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 현상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적절한 기간(Time Frame)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

 

최근 2-3년 간의 동향(Trend)이 과거 10년 간의 흐름과 다르다면, 최근의 현상이 이례적이다. 그러나, 과거 10년 간의 흐름이 과거 50년과 다르다면, 그 10년이 이례적인 것이 되고, 최근 2-3년은 정상으로 회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동향은 무엇이고, 이례적인 것은 무엇인가?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우리가 설정해야 할 기간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

최근 몇 년 동안 조선·해운업계의 동향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리고 결국 오늘 오전(8/31), 한진해운이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거래소는 대우조선해양의 상장 폐지 여부를 다음 달 29일까지 결정한다고 공시(8/29) 했습니다.

이번에는 10년 차 주식 펀드매니저 강대권 님의 글을 전합니다. 우리가 나날이 접하는 뉴스만으로는 쉽게 알 수 없는,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1930년대와 현재의 금융정책을 비교한 글입니다.

현재 한국 조선업의 '이례적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강대권 님과 이상우 님이 진행 중인 'Big Picture: 한국 조선업 40년 역사로 읽는 글로벌 경제' 프로젝트는 오는 9월 6일에 마감됩니다.
- PUBLY

버냉키의 헬리콥터 머니와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

벤 버냉키의 헬리콥터 머니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가진 벤 버냉키(Ben Bernanke) 전 연준의장(이하 버냉키)이 지난주(2016년 7월 셋째 주) 일본을 다녀갔다.

 

참의원 선거* 압승 후 리더십을 확고히 한 일본의 아베 총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개헌을 통해 "군대를 보유하는 보통국가"로의 전환을 주창하고 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공격적인 경기부양 정책의 확대를 제시하고 있다.
* 참의원 선거: 일본에서 치러지는 선거 중 하나로 일본 국회의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을 뽑는 선거이다. 6년 임기의 참의원 의원을 3년에 한 번씩 뽑는다. - PUBLY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버냉키와 아베 수상의 면담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아베의 새로운 부양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에 앞서 국내 여론을 잡아가기 위한 일본 내각의 연출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버냉키의 방일 기간 동안 일본 경제정책에서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방일 일정 중 혼다 에츠로와 버냉키 간의 회담에서 '영구채* 발행'이 언급된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다. 확장적 통화정책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할 수 있음을 신호하기 때문이다.
* 영구채(Consol Bond, Perpetual Bond); 만기가 정해져 있지 않는 자본증권. 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을 띠는 신종자본증권(하이브리드채권)으로 분류된다. - PUBLY

혼다 에츠로와 버냉키 간의 회담에서 언급된 '영구채 발행' © Bloomberg

혼다 에츠로는 이번 버냉키의 방일과 아베 수상과의 면담을 직접적으로 중재한 인물이다. 따라서, 버냉키와 혼다 에츠로 간의 대화는 사실상 이번 방일 일정의 메인 테마이고, 그 내용이 바로 영구채 발행이라고 할 수 있다.

 

버냉키는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제로금리 시대에 중앙은행이 시행할 수 있는 3가지 정책'이라는 포스팅을 시리즈로 게재했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역할은 경기에 따라 기준금리를 조절하는 것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이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기준금리가 '제로'에 도달했다.

 

이론적으로 금리는 0 이하일 수 없으니 제로금리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더 이상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쓸 수 없게 된다.

 

미국 연준이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금리를 올리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는 이런 교착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향후 발생할 경기침체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버냉키가 제시한 대안은 이렇다.

1. 마이너스 기준금리의 적용
2. 포워드 가이던스*와 추가 양적완화를 통한 장기금리 조작
3. 마지막으로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서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은 통화정책의 실험에 있어서도 최첨단에 있다. 일본은 버냉키가 제시한 3가지 대안 중 이미 2가지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의 금리는 이미 마이너스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고, 채권시장의 거래량 대부분을 중앙은행이 직접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적완화 규모의 확대까지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게 남은 선택은 사실상 마지막 대안인 헬리콥터 머니 하나뿐이고 이번 버냉키의 방일 중 언급된 영구채 발행은 헬리콥터 머니의 실무적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 (국제금융시장에서) 중앙은행의 미래 정책 방향을 외부에 알리는 조치를 뜻한다. - PUBLY

 

헬리콥터 머니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돈을 뿌린다는 의미다.

