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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케냐 마라토너의 마음가짐

케냐 마라토너의 마음가짐

내가 만난 케냐 마라토너

케냐 마라토너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배운 그들의 마음가짐과 관점을 말하기 전에 어떤 마라토너들과 같이 뛰고 이야기하며 나의 생각이 형성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야 독자 여러분도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며 리포트를 읽을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다.

 

먼저, 킬루(Keellu) 호텔과 딜란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텐에서 와이파이가 가능한 장소는 많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윌슨 킵상*이 운영하던 킬루 호텔이었다.

* 현재(2017.9 기준) 2:03:23로 마라톤 세계 2위 기록을 갖고 있는 세계적 마라톤 선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마라톤 동메달을 수상했다. 메이저 마라톤에서는 프랑크푸르트 마라톤 2회 우승(2010, 2011), 런던 마라톤 2회 우승(2012, 2014), 베를린 마라톤 우승(2013), 뉴욕 마라톤 우승(2014), 도쿄 마라톤 우승(2017) 경력이 있다.

 

처음에는 윌슨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킬루를 찾았다. 그러다 그만, 킬루의 밀크티와 음식 맛에 반해 단골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가족, 친구들과 비디오 채팅을 하거나 그곳을 찾는 다른 케냐인들과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중 킬루에 묵던 딜란을 만났다. 딜란은 나이로비 출신의 인도계 케냐인이었다. 사업가였던 딜란의 아버지는 윌슨과 친한 사이였다. 마라토너의 꿈을 품은 딜란은 아버지에게 부탁해 킬루에 와서 윌슨의 코칭 아래 훈련하고 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나이로비에서의 편한 삶을 두고 이텐 같은 시골에 와 꿈을 키워가는 딜란에게 정감이 갔다. 딜란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케냐의 마라토너들이 어떻게 훈련을 하는지 같이 살면서 직접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달리기를 위해 먼 곳까지 온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같이 아침 회복주를 하기도 했으며, 트랙 위에서 인터벌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온 자밀이 있었다. 자밀의 아버지는 케냐인이었고 어머니는 영국 출신이었다. 영국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자밀은 육상 코치 자격증을 따고 케냐 선수들을 코칭하면서 경제적 지원도 하고 있었다. 케냐에 자주 방문하며 나이로비에서는 교육 관련 봉사를 하였고, 이텐에 와서는 자신이 지원하는 선수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장거리주 후 자밀(좌)과 딜란(우) ©김성우

달리기를 향한 큰 열정만으로 이텐까지 왔던 우리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2015년 8월 당시, 베이징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남녀 마라톤 대표 선수 6명이 킬루에서 묵으며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딜란은 남자 대표로 훈련 중이던 윌슨을 통해 다른 대표 선수 및 코치들, 그리고 마사지 전문가와도 친분을 갖고 있었다. 딜란을 통해 자밀과 나 역시 자연스레 케냐 마라톤 대표 선수들을 알게 되었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들과 달리기, 식사, 훈련 방식,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킬루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케냐 마라톤 대표 선수들의 달리기에 대해 알아갔다. 아침과 저녁에는 여자 대표 선수들의 회복주를 같이 뛰며 그들이 어떻게 달리는지 배워갔다. 단, 오전 10시에 하는 메인 훈련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아예 물어보질 않았다. 나는 이들이 풀코스를 2시간 20분대에 완주하는 선수라는 점을 기억해야 했다.

 

케냐 최고의 마라토너들과 생활하고 뛰면서, 케냐 마라톤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들(자연환경적·문화적·사회적)을 놓고 함께 대화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형성한 나의 관점을 소개한다.

케냐 마라톤의 성공 요인

'일상'으로서의 달리기

 

성공적인 케냐 마라토너들의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많이 걷고 뛰며 자랐다. 집에서 5,000m~10,000m 떨어진 학교에 친구들과 걷거나 뛰어서 통학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선수가 실제로도 여럿이었다.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도 케냐인에게 '걷기'는 어려서부터 일상다반사였다. 물을 뜨러 가거나, 난방에 쓸 나무를 패러 가거나, 멀리 떨어진 상점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 오면서 늘 걷고 뛰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맨발로 걷거나 뛰는 행위는 발 근육과 관절의 발달을 도왔다.

