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 미디어에서 뉴 미디어로의 변화

'Cord-Cutting'. 말 그대로 코드를 끊어버린다는 뜻이다. 최근 미국 내 미디어 소비 트렌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 단어다.

 

2019년 말까지 전체 미국 가구 수 중 전통적인 콘텐츠 소비 방식을 상징하는 '케이블'을 TV에 연결하지 않은 가구가 34%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스마트 TV, 크롬캐스트와 같은 디바이스가 만들어지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한 덕분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8년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 출처: Cord Cutting Will Accelerate in 2019, Skinny Bundles Poised to Fail(Variety, 2019.4.22)

** 관련 기사: Cord-cutting has grown by 48 percent in 8 years, according to Nielsen(Digital Trends, 2019.1.16)

 

미디어 소비 패턴 변화는 전통 미디어 기업의 전략마저 바꿨다. HBO, 디즈니 등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스트리밍 업계에 직접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넷플릭스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빠르게 성장 중인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Hulu)의 탄생 과정을 통해 레거시 미디어 기업의 전략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레거시 미디어를 대표하는 뉴스코프(News Corp), NBC 유니버설, 디즈니 등의 합작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훌루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디즈니가 '21세기폭스'를 인수하면서 훌루 서비스의 최대 주주가 됐다.

 

그렇다면 레거시 미디어 기업에서 리더로 일해온 여성들은 이런 트렌드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CBS와 비아컴(Viacom)을 오랜 기간 이끌어 온 샤리 레드스톤(Shari Redstone)은 미디어 기업 간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과거에는 개별 미디어 기업들이 더 많은 시청률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면, 지금은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경쟁과 협업을 동시에 해야 하는 관계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앞서 이야기한 훌루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디즈니는 훌루의 최대 주주이지만, 동시에 훌루는 디즈니에서 곧 론칭할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의 경쟁사이기도 하다. 최근 AT&T의 워너미디어 (WarnerMedia)는 스트리밍 사업을 위해 전통적 경쟁사인 NBC 유니버설과의 협업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기존 미디어에게 넷플릭스, 유튜브, 페이스북 등이 경쟁사냐는 질문에 샤리는 "그들은 경쟁사이면서 CBS와 비아컴의 고객이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 관련 기사: Consumers, Traditional Media Navigate A Changing OTT Landscape(MediaPost, 2018.11.14)

달라지는 미디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업을 통해 공존해야 한다

레거시 미디어 기업에는 미디어 채널 운영 외에도 여러 사업 분야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방송물 제작이다. 과거에는 방송물을 제작해 자사 채널로 직접 내보내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더 많은 유저들에게 방송물을 노출하기 위해 다른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으로 유통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CBS에서 제작하는 방송물의 25% 정도가 자사가 아닌 다른 플랫폼에 유통되고 있다.*

* 관련 기사: Why CBS, Viacom and others are open to making shows for streaming and TV rivals(DIGIDAY UK, 2019.5.29)

 

샤리는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과 레거시 미디어 기업이 공존해야만 하는 시대적 변화를 강조하면서 "유저들이 모두 디지털 플랫폼으로 몰리는 것은 막되, 그 채널로 우리의 제작물도 유통할 수 있도록 미디어 산업 전체를 키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사 샤리 레드스톤이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종현

생태계 변화가 만든 콘텐츠 제작 트렌드

콘텐츠 제작 트렌드 또한 달라지고 있다. 미국 대표 음악 채널인 MTV 네트워크의 전 CEO 주디 맥그라스(Judy McGrath)는 넷플릭스가 불러온 맞춤 콘텐츠 제작 트렌드에 대해 언급했다.

 

레거시 미디어 채널에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콘텐츠 한두 가지에 집중해 좀 더 많은 시청자를 공략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었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 큰 인기를 끌었던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가 그 예다. 성별과 나이는 물론, 인종과 집안 배경이 다양한 참가자들을 통해 되도록 많은 시청자를 아우르고자 했다.

 

한편 넷플릭스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선보인다. 다양한 사용자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개성 강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 유통한다. 놀라운 점은 틈새 사용자를 공략한 콘텐츠조차도 전 세계를 커버하는 넷플릭스의 사용자 풀을 통해 충분히 소비된다는 것이다.

모든 게임에 참가하며 당신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한다.
(Playing every game and owning every moment in your life.)

주디 맥그라스가 설명하는 넷플릭스의 특징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는 장르의 가짓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덕분에 사용자들의 모든 순간에 꼭 맞는 콘텐츠를 제공하며 업계의 기준을 새로 쓰고 있다.

 

바뀐 건 제작 방식만이 아니다. HBO에서 글로벌 배급을 이끌었던 버니 알레시아(Bernadette Aulestia)는 "성공적인 콘텐츠를 평가하는 기준 또한 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거시 미디어의 경우 콘텐츠 소비층이 모이고 반응을 얻을 때까지 짧게는 몇 개월에서 최대 1년까지 지켜봤지만, 지금은 하룻밤이면 성공 여부가 결정 난다는 것.

