육인 가문이라고 한다. 팔판동 일대에 집만 아홉 채가 있었고, 본가인 82번지는 2백 평이 넘는 대저택이다. 한 시절을 호령하고 살았던 가문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정육점을 하게 되었을까.

아, 사업이지요. 고기가 흔해진 1980년대 이후에야 그저 동네 정육점이라고들 하겠지만, 아버지가 갓 고기 사업을 시작하던 1940년대에는 서울에 정육점이 몇 없었어요. 소를 다루니 큰돈이 오갔고, 사업이 컸지요.

뒤에 쓰겠지만, 이 선생이 한창때 전국의 소시장을 주유하던 시절에는 어음도 수표도 없이 현금 다발을 싸들고 다녔다. 소시장에 큰돈이 몰렸고, 소 자체가 상징적인 현금이었다. 흔히들 '소 판 돈'이라는 말은 거액을 의미했고,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는 말처럼 소 팔아서 자식들 대학 공부를 시키던 때였다.

 

현금이 그처럼 많이 모이는 곳이 드물었다. 소가 수백 마리만 거래된다 해도 하루에 요즘 돈으로 몇십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다. 그래서 옛 신문을 보면 소시장 강도 기사가 유독 많았다. 그의 부친 고 이영근 옹이 팔판정육점을 연 게 1940년. 일제강점기 말에는 물자가 없어서 정육점을 하지 못했고, 해방 지나고 한국전쟁 후 본격적으로 고기 사업을 시작했다.

부친이 쥐고 있는 돈이 없었어요. 집안 사정이었는데,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종잣돈을 마련해서 정육점을 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지요. 얼음 깔고 그 위에 짚을 덮어놓고, 미군 판초 우의를 덧대어 고기를 보관하고 진열했어요. 외제 냉장고가 있었다 해도, 전기 사정이 형편없을 때라 쓸 수 없었겠지요.

이미 전쟁 전에 북에서 남한으로 송출해오던 전기가 끊겼다. 당시 국내 소비 전기는 대부분 북한에 있는 발전소의 몫이었는데, 송전이 끊기면서 남한의 전기 사정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고기는 절대 부족했다. 전쟁 통에 농우가 많이 죽고, 수송용으로 징발하여 군사용으로 사용하면서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터라 소는 모조리 징발당한 상태였다. 고기는 물론 가죽으로 전투 물자를 만들었다. 그 유명한 가미카제의 어린 소년 비행사들이 입었던 가죽 재킷과 조종사 모자가 바로 여기서 나온 소가죽 제품이었다. 강제 수탈로 크게 줄어든 한우 사육업은 전후에도 한동안 바닥을 쳤다.

고기를 사려는 사람은 많고 고기는 모자랐지요. 1960년대를 거치면서 부친의 사업도 커졌을 겁니다.

당시 그의 부친 별명이 축산대장이었다. 한강 이북의 소고기 시장을 장악했고, 군납도 크게 했다. 서울 시내에만 일곱 개의 정육점을 운영할 정도였다. 그가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한 일화가 있다.

 

당시 장안에 제일 센 주먹이 바로 이정재였다. 이정재가 누구냐. 박정희 사단이 5・16 군사정변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잡아들여 목에 '깡패'라는 팻말을 달고 시내를 돌게 해, 시민들에게 공포정치적인 구경거리가 되었던 바로 그 전설적인 인물이다. 계보와 성질은 달랐어도 시라소니, 김두한 등의 뒤를 잇는 상징적인 주먹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이영근 옹은 건드리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호두를 부술 정도의 힘을 가진 분이었다. 이정재와 유일하게 맞짱을 뜰 수 있는 상대였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힘은 우시장 판에도 먹혔다. 이영근 옹이 찍은 고기는 그야말로 가치 있는 고기였을 것이다. 이영근 옹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정육점도 있었지만, 소고기를 파는 행상도 있었다. 서울에서 자라 그 풍경을 책으로 써낸 아동문학가 어효선의 <내가 자란 서울>(대원사, 1990)에 나오는 대목이다.

