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쓰기가 막막할 때
💡 10분 안에 이런 걸 알려드려요!
- '초안의 초안', 제로 드래프트를 초기에 작성해야 하는 이유
- 회의 중, 보고서 작성 전 등 제로 드래프트 200% 활용 팁
- 에너지와 시간도 아끼면서 일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되는 방법
저자 김획자
소비재 대기업 9년 차 전략기획 전문가 > 프로필 더 보기
혹시 〈나 혼자 산다〉 박정민 배우 편 보셨나요? 한 에피소드에서 박정민 배우는 원고 한 편을 청탁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얘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빈 화면을 띄워 놓고 한참을 가만히 턱만 괴고 앉아있는데요. 이내 몇 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앞을 떠나고 맙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해보신 적 있지 않나요?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었던 경험 말이죠.
주니어 시절, 상사로부터 모레까지 회사소개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의견을 담아야 하는 문서도 아닐뿐더러 회사의 히스토리, 주요 사업 영역, 매출액 등 관련 자료가 많으니 쉽게 술술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네!"라고 씩씩하게 답하고 자리로 돌아왔죠. 그런데 막상 문서를 작성하려 하니 어디부터 어디까지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회사에 혼자 남아 야근을 했죠.
더 당황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겨우 방향을 정해 혼자 밤낮으로 끙끙 앓으며 보고서를 작성했음에도, "내가 원하는 건 이 방향이 아닌데"라는 상사의 피드백을 들었던 거죠. 그동안의 야근이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보고서를 빨리 쓰지 못하는 이유, 보고서가 한번에 통과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 첫 번째는 보고서를 쓰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서입니다. 이 보고서를 왜 쓰는지를 모르면 어떻게 써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 두 번째는 보고서를 지시한 상사와의 컨센서스*가 부족해서입니다. 상사가 생각한 방향은 A인데 나는 B라고 생각해 보고서를 완성한다면, 결국 내가 쓴 보고서는 시작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 consensus, 어떤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 간의 일치된 의견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그래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처음부터 제대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상사에게 제로 드래프트를 보여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보고서를 구성하면 될까요?"라고 큰 마음 먹고 물어봤는데요. 상사는 오히려 제로 드래프트를 반기는 눈빛이었습니다.
"저는 A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김획자님은 B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까요?"라며 제 의견을 물어보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먼저 피드백을 받고 나니,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보고서가 술술 써지는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9년 동안 전략기획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천 개의 보고서를 쓰면서 깨달은 '보고서 빨리 쓰기 노하우' 그리고 '통과하는 보고서를 쓰는 노하우'를 여러분께 공유해 드리려 합니다.
핵심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초안의 초안, '제로 드래프트'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즉, 글의 뼈대를 만들기 전에 그 뼈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간단히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제로 드래프트를 가지고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상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거예요.
일 잘하는 선배의 비밀, ‘제로 드래프트’
제로 드래프트는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가 주창한 개념입니다. '후속 계획의 기초가 되는 기본 계획'을 의미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제로 드래프트'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 코드를 빼놓은 채 방해받지 않고 연속으로 5시간 내지 6시간 동안 보고서 작성에 전력투구한다면, 내가 이름 지은 소위 '제로 드래프트Zero Draft(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때 과거의 실적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수립한 계획으로서 후속 계획의 기초가 되는 기본 계획을 의미함)'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시간의 소비자다. 게다가 대부분 사람들은 시간의 낭비자들이다.
―피터 드러커, 〈프로페셔널의 조건〉, 193p
저는 이 제로 드래프트를 회사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일하는 방식이 궁금했던 팀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항상 책상 위에 A4 용지를 펼쳐놓고는 연필로 뭔가를 계속 썼다가 지우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태블릿 PC에 뭔가를 부지런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워낙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기로 회사 내에서도 유명했던 분이라 손으로 뭘 쓰는 건지 물어봤습니다.
"선배님, 혹시 손으로 매일 뭘 쓰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선배가 제게 묻더라고요.
"김획자 님은 보고서 쓸 때, 가장 먼저 뭘 하세요?"
저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PPT를 열어요."