 

'훈련'이라는 인식 없이, 케냐인들은 성공적인 마라토너로서 필요한 올바른 달리기 자세와 기본 심폐 능력, 유산소 신진대사 능력을 일상에서 수년간 자연스레 쌓아온 것이었다.


브로콤은 인터뷰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케냐 선수들 중 부유한 집안 출신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으로 많은 활동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고, 이는 달리기로 성공하고 싶은 열망과 절실함을 안겨주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묵묵히 달리는 마라토너'에 수록된 레이몬드 벳과의 인터뷰를 참고하길 바란다.

 

몸에 무리가 덜 가는 흙길과 풀밭

 

케냐 마라토너들이 어렸을 때부터 뛰놀던 땅은 사람이 만든 도로가 아닌 자연 속 흙과 풀이었다. 흙과 풀밭에서 걷거나 뛰어본 적이 있다면, 아스팔트보다 푹신한 그 느낌을 충분히 알 것이다. 이곳에서 뛸 때 우리 몸을 구성하는 관절과 근육은 아스팔트에서 뛸 때보다 충격을 훨씬 덜 받는다.

 

지금도 이텐에는 케냐 마라토너들이 뛰기 좋아하는 흙길이 유지되어 있다. 케냐 선수들은 수년간의 훈련을 통해 아스팔트처럼 포장된 길 위에서 뛰는 것이 흙길이나 풀밭에서 뛸 때보다 몸에 더 무리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능하면 모든 훈련을 흙길에서 했다.

 

또한 케냐 마라토너들은 마라톤 대회가 끝나면, 40여 분 동안 풀밭에서 천천히 조깅을 했다. 42.195km*를 아스팔트 위에서 뛰면서 몸의 근육과 관절에 축적된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 마라톤 풀코스 거리

 

이렇듯 몸에 무리가 덜 가는 자연환경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지속적으로 강도 높은 훈련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사회적·경제적 성공을 이룬 롤모델의 등장

 

케냐 마라토너들은 어떻게 달리기를 시작했을까? 왜 하루에도 두 번 이상 달리는 힘든 운동을 업으로 삼았을까?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이 케냐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탄야(Tanya)라는 케냐인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시나리오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탄야는 대학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아 곧바로 일을 찾는다. 그런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자격증이나 기술을 배우는 데 들일 수 있는 돈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하는 힘든 농사는 미래가 없다고 느껴진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막막할 뿐이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삼촌이 우승을 하고 돌아오더니, 소 100마리와 멋진 외제 자동차, 그리고 수천 평의 땅을 구입했다. 집에도 놀러 와서는 내게 '너도 훈련을 하면 성공적인 마라토너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는 게 아닌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생활에 보태라면서 일 년 동안 우리 가족이 마음껏 쓰고도 남을 돈을 주고 갔다.

 

그러고 보니, 저 엘도렛의 북쪽에 있는 '이텐'이라는 마을에서 수십 명의 세계적 선수들이 달리기로 경제적 부를 이루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곳의 코치들은 최소한의 실력이 보장된 선수만 받는다고 들었다. 요새 마을 주변에 달리기 훈련을 하는 또래 친구들이 많이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내 '나도 같이 달려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 여러분이 탄야라면, 친구들이 훈련하고 있는 달리기 그룹에 가서 한 번 같이 뛰어보지 않겠는가? 시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달려 보겠다'는 마음뿐이다. 성공하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 당신에게도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지 않을까? 케냐 마라토너들 중 이렇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롤모델이 주변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언제든지 그들과 같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달리기를 시작하는 데 큰 동기부여를 했다. 또한 세계 최고와 같이 뛰면서 그들의 달리기를 곁에서 배울 수 있고, 그들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요인은 더욱 많은 케냐 마라토너들이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데니스 키메토(Dennis Kimetto)는 농부로 살다가 4~5년의 엘리트 훈련 끝에 2시간 2분 57초로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데니스는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세운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1억 7천만 원이 넘는 상금을 챙겼다. 한 달 월급이 20~30만 원인 케냐에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렇듯 달리기를 통한 인생역전을 보며,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달리기에 도전하는 케냐인이 늘어났다.