주디와 버니, 제시카 옐린이 패널로 참여한 테크와 미디어 세션 ⓒ김종현버니는 "업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며 "제작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최대한 빠르게 연속적으로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어야 하는 최근의 트렌드가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테크 기업의 미디어 사업 진출도 눈에 띄는 변화다. 구글의 유튜브, 아마존의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애플 TV+ 등은 콘텐츠 제작·유통에까지 확장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에 NBC 유니버설에서 디지털 전략을 이끌다 유튜브 TV 글로벌 파트너십 리더로 자리를 옮긴 로리 콘클링(Lori Conkling), A&E 네트워크 CEO에서 바이스 미디어(Vice Media) CEO로 이동한 낸시 두북(Nancy Dubuc)이 발언했다.

 

로리와 낸시는 "왜 테크 기업으로 옮기게 되었냐"는 질문에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테크 기업들의 방향성에 공감했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로리는 "디지털 기반 기업들은 기존 미디어 업계를 고치려 애쓰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한다. 기존 전통 미디어 기업들이 해온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찾으려는 시도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낸시 또한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이 광고와 구독료로 수익화를 이어가는 가운데, 디지털 기반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콘텐츠 수익 모델이나 제작 스튜디오 수익화 등 기회가 넓어진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답했다.

 

테크 기업과 전통 미디어 기업의 미래 경쟁도 주목할 만한 이슈다. 로리는 "구독료 수준이나 콘텐츠의 질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비슷한 수준으로 모아지기 마련이라, 플랫폼 자체가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단순한 시청이 아닌, 넷플릭스의 인터랙티브 콘텐츠 같은 획기적인 기능이 미디어 플랫폼의 성공 요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 관련 기사: 'Black Mirror' Interactive Film: Inside the 2-Year Journey of 'Bandersnatch'(Hollywood reporter, 2018.12.28)

레거시 미디어가 외면했던 사용자에게 다가가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콘텐츠의 다양성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레거시 미디어 채널에서 소외됐던 사용자들을 타깃으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CNN 백악관 출입 기자였던 제시카 옐린(Jessica Yellin)은 예전부터 전통적인 뉴스 전달 방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뉴스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을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뉴스는 그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 정치권의 권력 다툼, 과격한 표현 등 특정 진영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한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제시카는 여성들이 원하는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으로 옮겨, 이야기 기반의 정보를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플랫폼은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이었다.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15만 명 정도의 팔로워를 보유한 그는 'News Not Noise' (소음이 아닌 뉴스) 콘텐츠를 업로드하고 있다. 여성 유권자를 위한 정확한 정보, 정보에 기반한 투표 독려가 목표다. 자극적인 헤드라인도 없다.

제시카 옐린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포스팅을 통해 뉴스를 전달하고 있다. ⓒ제시카 옐린 인스타그램세계적인 잡지사 허스트(Hearst)의 콘텐츠 부문 리더였던 조안나 콜스(Joanna Coles)도 유사한 의견을 밝혔다.

디지털 미디어의 역할은 '다양한 정보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뉴스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정치적 힘을 가진 일부 그룹에 의해 조종돼 왔지만, 이제는 디지털 플랫폼들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표출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전 구글 리더 앤디 루빈(Andy Rubin)의 회사 내 성추행 사건도 디지털 기반 미디어 '더 인포메이션'에서 처음 보도됐다.*

* 관련 기사: How Google Protected Andy Rubin, the 'Father of Android'(The New York Times, 2018.10.25)

 

디지털 플랫폼이 강력한 이유는 또 있다. 보도 후에도 댓글 등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열려 있다. 그 반응 또한 실시간으로 확산되어 이야기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미투 운동이 단적인 예다. 몇 가지 고발 이후, 해시태그를 사용해 여성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슈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유명 인사들의 과거 행동이 온 천하에 알려졌다.

소형 디지털 미디어들의 역할과 미래

중소형 디지털 서비스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스포츠 경기 스트리밍 중심의 푸보 TV(Fubo TV), 레슬링 경기 스트리밍 전문 파이트 TV(Fite TV), 넷플릭스 유사 서비스인 투비(Tubi), 플루토(Pluto) 등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비아컴이 대표적인 소형 스트리밍 서비스인 플루토를 $340M에 인수하는 등 소형 미디어들과 전통 미디어의 합병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 관련 기사: Viacom Has Acquired Pluto TV Streaming Service for $340 Million(Variety, 2019.1.22)

ⓒShutterstock그렇다면 테크 회사들의 미디어 진출과 경쟁하기 위해 레거시 미디어와 신진 중소 미디어는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는 것이 좋을까. 조안나는 "억지로 몸집을 불려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테크 미디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적은 수라도 틈새의 충성 고객을 모으는 편이 콘텐츠 수익화와 광고 수익에 더 유리하다"라고 답했다.

 

주디는 본인이 소형 디지털 미디어를 창업할 때 대기업인 소니(Sony)와 협업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소니와의 협업 덕분에 회사의 규모를 빠르게 키울 수는 있었지만, 몸집 차이가 나다 보니 나서서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타깃 고객층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고려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관련 기사: Former MTV Networks CEO Judy McGrath, Sony Music Form Joint Venture(Hollywood Reporter, 2013.6.26)

 

늘 그랬듯 미디어 생태계는 지금도 시끄럽다. 레거시 미디어, 테크 기업, 소형 미디어 네트워크들이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파트너로서 부딪치며 진화하고 있다. 이 변화를 쭉 지켜봤고, 현재 그 중심에 서 있는 여성 리더들의 인사이트를 통해 미디어 생태계의 오늘과 내일을 그려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