그랬더니 그 선배는 보고서를 쓸 때, 가장 먼저 손으로 보고서의 목적은 무엇인지, 언제까지 보고해야 하는 것인지, 보고하는 대상은 누구인지 적어보고, 보고서를 어떻게 구성할지도 손으로 그려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PPT를 작성하는 시간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겁니다.
"우와, 그런 꿀팁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라고 답하고 자리에 돌아왔지만, 속으로는 '에이, 설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 손으로 써본 후 PPT를 작성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답답하고 느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평소와 전혀 다른 주제의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터라 유난히도 진도가 나가지 않던 날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A4 이면지를 찾아서 보고서의 목적을 손으로 써봤습니다. 이후, 보고서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개요도 대략 그려봤습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했던 내용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오히려 본 보고서를 쓰는 시간이 줄어들더라고요.
내가 어떤 보고서를 쓸 것인지 정리하지 않고, 일단 PPT나 워드부터 열고 '뭐라도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을 거예요.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도 더 오래 걸리게 됩니다.
빨리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속는 셈 치고 오늘부터 '손으로 제로 드래프트 만들기'를 실천해 보셨으면 합니다.
보고서의 초안을 쓰기 전, 직접 손으로 '초안의 초안'을 만들어보는 건데요. 최대한 몰입할 시간을 확보해 어떤 방향으로 이 보고서가 작성되어야 하는지,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자유롭게 손으로 써보는 거죠. 특히 제로 드래프트를 상사에게 공유해 서로 컨센서스를 이룬 다음 일을 시작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거죠.
제로 드래프트의 힘
보고서 작성 시간을 단축합니다
보고서가 한번에 통과되면 정말 좋겠지만, 나와 상사가 생각한 방향성이 100% 일치하는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하며 내가 생각한 보고서의 목적과 방향을 충분히 고민한 다음 상사에게 들고 가 보는 겁니다.
완성본이 아니니 상사도 부담 없이 내가 생각한 방향에 대해 더 편안하게 피드백을 줄 수 있어요. 작성자 본인이 생각한 방향성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싱크로를 맞춰 나가는 것이죠.

만약 제로 드래프트 없이 3일 내내 보고서를 작성해 초안까지 완성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몇 가지 용어 변경 정도로 피드백이 끝나면 좋겠지만, 상사와의 방향성이 전혀 맞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보고서를 쓰는 이유, 꼭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 결론까지 모든 내용에서 서로 이해하는 바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는 시간은 처음과 동일하게 또 3일이 걸립니다. 보고서 하나에 최소 6일을 쓰는 거죠.
물리적인 시간만큼이나 정신적인 에너지도 꽤 쓰게 되는데요. 우선,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하는 나도 힘이 쭉 빠집니다. 왜 이런 방향으로 보고서를 쓴 것인지 자책도 하게 되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보고서를 피드백하는 사람도 꽤 힘듭니다. 내가 생각한 방향은 이게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 쓰인 보고서라고 후배에게 이야기하기는 부담스럽죠.
반면, 초기 하루 정도 깊게 보고서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깊게 고민한 제로 드래프트를 상사와 커뮤니케이션하면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루를 집중해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해보고, 상사에게 가볍게 물어보는 거죠.
전체 보고서가 아니니 피드백할 분량이 많지 않아 상사도 덜 부담스럽고 리뷰하는 시간도 짧습니다. 만약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하고 피드백 받는 시간이 1일, 그 이후 보고서 작성이 3일이라고 가정하면 4일 만에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해야 하므로 바로 PC 작업을 하는 것에 비해 작업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보고서를 완성하는 데 드는 시간은 훨씬 줄어듭니다.