쇠고기 장수는 쇠고기를 갸름한 궤에다 담아 지고 다녔다. 단골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장수처럼 외치지 않았다. (중략) 고깃덩어리를 꺼내놓고, 시퍼런 식칼로 썩썩 베어서 대저울에 달아준다. 그 궤짝 속은 쇠피가 묻어서 어룽어룽 얼룩이 졌지만, 겉은 쇠기름이 배어 검누르게 길이 들어 야들야들 윤이 흘렀다.

부친에게 값을 치르고 물려받은 사업

1970년대가 되자, 소고기 먹을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제는 어려웠지만 워낙 소고기를 좋아하는 민족인 데다 도축할 소의 수가 불었다.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역축*의 역할이 조금씩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다.

* 농사를 짓거나 수레에 짐을 실어 나르는 사역에 이용하는 소, 말, 당나귀 따위의 가축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골에서는 소를 길러 자식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고 시집 장가도 보냈다. 고기 공급이 늘어날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1980년도에 우리나라 소고기 소비량이 1인당 2킬로그램을 조금 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10킬로그램을 훌쩍 넘는다. 한우로는 모자라서 수입 소고기가 그 소비량을 받쳐주고 있다.

부친에게서 내가 사업을 샀어요. 물려받았냐고요? 아니에요. 돈 주고샀어요.(웃음)

철저한 사업 마인드의 부친은 가게를 그냥 대물림하지 않았다. 액수를 매겨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진짜 장사꾼이었다.

1974년 1월 2일인가, 날짜도 안 잊어요. 일을 해보겠다고 어디 가서 쌀을 날랐어요. 힘이 좋아서 4천 원인가 받았어요. 꽤 큰돈이었습니다.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했지요. 아버지한테 가게를 사기로 한 게 7월이에요. 저장된 고깃값은 다 드리고, 가게 시세는 절반으로 쳐서 샀어요.

모두 처가에서 빌린 돈이었다. 그 빚을 갚아야 했다.

내가 말이오, 1974년 7월 4일에 가게 인수하고 하루도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한 시간 반밖에 못 잡니다. 고기는 트럭으로 밤에 들어와요. 그때부터 일하는 거요.

그러면서 그는 "나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기희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안성, 음성 쪽에서 첫 고기가 자정 넘어옵니다. 이 양반들에게 잘해주고 고기를 제꺽제꺽 받아야 해요. 엄청 무거운 걸 내가 다 받아 걸었어요. 그때 잘해주지 않으면, 기사들이 우리 고기를 소중하게 다뤄주지 않습니다.

 

한 번은 고기가 망가져서 생기는 손해를 제가 계산해봤어요. 연간 5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기사들 힘들지 않게 고기 잘 받고, 비상대기해야지요. 제가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해요. 이 좁은 가겟방에서 대충 잠을 자는 거지요. 장사꾼은 그래야 해요.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돈이 그냥 벌리나요.

아, 놀랍다. 내 마음에 지진파처럼 파동이 밀려든다. '돈이 그냥 벌리나요.' 이런 계산은 아무에게서나 나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굴지의 사업을 50년 굴려본 사람의 계산이다.

 

지육 상태로 들어온 고기를 걸고 손질하고 나누고 여투는 일이 밤새 일어난다. 그렇게 다루는 소가 한때 하룻밤에 수십 마리씩 들어왔으니 노동 강도가 짚인다. 명절 때는 한 번에 수십억씩 매출이 난 적도 있다.

이제는 법인이 되었지만, 그렇게 수십 년을 개인사업자로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했지요. 소득의 38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어요. 고기 많이 팔아서 세금 많이 냈으니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장사의 첫걸음은 '정직' 그리고 고기 볼 줄 아는 '눈'

팔판정육점의 고기는 철저하게 암소다. 수입 고기는 다뤄본 역사가 없고, 소를 팔아도 한우에 암소만 다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암소를 좋아하지요. 부드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먹고 난 뒤끝이 아주 고소해요. 황소나 거세우는 못 따라오는 맛이에요.

보통 한우 중에서 암소는 고소하고 부드러우며, 황소는 진하고 억세며, 거세우*는 부드러운 맛이 도드라진다고 한다. 암소의 경우 처녀소인가, 경산우**냐, 경산우면 출산 경험이 몇 회인가를 따지는 경우도 있다. 부위별로 또 다른 기준이 적용되기도 한다. 물론 다루는 전문가마다 다른 기호와 해석을 가지고 있다.