 

'저들도 내 동네 출신이고, 몇 년 전만 해도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도전해 보자!'라는 마음을 먹고 달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도 세계적 선수가 되어야겠다!'라고 크게 마음먹고 훈련을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달리기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서 달리기와 다른 일을 병행하는 삶과도 다르다. 오랫동안 다치지 않고 지속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흙길과 풀밭을 어디서든 찾을 수 있기에, 또 세계적 선수들과 언제든지 같이 뛸 수 있고, 그들이 어떻게 훈련하는지 직접 보고 배울 수 있기에 그들은 달리기를 선택했다.

 

정리하자면, 케냐만의 특수한 자연환경적·문화적·사회적 요인들은 케냐인이 자연스럽게 달리기에 도전하게 하고,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게끔 만드는 배경으로 보였다. 케냐 마라토너들은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쌓은 기량을 바탕으로 마라토너로서의 삶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세계 최고들과 함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흙길과 풀밭에서 매일 뛰었으며, 달리기로 세계를 계속 제패해 나갔다.

그들이 달리기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관점

세계 여러 나라가 마라톤의 성공 모델로 케냐를 꼽는다. 이들은 자신의 선수단에 케냐 출신 선수들을 훈련 파트너로 영입하고, 올림픽 메달을 딸만한 선수를 귀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케냐 선수들이 하는 훈련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케냐 마라토너들이 자라온 자연환경적·문화적·사회적 요인들을 우리가 그대로 카피할 수는 없다. 한국 마라톤의 본고장인 강릉마저도 이미 인공 도로가 많이 깔렸다. 최근 들어 20~30대 사이에 달리기 열풍이 불고 있지만, 그들에게 달리기는 재미 추구, 건강 유지, 쿨함*을 나타내는 한 방편일 뿐이다. 케냐 마라토너들이 인생을 탈바꿈하기 위해 달리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세련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단어

 

여기서는 그들의 달리기를 향한 마음가짐과 관점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을지 고민해 보려 한다. 우리에게 맞는 달리기 방식을 찾는 길잡이도 가능하리라 본다. 케냐 마라토너들과 같이 생활하고 훈련하면서 그들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낀, 그들이 달리기를 대하는 세 가지 마음가짐을 소개한다.


Pole, pole
천천히, 천천히

 

이텐의 케냐 마라토너들이 아침과 저녁에 5~6min/km의 속도로 천천히 뛴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국가 대표 선수들도 그럴 줄은 몰랐다.

 

베이징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의 여자 마라톤 경기에서 케냐를 대표할 에드나, 헬라, 자넷*, 그리고 그들의 코치인 데이비드 마루스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친해졌다. 하루는 점심을 먹다가, 아침과 저녁 조깅을 같이 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흔쾌히 웃으며 언제든지 조인(join)하라고 했다. 데이비드는 마침 그날 저녁 조깅이 '이지 런(easy run, 회복주)'이니, 힘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헬라는 2015년 베이징 세계 육상 대회의 여자 마라톤 경기에서 결국 은메달을 수상했고, 2016년 도쿄 마라톤에서는 코스 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했다. 에드나는 37세의 나이로 201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 28세의 자넷은, 2015년 네덜란드 동북부에 위치한 즈볼레(Zwolle) 하프 마라톤에서 1시간 11분 10초의 개인 신기록을 달성하며 우승했다. 헬라와 에드나는 2017 런던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마라톤 경기에 케냐 대표로 참가했는데, 에드나는 2위의 성적(2:27:18)을, 헬라는 7위의 성적(2:28:19)을 거두었다.

 

회복주라고 해도, 여자 대표 선수들은 2시간 20분대의 마라톤 선수들이었고, 데이비드는 한때 하프 마라톤을 62분대에 뛰던 선수였다. 데이비드는 나에게 오후 5시에 킬루 앞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4시 반부터 나와서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풀었다. 초대해 주었는데 뒤로 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4시 50분이 되자 검은 트레이닝 복을 빼입은 헬라가 팔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왔다. 점심 식사 후 잘 쉬었냐고 묻자, 마사지를 받고 낮잠도 잘 자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 뒤로 데이비드, 에드나, 자넷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두들 푹 쉬고 난 후의 가벼운 표정이었다.

