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끝끝내 살아남을 것이다
인류의 지성은 오랜 기간 종이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철학가의 생각과 과학자의 이론은 책으로 후대에 전달되었고, 크리에이터의 영감과 아이디어 역시 연필 끝과 맞닿아 있는 지면으로부터 출발했다. 종이 없는 세상을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편에선 종이를 몰아내기 위한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다.
일찍이 앨빈 토플러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컴퓨터 단말기의 등장으로 서류가 없는 전자 사무실이 탄생할 것을 예고했고, 정보 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듯 보였다.
이른바 페이퍼리스(paperless) 오피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페이퍼리스 트렌드는 업무 공간 밖에서도 활발히 이어졌다. 전자 여권, 이메일 청구서가 등장했고 종이 통장과 지폐는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전망이다. 인쇄 매체들은 지면이 아닌 디지털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바빴고 전자책의 등장에 '이제 종이 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여론도 형성됐다.
그럼에도 종이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아니, 단순히 생존 수준을 넘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독립 서점이 새로운 힙 플레이스로 떠올랐고, 독창적인 콘셉트를 앞세운 소규모 독립 잡지들도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 컬러링북의 인기에 이어 최근에는 플립북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종이의 재발견과 함께 연필 등 전통적인 필기구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타이핑의 시대가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종이나 연필이 디지털로 대체되어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인간은 논리와 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을.
디지털과 휴전 협정 맺은 몰스킨
몰스킨은 디지털 시대 종이의 생존 방식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브랜드다. '몰스킨의 어머니'라 불리는 마리아 세브레곤디(Maria Sebregondi)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으로 1990년대 중반 물류 회사 '모도 앤드 모도(Modo&Modo)'와 함께 현대 유목민을 위한 툴키트로 몰스킨 노트를 고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