* 황소를 일찍 거세하여 기른 것

** 출산 경험이 있는 소

 

지금 한우의 경우 철저하게 비육우(肥肉牛)* 체제다. 좋은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만 기른다는 뜻이다. 고기의 부드러움은 대부분 보증될 정도로 품질이 좋다. 그래도 이 선생의 정육점은 암소 전문이다. 창업 후 70년을 이어온 전통이다.

* 질 좋은 고기를 많이 내기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살이 찌도록 기르는 소

암소란 게 마블링이 피어도 아주 가늘고 고와요. 거세우는 중간이고, 황소는 굵고 터프하죠. 제각기 맛에 개성이 있는데, 그래도 암소가 각별해요. 그러니 지금까지 암소만 다루지.

암소와 황소가 같은 무게일 때 암소는 황소보다 지방이 많아서 고기 양이 적다. 그래도 그는 암소만 팔았다. 부드러운 맛, 씹으면 끝에 매조지*하는 맛이 있는 까닭이다. 그 배경에는 이윤도 있었다. 암소 한 마리 팔면 황소 네 마리 파는 격이었다고 한다. 좋은 암소를 찾기 위해 전국의 우시장을 다녔다. 그의 입에서 각 우시장의 장날이 술술 나온다.

* 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는 일

1일장이 횡성과 홍성에 금촌과 백암이고 2·7일장이 안성에다가 3·8일장이 오산, 4·9일장이 수원과 양평이지…

웃기는 일도 많았다. 고깃값을 고시 가격보다 높게 받는다고 단속을 당했다. 옛날에는 고기가 물가 관리 대상이라 정부의 고시 가격이란 게 있었다. 좋은 고기를 비싼 값에 사와도 똑같은 가격에 파는 불합리가 판을 쳤다. 그러니 물 먹인 소가 등장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야. 정육점에서 물 먹인 소를 어떻게 만들어요? (웃음) 살아있는 소라야 물을 먹이지 않겠소. 우리야 죽은 고기를 받는 것뿐이니 무슨 잘못이 있겠소. 우리도 피해자였지요. 그런 황당무계한 일도 있었어요.

물 먹인 지육을 받아 보관하면 물이 다 빠져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던 시절이었다. 1970,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물 먹인 소가 횡행했다. 신문에 열흘이 멀다 하고 뉴스가 나왔다. 소에게 소금을 먹여 물을 들이켜게 하거나, 도축장에서 소 혈관에 물을 주입하기도 했다. 냉동 유통이 흔한 때였으니, 물 먹인 소고기가 얼었다 녹으면 거의 엉망진창이 됐다. 그는 소고기야말로 진짜 고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남자의 힘은 소고기가 최고란다.

차범근 선수가 옛날 독일에서 뛸 때 한 번에 2킬로그램짜리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하잖소. 그렇게 먹었으니 독일 애들하고 붙을 수 있었던 거지. 정력에도 소고기요. 스지, 소 힘줄도 좋고. 내가 한때 담배도 많이 피웠지. 그래도 견딘 게 소고기 힘이오.

그는 소고기의 숙성에도 일가견이 있다.

소고기 숙성은 산도(소의 숙성에 관련된 ph 값)와 연도(부드러움) 같은 걸 이해해야 하오. 사후 경직을 아는 건 당연하고. 아미노산이 숙성되면서 증가하거든. 오늘 소 잡은 날이라고 하면, 육회라면 몰라도 실은 그날 먹을 수 없는 고기라는 뜻이지. 숙성이 되어야 맛이 돌아요. 부패 직전이 최고라고도 하고. 그렇다고 그런 고기를 팔 수는 없고.

좋은 소를 사는 것이 바로 장사의 첫걸음. 당연히 고기 보는 기술이 중요했다.

허리를 잘 봐야 해요. 채끝이 있는 쪽에 살집이 잘 잡혀야 좋은 소예요. 근수가 잘 나와요. 단순히 덩치가 크다고 근량이 많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런 기술로 이익을 더 낼 수 있었지요. 귀를 만져서 가죽이 겉돌면 물 먹인 소라는 것도 알아야 했지요. 지금은 그런 소가 없지만.