가끔 보고서를 쓰다 보면, 처음 말하려는 내용은 A인데 어느새 B나 C를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길을 잃는 것이죠. 그러나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해놓으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미 내가 갈 길을 그려놓았기에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불필요한 시간을 아낄 수 있고, 보다 효율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것이죠.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상사도 결국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고, 누구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합니다. 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보고서의 컨센서스가 이뤄졌다는 것은 서로 생각하는 방향성이 같다는 것, 즉 서로 말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상사와 싱크로율을 맞춘다는 것은 넓게 보면 상사와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고서의 기획 단계부터 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방향성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실제로 그 노력을 통해 싱크로율이 점점 높아지는 경험을 상사에게 주는 거예요. 상사도 자연스럽게 '이 사람은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구나', 나아가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다른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때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이 필요할 때도 '믿을 만한' 나를 먼저 떠올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더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거나 프로젝트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고요. 커리어 확장의 기회가 오는 겁니다.
제가 속한 회사는 몇 해 전부터 인사 평가 시스템이 바뀌었습니다. 나와 업무 연관성이 높은 사람에 의한 다면 평가* 시스템을 도입한 것인데요.
* 상사가 부하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원천(자기 자신, 동료, 상사, 부하, 내부 및 외부 고객)으로부터 피평가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피드백해주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출처: LG경영연구원)
최근 기사에 따르면 다양한 관점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직속 상사의 하향 평가가 아닌 다면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회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다면 평가를 할 때도, 업무를 진행하며 나와 의사소통이 잘 되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더 높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겠죠.
여러분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이 글을 읽는 이유도 회사에서 더 인정받고, 나아가 커리어를 확장하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로 드래프트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면서 신뢰를 쌓아 보세요.
종이와 펜만 있어도 됩니다
이제, 제로 드래프트를 직접 작성해봅시다. 준비물은 간단합니다. '종이와 펜' 혹은 '태블릿 PC와 펜슬'이면 충분합니다. 제로 드래프트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요, 각각의 활용법을 정리해봤습니다.
1) 보고서의 방향성을 정리하는 제로 드래프트
방향성을 정리하는 제로 드래프트는 보고하기 전에 내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에게 빠르게 내용을 컨펌받을 때 쓰면 좋습니다. 보고서의 목적은 무엇인지(what), 왜 이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것인지(why)를 써보는 건데요. 더불어 향후 보고 일정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정리하는 것도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회의 중 활용하기
이 제로 드래프트는 회의 중에 활용하기 좋습니다. 회의 종료 후 보고서를 써야 하거나 신속한 처리가 필요할 때일수록 빛을 발합니다. 회의 중에도, 향후 보고서의 'what'과 'why', '향후 일정'을 간단하게 정리해 회의 말미에 회의 참석자들에게 공유하는 건데요.
보고서의 방향을 이렇게 잡는 데 동의하는지, 보고서 작성의 이유도 동의하는지, 합의한 향후 일정이 이와 같은지 등을 바로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회의 중에 어떻게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하고 활용하는지 보여드리려 합니다. 제품 전량 리콜이라는 경영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의 일입니다. 고객뿐만 아니라 미디어에서도 연일 주목하고 있는 이슈였던 터라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회사의 방향성에 맞게 유관 부서들이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회의 중에 빠르게 아래와 같은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해 공유했습니다. 향후 리스크 대응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을 빠르게 정리하고 공유한 덕분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향후 실행할 부분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회의 종료 후 이메일 등 추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각자 부서가 할 일이 명확하게 정해졌기에 우선순위에 따라 빠르게 업무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경영 리스크 상황에서 제로 드래프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꼭 들어가야 하는 항목
이때 작성하는 제로 드래프트에는 아래 네 가지가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 what: 회의를 통해 결정된 방향성 - 제로 드래프트의 핵심은 '방향성 일치'입니다. 각자가 생각한 방향성이 맞는지를 점검하고 생각을 일치시켜야 해요.
- why: 해당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 - 누구든 '내가 왜 이 일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 안 되니까요. 보고서를 쓰고 그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도 명분에 대한 공감이 필요합니다.
- how to: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 - 더불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지, 어떻게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인지 하우 투도 정리하고요.