 

킬루 앞 흙길을 천천히 걷다가, 아무 말 없이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걷는 게 더 빠르다고 느껴지는 속도였다. 앞으로의 이동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발이 땅에 어떤 느낌으로 떨어지는지, 다리를 이루는 수많은 근육과 관절은 어떤 상태인지 등 자신의 몸을 아주 세세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천천히 시작한 조깅은 아주 조금씩 속도가 붙었지만, 5min/km보다 빠르게 달리지는 않았다. 달리는 내내 헬라, 에드나, 자넷은 스와힐리어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웃으며 뛰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데이비드에게 왜 이렇게 천천히 달리냐고 물어보았다.

데이비드, 원래 이렇게 천천히 뛰나요? 

회복주는 천천히 뛰어요. 내가 회복주를 선수들과 같이 뛰는 이유는, 선수들이 이것보다 더 빠르게 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내가 페이스를 조절하고, 선수들은 그 페이스를 따라오는 거죠.

왜요?

음… 우리는 오늘 아침에 트랙 위에서 인터벌 훈련을 했어요. 1,000m 열 번을, 마라톤 페이스보다 조금 빠르게. 이건 쉽지 않은 훈련이에요. 저녁에는 아침 훈련에서 쌓인 피로를 천천히 뛰면서 풀어내는 게 필요해요.

빨리 뛰는 것만큼
천천히 뛰는 것도
중요한 훈련이었다

우리는 케냐와 달리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50분 동안 천천히 달렸다. 회복주를 뛰고 난 후, 몸은 가벼웠고 기분이 좋았다. 뛰기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내 몸에서 느껴졌고 내일 훈련이 기다려졌다.

 

이런 방식으로 케냐 선수들은 고강도 훈련과 아주 천천히 뛰는 훈련을 섞어서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이를 통해 몸과 마음이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온 힘을 다하는 훈련이야말로 진정한 달리기이며, 세계적인 마라토너들도 그렇게 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기대는 또다시 깨졌다. 이텐에서 자신을 한계로 몰아붙이면서 훈련하는 선수들은 2시간 10분대 이내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세계 육상 선수권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며 실행했던 마지막 고강도 훈련에서조차, 헬라, 에드나, 자넷은 억지로 힘을 내서 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에너지를 비축해둘 필요가 있었다. 연습이 아닌 대회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온몸의 힘을 소진하며 달리는 일이 신체적 부상과 심리적 압박을 불러오며 지속적인 훈련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계적인 빠름을 위해, 그들은 '천천히' 달릴 줄 알았고, 빠름을 축적해 놓을 줄 알았다. 이것이 케냐 마라토너들의 지속적 훈련과 기량 향상을 가능케 했다.

 

Haraka haraka,
haina baraka
서두르는 것에는
축복이 없다

 

이텐을 떠나기 전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은 여자 마라톤 대표 선수들이 베이징 대회 전 마지막 장거리주 훈련을 하는 날이었다. 35km를 1,000m마다 속도를 높여서 마라톤 페이스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베이징에서 펼쳐질 마라톤을 두고 컨디션을 확인하는 대회 전 마지막 고강도 훈련이었다.

 

나는 35km를 뛰는 훈련은 무리라는 판단 아래 전날 혼자 20km 장거리주를 했다. 대신, 딜란과 함께 데이비드의 차를 타고 그들을 응원하기로 했다*. 자밀은 마침 주말에 장거리주를 하기로 해서 케냐 여자 마라톤 대표 선수들과 같이 뛰기로 했다.

* 케냐 코치들은 선수들이 장거리 훈련을 할 때, 뒤에서 자동차로 따라가면서 음료를 제공하고 뛰는 속도와 거리를 모니터링 했다.

 

드디어 다가온 토요일 아침. 킬루 앞에 헬라, 에드나, 자넷, 자밀, 딜란, 데이비드와 에드나의 남편이자 코치인 길버트까지 모두 모였다. 훈련을 하는 헬라, 에드나, 자넷, 자밀은 킬루에서 천천히 마을 중앙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걷는 속도와 비슷한 회복주를 시작할 때의 스피드와 똑같았다.

 

마을을 지나면서 장거리주 페이스를 조절해줄 남자 마라토너가 합류했는데, 이 지점부터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다. 천천히 뛰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자밀이 계속 빨리 가자는 손짓을 하며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었다.

