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생존 훈련법
Curator's Comment
여러분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획자의 독서> 저자이자 네이버 브랜드 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김도영 님은 자신에게 책이 '생존 수영'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에서 모든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 '이 망망대해에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떠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독서 부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누군가에게는 책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잘하는 법을 배운다'는 저자의 말, 그리고 그 배움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책에서 우리 역시 또 하나의 일하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 <기획자의 독서> 중에서, 기획자가 책에서 더 적극적으로 인풋을 얻는 방법이 잘 드러난 내용 위주로 큐레이션했습니다. 단순히 책을 읽는 방법을 넘어 기획자로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하는 방식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 아티클이 여러분만의 '생존 훈련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저자 김도영
현재 네이버에서 브랜드 경험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광고, 콘텐츠, 서비스 마케팅 등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지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만드는 '기획자'로 불리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다. 기획을 잘하고 싶어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해진 영역도, 명확한 커리어 패스도, 검증된 스킬도 없는 기획자에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이 책이었기 때문이다. 기획하는 사람의 눈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그렇게 모인 생각의 조각들을 기획자로서의 본업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생각이 흐르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21년 7월에 발간된 <기획자의 독서>의 본문 내용을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펌프에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물을 주입해야 합니다. 내부에 차 있는 공기를 빼고 물이 제대로 돌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함이죠. 이것을 '마중물'이라고 부릅니다(이름도 참 이쁘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우리말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일을 할 때 이 '마중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영감이나 자극을 얻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인 것 같아요. 꼭 뭔가 번뜩이는 걸 얻으려 하기보다는 실제 마중물이 하는 역할처럼 머릿속의 쓸모없는 것들을 걷어내고 새로운 생각이 잘 흐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죠.
사람은 각자의 마중물이 있습니다. 좋은 레퍼런스가 될 만한 이미지나 영상을 마중물로 쓰는 사람이 있고, 아예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방문해 스스로를 워밍업시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모두 저마다의 인풋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마중물은 텍스트입니다. 메마른 머릿속에 글을 한 바가지 부어넣으면 꽤 커다란 동력을 가져다주거든요. 물론 이미지나 영상 같은 다양한 마중물을 안 써본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써야 할 때는 또 언제든 환영이고요.
그런데 저는 아무런 밑천(?)이 없는 상태에서 구체화된 시각 자료와 맞닥뜨리면 그 잔상이 꽤 진하게, 또 오래 남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뺏긴 채 뭔가 하나라도 빨리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적어도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선 스스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충분히 생각하고 싶은데 말이죠.
그런 제게 글은 좋은 매개체이고, 책은 훌륭한 마중물입니다. 그렇다고 늘 책을 통해 배경지식만 쌓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관심 가는 분야의 책을 골라 목차나 구성 등을 살피고 그 '짜임'을 보는 편입니다. 혹은 이 책이 어떤 기획을 통해 탄생했을지 상상해보기도 하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어떤 글을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편집자는 어떻게 엮어내려 했고, 출판사는 어떻게 팔려고 했을까. 이 책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졌을까. 어떤 책과 비슷하고 또 어떤 책과 다를까.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왜 열광했을까. 왜 논란이 생겼을까. 왜 주목받지 못했을까.
책 한 권을 두고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의 완성된 기획서를 본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실제와 다를 가능성이 더 크겠죠.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준비'니까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기획할 마중물을 붓는 겁니다.
책 제목을 모으는 이유
제가 처음부터 책 제목을 눈여겨본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어릴 때는 책도 많이 읽지 않았을뿐더러 지루하고 뻔해 보이는 책 제목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대부분이 명사 한 단어로 끝나는 것들이었고 '~에 대하여'처럼 학술적인 이름들도 흔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목에 큰 힘을 주지는 않던 시절이었죠.
전환의 계기는 대학교 때 들었던 사회학과 수업이었는데요. 처음에 강의 계획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매주 진행될 수업의 주제가 모두 한 단어로만 작성되어 있었거든요. '1~2주 차: 존재 / 2~3주 차: 관계 / 3~4주 차: 사회 / 5~6주 차: 규칙' 이런 식이었던 거죠. '대체 저 단어들만 가지고 무슨 수업을 한다는 거지?' 수강신청을 취소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냥 듣기로 했습니다.
수업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2주간 수업을 진행하는데, 교수님이 칠판에 그날의 주제어만 큼직하게 써놓고 나머지는 학생들과의 자유토론을 통해 이끌어갔거든요. 한국인의 DNA 특성상 처음엔 그 누구도 먼저 발언하지 않고 눈치만 보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서로 말을 가로막는 수준의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죠.
하지만 재미에 비례해 불안함도 조금씩 커졌습니다. 다음 수업 때도 분명 열띤 이야기가 오고 갈 텐데,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라도 있어야 주장을 하고, 대충 냄새라도 맡아봤어야 근거를 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날부터 열심히 도서관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존재', '관계' 같은 단어처럼 살면서 크게 고민해 본 적 없는 대전제를 가지고 그에 맞는 책들을 탐색하기 시작했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대체 '존재'를 무엇이라 이야기하고 있는지,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을 통해 '인간'을 말하고 싶었는지 '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워딩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어가며 책을 찾았습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안에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최대한 제목발 잘 받는 책들을 골랐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를 통해 현대사회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문명의 재건이었는지 모릅니다"와 같은 멘트가 난무하는 강의실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짧지만 강렬한 한 학기가 끝나자 찾아만 놓고 읽지 못한 책들이 이내 아쉬웠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살면서 한 번쯤은 읽을 수도 있으니 제목이라도 정리해보자 싶더라고요. 주제별로 주욱 정리해놓은 책 리스트를 훑어보니 놀랍게도 흐트러져 있던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거대한 담론 아래 사람들이 각자 어떤 시각으로 그 문제에 다가가는지가 보이더라고요.
저는 그때 책의 제목이 주는 힘을 느꼈습니다. 제목만으로도 글쓴이의 생각에 다가갈 수 있고, 제목과 제목을 이으며 새로운 책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 후로는 한글판뿐 아니라 원서의 제목도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고 책에 쓰인 부제도 가능하면 기억해두고자 합니다.
책 제목을 하나 둘 모으는 저의 취미는 좋은 시대를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습니다.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책 제목들이 언젠가부터 굉장히 길고 구체화되는 트렌드를 보인 것이죠.
저는 이런 트렌드가 재미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그 주제의식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속 시원하더라고요. 예전의 책 제목들이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형태로 지어졌다면 지금은 한 줄 문장으로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하게 느껴지거든요. 특히 이러한 분위기는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낼 줄 아는 밀레니얼과 Z세대의 공감에 힘입어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중 정문정 작가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과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는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어요. 자주적이고 씩씩한 자세로 살되, 외부로부터 오는 비상식적인 공격들에는 냉정해지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반향은 컸습니다. 학교든 직장이든 심지어 가정에서든 예절과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묵인되어온 수많은 꼰대 문화들에 시원한 한 방을 날렸거든요. 저는 그중에 제목의 역할도 무척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절반은 끝낸 느낌이었으니까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역시 에세이 트렌드에 큰 영향을 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책은 가벼운 우울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기분부전장애'를 가진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와 나눈 이야기를 엮은 작품입니다. 중증 우울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지도 않은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