당시 소꼬리를 들추고, 항문 쪽의 살집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비밀 감별법이었다.

항문 옆으로 살이 비죽비죽 나오고 지방이 넉넉하게 비어져 나오는 암소가 아주 좋은 겁니다. 백 프로 근량이 많이 나와요. 또 가슴 위 가죽 있잖소. 늘어진 부분. 그걸 잡아봐서 가죽이 너무 딱딱하고 두꺼워도 안 샀어요. 그런 소는 고기 양이 서른 근까지 적게 나와요.

이 선생이 누비던 우시장 판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우시장이 있어도 갈 일이 없다. 등급제가 시행되면서 지육 상태로 고기를 보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용인 백암시장, 안성과 안중시장이 없어졌지. 이천 정도가 남았고. 이제 뭐 우시장은 다 역사야.

7~8년 전부터 당신의 기술이 소용을 다했다고 한다. 산지에서 소를 보고 만져서 감별해내던 날카로운 기술. 아들 준용 씨에게 이 기술을 전수할 수 없어 안타깝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소는 강원도 쪽은 다 괜찮았어요. 옥수수가 많이 나오니까 그걸 먹이는 데다 일교차가 크니까 소 몸에 기름이 잘 배고 말이지. 그래서 고기가 맛있고 육색이 좀 덜 붉고 밝아요. 지방이 중간중간 끼니까. 구례와 영주, 상주도 고기가 좋아요. 그런데 이제는 고기의 맛 차이가 많이 줄었어요. 사료가 거의 비슷하니까.

3대째 가업,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큰 것을 본다

아들 준용 씨가 팔판정육점에 합류한 건 2011년. 그는 특이하게도 미국에서 MBA를 하고,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연봉이 높은 엘리트였다. 그를 가게로 불러들인 건 이 선생이었다.

내가 무릎도 수술했고, 3년 전에 급체가 와서 큰 고비를 넘겼어요. 가게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지. 그때 모 재벌기업에서 기막히게 그 소식을 들었나 봐요. 80억에 팔판정육점을 팔랍니다.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그런데 안 되겠어요. 아버지한테 내가 돈 주고 샀으니 나도 자식한테 넘겨야지. 당시 쟤가 받던 봉급 두 배 준다고 해서 불렀어요. (웃음)

너무도 고된 50년 세월을 함께 보낸 아내가 6개월을 울면서 말렸다고 한다. 아들에게 또 이 고통을 넘겨주느냐는 항의였다. 이렇게 팔판정육점은 대를 이어가게 된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팔판정육점 ⓒ노중훈팔판정육점의 주요 거래처는 열두 곳 정도. 그중에서 노포 우래옥과 하동관은 개업 이후부터 70년 고객이다. "우래옥 창업자와 우리 선친이 지인이에요. 그때부터 넣은 고기를 지금도 넣는 거지." 전율이 인다. 대를 이어 믿고 사는 사람이나, 그걸 대는 사람이나 놀랍기는 매한가지다.

 

팔판정육점은 작아 보이지만, 뒤쪽으로 소 290마리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 시설을 늘린 것이다. 이 창고에서 엄청난 양의 암소가 늘 숙성되고 있다.

장사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안 돼요
크게 보는 거예요

거상(巨商)이라 할 이경수 선생의 말이다. 준용 씨는 한동안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근짜리 고기를 시킨 손님에게 여섯 근을 배달하지 않나, 돼지고기는 값이 폭등해도 아예 이문도 없이 옛날 값으로 그냥 팔지 않나.

옛날에 우래옥에 소 혀를 댔는데, 4년 동안 밑졌어요. 그렇다고 거기에다 말도 안 했어요. 그런 작은 손해는 지고 가는 겁니다. 계산이 정확할 때는 그래야 하지만, 베풀면서 그때를 알기는 참 힘들지요.

그가 악수를 청했다. 한때 유도를 했고, 한 방에 소를 쳐서 쓰러뜨렸다던 무도인인 그의 손이 무겁고 두툼했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3대 76년의 정육점 주인이다.

팔판정육점 찾아가기

  • 창업주: 이영근
  • 주소: 서울 종로구 팔판길 19 [지도 보기]
  • 대표 메뉴: 정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