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을 돌아 다시 아날로그로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일찍이 영화나 사진 같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이 세상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라 내다봤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미지 생산 능력이 무한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표현 욕구 또한 증가했다. 누가 뭐래도 20세기는 이미지 풍요의 시대였다.하지만 20세기 말,
디지털 기술이 도래하면서
풍요는 과잉으로 변질되었다

기술은 이미지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무뎌짐과 피로감, 선택 장애를 유발했다(하릴없이 구글의 검색 이미지를 스크롤하거나 30분 이상 IP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릴 때, 혹은 무료하게 유튜브 영상을 뒤적거릴 때를 떠올려보자).

 

오늘날 필름 카메라의 귀환은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제한된 선택이 주는 신중함과 집중력을 되찾고 싶어한다. 2002년 폴라로이드, 2003년 페라니아, 2005년 영국의 일포드와 독일의 아그파가 줄도산할 때만 해도 필름 카메라의 종말은 기정사실 같았다. 하지만 후지 인스탁스*의 극적인 성공 사례가 보여주듯 한편에서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가 주는 제약을 기꺼이 수용했다.

* 2000년대 중반 후지 본사로부터 퇴출 위기까지 내몰렸던 후지 인스탁스는 2007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호전됐고 2012년 160만 대, 2014년 460만 대, 2015년에는 600만 대 이상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필름 카메라 브랜드가 됐다.

 

로모그래피는 마니아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거대한 글로벌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관록의 영화 거장 혹은 젊은 포토그래퍼들 사이에서도 필름 카메라로 작품을 만드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날로그 카메라가 디지털 세상을 전복시키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기현상은 사람들의 일시적이고 유별난 변덕이 만들어낸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택적 제약이 때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크리에이터로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