서두르는 자밀(회색 옷) ©김성우자밀을 보면서 데이비드와 길버트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밀, 저러다가 후회할 텐데…

그렇게 자밀은 10여 분 동안 혼자 앞에서 케냐 여자 마라톤 대표 선수들을 이끌어 나가려 하였다. 페이스를 맞추는 남자 마라토너는 그런 자밀이 더 빨리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간에서 뛰었다.

 

우리는 곧 마을 중심부에서 벗어나 옥수수밭이 양쪽으로 난 흙길로 들어섰다. 높고 낮은 언덕들을 지나면서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꾸준히 빨라졌다. 6min/km의 속도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5min/km을 넘어 4min/km를 바라보았다.

 

급수 시간이 되어 길버트는 선수들 옆으로 붙어 운전을 하였고, 선수들은 데이비드에게 물을 전달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아침에 체온을 유지하고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데이비드에게 차례로 전달하였다.

 

선수들의 얼굴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그룹을 주도하던 자밀은 이제 여자 대표 선수들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페이스는 3분대로 진입했다. 여자 대표 선수들의 자세와 리듬은 일정했고, 몸은 가벼웠으며, 표정에서는 어떠한 고통이나 힘듦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훈련에 최선을 다해 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스피드를 내지 않고 천천히 끌어올려 몸에 준비된 스피드로 달리고 있었다. 목표 스피드로 장거리주를 하도록 지금까지 철저히 준비해 왔기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자밀은 20km부터 힘겨워하는 표정을 보였고, 결국 25km에서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탄 자밀은 "그래도 하프 마라톤 거리를 케냐 여자 대표 선수들이랑 뛰었으니까, 런던에 돌아가서 자랑할 거리가 생겼네!"라며 우리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유머를 잃지 않는 자밀이었다.

 

헬라, 에드나, 자넷은 계속 장거리주를 이어 갔고, 우리는 끝 지점에 먼저 도착해 그들을 기다렸다.

35km 장거리주 끝 지점에 도착하는 헬라와 에드나 ©김성우

자밀이 장거리주 초반부터 속력을 인위적으로 올리면서 서두른 반면, 케냐 마라토너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러한 여유는 달릴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볼 수 있었다. 4시에 훈련을 시작한다고 하면, 적어도 1시간 전부터는 쉬다가 훈련을 하러 나갔다.

 

달리기 초반에는 천천히 뛰면서, 그날 몸에 맞는 스피드를 몸이 스스로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 습관을 들여 부상이나 스트레스 없이 꾸준하게 훈련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케냐 마라토너들에게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목표는 중요했다. 하지만 그 목표만 이루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면, 오늘 당장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까 봐 불안감이 생기기 쉽다. 자연스레 서두르게 되고, 이는 무리하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결국 신체적 부상이나 심리적 번아웃이 발생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성공적인 케냐 마라토너들은 목표에만 집중하는 일의 위험성을 아는 듯했다. 그들은 목표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과 가능성 둘 다에 집중했다.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지만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자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오늘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케냐 마라토너들은 목표를 위해 오늘 해야 할 것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해냈다. 그렇게 매일매일 목표에 근접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감을 키우고, 과정에 더욱 집중했다. 대회에 나가서는 축적해둔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며 성장한 자신을 확인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지금 당장의 빠름을 위해 장기적인 성장을 희생하지 않았다.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았기에, 케냐 마라토너들은 빨랐다.

 

세계 수준의 마라톤에는
세계 수준의 쉼이 필요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달리기 훈련을 했을 때 나는 항상 쉴 시간이 부족했다. 1년 반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는 바쁜 스케줄과 프로젝트 미팅, 세미나, 친구들과의 식사 약속 중에서도 꼭 하루에 최소한 한 번이나 두 번을 뛰었다. 아침에는 가벼운 조깅을 했는데,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두르던 경우가 많았다.

오후 훈련은 보통 점심 전에 하였다. 오후 수업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시간 안에 목표량을 억지로 해낸 경우도 많았다. 무리한 스케줄과 충분한 휴식 시간 없이 회복이 덜된 몸으로 계속 훈련을 해 나갔다. 결국 심리적 번아웃과 자잘한 부상들이 이어졌다.