- 향후 일정 - 일정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회사'에서 업무를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회사에서 하는 일 중 내가 속한 팀 안에서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적어도 두세 개의 팀과 함께해야 하거나 심지어 전사의 모든 팀과 소통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각자 주어진 업무 시간 안에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기한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로 드래프트 단계에서 일정을 명확히 공유하고, 서로의 업무 스케줄을 계속해서 챙길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럼 예시를 볼까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같은 회의를 하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실컷 회의한 결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갔는데, 유관부서에서 "내가 언제?"라고 발뺌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나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는데?"라며 다른 소리를 하는 경우도 더러 경험해 봤습니다. 서로의 다른 이해나 갈등을 맞추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다 보면 전체 작업 시간이 늘어나기 마련이었죠.
회의 후 활용하기
회사에는 참 다양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례처럼 회의 중에 방향이 정해지고, 각 부서의 R&R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회의에서는 이슈가 던져지기만 하고, 이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회의 후에 보고서를 통해 직접 제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혹은 회의 없이 바로 보고서 작성 지시가 내려오기도 하고요.
회의 후 혹은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은 뒤 자리에 돌아와 천천히 보고서의 'what', 'why' 그리고 향후 이 이슈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해결 방법을 찾고, 향후 일정을 정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이후, 상사에게 제로 드래프트를 가져가서 이 방향이 맞는지 확인하고, 만약 방향이 틀렸다면 다시 이야기하면서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겁니다.
제가 속한 경영관리팀은 각 조직의 성과를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KPI(Key Performance Indicator)라고 불리는 핵심 성과 지표를 바탕으로 연말에 조직의 한 해 성과를 평가하고, 내년에는 어떤 지표로 조직을 평가하면 될지 결정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팀장님이 "우리, 내년 KPI를 개선해볼까요? 기획안 한번 써봐요"라는 겁니다. 평소에 KPI가 문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저도 평가 방식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기획안을 쓰려니 감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분명 팀장님이 생각하는 개선 방향이 있을 텐데,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돌아와 어떻게 기획안을 구성하면 좋을지, 제로 드래프트를 써봤습니다. 내용은 간결하게 what, why, how to와 향후 일정을 담아서 아래와 같이 작성했어요.

다행히 팀장님도 제가 생각하는 'what'과 'why'에 공감했습니다. 평가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아서, 내년에는 꼭 개선하고 싶었다고 덧붙였죠. 그러면서 "how to는 정량 항목의 비중을 높이는 건 어떨까요? 지금은 정성 평가 항목이 많아서 객관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정량 항목 비중을 높이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 듯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며 제가 생각한 틀에 아이디어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2) 보고서 흐름을 그리는 제로 드래프트
보고서의 방향성을 정리하는 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보고서가 나아갈 화살표가 그려졌다면, 다음으로 보고서의 구체적인 흐름을 그려봅니다. 제 업무는 특성상 PPT(구글 프레젠테이션)를 활용한 문서 작업이 많습니다.
만약, 8~9페이지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을 작성해야 한다고 하면, 3×3 표를 그려서 보고서의 흐름을 그려 봅니다. 어떻게 보고서를 구성할지 타이틀과 도표를 손으로 그려보는 겁니다.

가장 먼저 쓰는 것은 목차입니다. 어떻게 보고서를 구성할지, 논리적인 흐름을 잡는 거죠. 그 이후에는 페이지별로 최대한 PPT로 옮기기 쉽게끔 제로 드래프트를 그리는 편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미지를 넣으면 좋겠다', '어떤 그래프로 표현하는 것이 효율적이겠다'라고 그려두기도 하고요.
제로 드래프트 단계에서는 전체적인 틀만 잡아놓습니다. 좋은 보고서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흐름 자체로 스토리텔링이 됩니다. 손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배치도 다시 해보며 고민을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배치만큼 중요한 것은 각 페이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보고를 받는 사람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페이지마다 담고 싶은 핵심 메시지 하나를 써봅니다.
앞서 이야기해 드린 '1) 보고서의 방향성을 정리하는 제로 드래프트'가 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상대와의 싱크로율을 맞추기 위한 거라면 '2) 보고서의 흐름을 정리한 제로 드래프트'는 '나'에 더 집중돼 있습니다. 결국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므로 앞으로 이 보고서를 어떻게 끌고 나가겠다는 기획을 해보는 것이죠.
흐름도를 작성하다 보면 A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 아니면 B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나은지 보고서의 논리 구조를 고민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것이 더 전략적인 배치인지도 판단할 수 있죠.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는 내가 도맡은 하나의 프로젝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끌고 나가기 위해 스스로 전략도 세워보고, 기획도 해보는 것이죠.
🚫 이런 제로 드래프트는 No!
일하는 방법에 절대적으로 나쁜 것과 100%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효율적이냐, 효율적이지 않으냐의 차이에 가깝다고 봐요. 효율적이지 못한 제로 드래프트의 활용 방식은 '너무 디테일한 제로 드래프트'와 '너무 대충 쓴 제로 드래프트'라고 생각합니다.
- 너무 디테일한 제로 드래프트의 사례는 모든 숫자가 다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PPT를 그대로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제로 드래프트죠. 제로 드래프트의 핵심 중 하나인 '시간 절약'이라는 면에서 전혀 효용을 얻지 못합니다. 굳이 찾아서 써넣기만 하면 되는 숫자를 제로 드래프트에서까지 옮겨 쓰고 있을 필요는 없죠.
- 두 번째는 너무 대충 쓴 제로 드래프트입니다. 아무리 제로 드래프트라고는 하지만, 위 예시처럼 목차, 보고서의 레이아웃, 이미지 배치 정도는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마저도 쓰이지 않은 제로 드래프트는 보고서를 쓸 때 참조할 것이 없습니다. 안 쓰는 것만 못하죠.
제로 드래프트, 직장인 판타지가 아닙니다
혹시 '이제 나도 제로 드래프트를 실천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나요? 혹은 글을 읽는 내내 호랑이 같은 상사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우리 팀장님한테 이렇게 허술한 걸 들고 갔다간 혼나기만 할 거야. 이건 직장인을 위한 판타지일 뿐이야'라고 생각하셨나요? 맞습니다. 일하는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초안을 가져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마치 민낯을 들키는 느낌과 같았달까요. 상사에게 문서를 공유할 때는 항상 모든 것이 정리된 최종본을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로 드래프트는 그 초안을 작성하기 전의 버전, 즉 초안의 초안이니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매월 CEO에게 직접 보고하는 PT를 담당한 적이 있는데, 과감하게 CEO 보고에도 제로 드래프트를 도입해봤습니다. 사실 '그래도 CEO 보고인데 너무 무성의해 보이진 않을까?' 속으로 무척이나 고민했어요. 하지만 용기를 내서 제로 드래프트 한 장만 들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CEO도 피드백을 편하게 주는 겁니다. 파란색 손글씨가 제가 실제 CEO에게 받았던 피드백입니다. 제가 작성한 제로 드래프트에 내용을 덧붙이기도 하고, 순서를 바꾸기도 하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쏟아냈습니다. CEO 입장에서도 기획 단계에서 부담 없이 본인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제 입장에서도 같은 일을 두 번 하지 않아도 되어 정말 좋더라고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핀잔을 걱정해 제로 드래프트를 작성하지 않는다면, 결국 여러분은 시간도 잃고 신뢰도 잃게 됩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사의 기대치는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한 실망도 더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끔 지나가는 이야기로 "요즘 뭐 어려운 거 없어요? 일 잘 되어 가나요?"라고 묻는 상사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손에 든 제로 드래프트를 내밀어 보세요. "제가 보고서를 이렇게 구성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요.
제로 드래프트는 직장인 판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아껴주고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시간을 지배하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바쁘다면 이거라도!
- 누구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함. 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보고서의 컨센서스가 이뤄졌다는 것은 서로 생각하는 방향성이 같다는 것, 즉 서로 말이 통한다는 뜻. 나아가 상사와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음.
- 제로 드래프트는 회의 중에 활용하기 좋음. 회의 중에 향후 보고서의 'What', 'Why', 'How to', 그리고 '향후 일정'을 간단하게 정리해 회의 말미에 회의 참석자들에게 공유하는 것.
- 보고서의 흐름을 정리한 제로 드래프트'는 보고서를 어떻게 끌고 나가겠다는 기획임. 흐름도를 작성하다 보면 보고서의 논리 구조와 전략적인 배치를 고민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