 

반면, 케냐에서는 매일 두 번 이상 달리면서 정말 많이 쉬었다. 달리고 나서 해야 할 일은 식사와 집안 정리뿐이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인터넷이 없었고, 이텐에는 박물관이나 영화관도 없었다. 놀자고 할 친구들도 물론 없었다. 달리고 먹고, 빨래를 하거나 집안 정리만 하기에는 하루 16시간이 아주 길었다.

 

남는 시간은 모두 쉬는 시간이었다. 그냥 풀밭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동네 사람들이나 다른 마라토너들과 차를 마시면서 농담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쉬는 일이 일상이었다. 책을 보기도 했고, 동네 아이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다.

 

햇빛 아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잠이 왔다. 그러면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물을 마시면서 책을 보다가 슬슬 달릴 준비를 했다. 몸은 완전하게 회복되어 있었고, 마음에도 여유가 넘쳤다. 그날의 훈련을 잘 해낼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케냐 마라토너들은 쉬고, 낮잠을 자는 일에 더하여 전문 마사지사로부터 마사지를 받았다. 베이징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마라톤을 준비하던 케냐 대표 선수들에게도 전문 마사지사가 두 명 있었고, 매일 마사지를 받았다.

 

딥 티슈 마사지는 훈련을 통해 굳어진 근육들을 풀어주고, 심신 이완에 효과가 있었다. 나도 마사지사를 소개받아 마사지를 두 번 받았는데, 뭉친 근육들이 확실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마사지는 육상 선수들에게 필수여서, 많은 미국 대학 육상팀이 마사지를 공부한 물리 치료사 등을 내부에 두고 있다.
*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뿐만 아니라, 100m 같은 단거리 선수들에게도 마사지는 중요한 듯 보인다. 우사인 볼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강도 높은 훈련 전에 마사지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케냐 마라토너들은 훈련을 할 때 몸에 쌓이는 스트레스나 긴장을 온전한 쉼과 마사지로 풀어냈다. 아침과 저녁마다 하던 회복주도 또 하나의 '쉼'이었다. 세계 수준의 마라톤을 위해서는 강도 높은 훈련만큼이나 양질의 쉼도 필요했다.

 

나의 관점을 넘어서

 

케냐 마라토너들이 세계적인 기량을 쌓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들과, 성공을 이루는 근간이 되어준 그들의 달리기 관점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는 내가 그들과 같이 생활하고 대화하며 발견한,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밝혀둔다.

 

30년이 넘는 케냐 마라톤의 역사 중에서 나는 단지 4주 동안만 이텐에 있었다. 세계적인 케냐 마라토너들을 육성한 코치들의 생각도 직접 듣고 싶었다. 케냐 마라톤의 역사를 살아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따라서 '케냐 마라톤의 대부'로 불리며, 1976년부터 이텐에 거주 중인 전설적인 코치, 브로콤을 인터뷰하였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이들과 같이 살았다고 해서 케냐 마라톤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 성공적인 케냐 마라토너들은 이러한 생활을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해 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주관적인 경험의 폭을 넓히고자 아테네 마라톤 2회 우승자인 레이, 그리고 2014년 서울 마라톤과 2016년 도쿄 마라톤 우승자인 헬라와 그의 코치이자 남편인 데이비드를 인터뷰하였다.

 

마지막으로 케냐 마라토너들의 선천적 재능과 그들의 성공 이유를 외부인의 관점에서 보고 싶어서 영국 출신의 선생님이자 육상 코치인 자밀과도 인터뷰를 하였다.

 

이제 그들로부터 직접 케냐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4 케냐 마라토너의 마음가짐 마침.

독자 리뷰

현재까지 224명이 읽은 콘텐츠입니다

  • 정**

    달리고 싶어졌다. 인생의 트랙도 잘.

  • 김**

    개인적 취미를 보편적 삶의 교훈으로 연결시켜 공감을 일으키는 글입니다.
    자세하고 현장감 있는 설명과 인물들의 진심을 잘 담아냄으로써 케냐 러너들에 대한 애정, 관심이 생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읽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묵묵히 달리는 마라토너: 묻고 배우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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