 

금리를 내리고 채권 가격을 조작해도 경제 주체들이 소비를 확대하지 않을 경우 직접적으로 돈을 살포하여 소비 여력을 늘려주는 정책을 의미한다. 이런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광범위한 소비자에게
지원금을 '무상'으로 제공

광범위한 소비자에게 지원금이 제공되어야 하며, 이 지원금은 만기상환이나 이자가 없는 그야말로 '무상' 자금 지원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지원을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재정확대뿐이다. 감세를 시행하고, 각종 지원금을 확대하고, 정부가 직접 사업을 벌여 고용과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이런 재정확대가 제한되었다. 일본과 유럽 등 재정확대가 시급한 국가의 국채 부채비율이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이라 추가적인 재정적자의 확대가 국가 신용의 문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영구채 발행은 이런 상황에 대한 해결 방안이다. 정부가 만기가 없는 영구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중앙은행이 직접 인수하는 것이 이번에 언급된 영구채 발행의 골자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원금상환 부담 없이 재정지출을 늘릴 수 있고 중앙은행이 낮은 가격에서 채권을 발행 즉시 사줄 것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결정되는 신용등급에 대한 부담도 없어지게 된다.

 

대신,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어떠한 형태로든 가계에 직접적 보조금을 준다는 측면에서 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을 원천적으로 무시하며, 그 파급효과를 측량하기 어려운 매우 급진적인 통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 발권력; 은행권, 공채권 따위를 발행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 PUBLY

사실, 일본은
이러한 형태의
급진적 통화정책을
이미 시행해본 경험이 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1913년부터 1936년까지 무려 23년간 일본의 대장상(우리나라로 치면 경제부총리)을 역임한, 2차 대전 이전 일본의 경제체제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겠지만, 내가 이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1930년대 고레키요가 '국채 직매입'이라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국채 직매입이라는 정책이 바로,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실제로 시행된' 헬리콥터 머니 통화정책이다.
*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 是清, 1854 - 1936); 일본의 정치가로, 입헌 정우회 총재와 제2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 PUBLY

 

1930년 전후 일본은 전 세계 대공황과 운명을 함께해 극심한 불경기를 맞았다. 일본 내에서는 이 시기를 '쇼와 공황'이라 부르는데, 당시 총리이자 대장상이었던 고레키요는 공황 극복을 위해 일본 정부의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하게 함으로써 거의 무한대의 재정확대를 가능케하는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파격적인 정책을 수행한다.

 

이 정책은 당시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1930년대 산업국가 중 일본이 가장 빠르게 공황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버냉키는 연준 의장이 되기 훨씬 전인 2003년에 이미 연준 연설에서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을 언급하면서 '중앙은행 역사상 매우 성공적인 통화정책'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파격적인 정책이
성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도한 재정확대는 1930년대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고 군비 확대로 연결돼 일본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화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고레키요는 군사비를 중심으로 재정지출을 통제하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다시 경기가 하강하고 무엇보다 위상이 강화된 군인들로부터 직접적인 반감을 사게 되면서, 끝내 고레키요 자신이 1936년 젊은 군인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이후 역사는 알다시피, 군인들에 의해 장악된 일본 정부에 대본영이 설치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오점으로 연결된다.

 

버냉키 이전까지 국채 직매입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되며,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재정확대를 지원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1982년 발간된 일본은행의 정책백서에서도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을 '중앙은행 100년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구채 발행은 발행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채권 직접 매입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1930년대 국채 직매입과 완전히 같은 정책이다.

영구채 발행은
1930년대 국채 직매입과
완전히 같은 정책

일본은 이 논란 많은 정책을 실제로 시행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겹도록 봐온 양적완화 정책도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는 것이니, 헬리콥터 머니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적완화가 채권시장을 통해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고 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이 시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채를 매입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양적완화는 재정확대 지원이 아니라 국채의 시장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전반적인 자산가격을 부양하고 경제주체들의 투자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양적완화는 궁극적으로 시한부이거나 장기화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1. 금융시장을 통한 자산가격 조작이 필연적으로 양극화로 연결되고
2.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자산을 소유하지 않은 근로자의 생활비 부담으로 연결되어 소비의 구축효과*가 발생하고
3. 높은 자산가격이 금융시장의 내재적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4. 구조조정을 지연시켜 공급과잉을 만성화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양적완화의 화끈한 효과를 경험했지만 정책을 시행한 지 3년째에도 여전히 디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은 양적완화의 긍정적인 측면은 물론 그 한계와 부작용까지도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어떻게든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이번 참의원 선거로 아베는 미지의 대안에 대한 구체적 추진력을 얻었다.
*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 정부의 재정적자 또는 지출 확대로 이자율이 상승하여 민간소비와 기업의 투자위축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 PUBLY

버냉키가 올린 '제로금리 시대에 중앙은행이 시행할 수 있는 3가지 정책'이라는 포스팅 © Brookings

여기서부터는 사적인 상상이다.

 

아베 정권은 중앙은행 채권 직매입을 통한 재정 확대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이 이 정책에 발을 들이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런 유사한 재정확대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0년 전만 해도 들어본 적도 없던 양적완화가 이제는 일반화된 통화정책이 된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 브렉시트, 프랑스 테러, 터키 쿠데타 등 저성장 장기화와 양적완화 부작용으로 인한 사회의 긴장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며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이러한 긴장과 구체화되는 갈등의 해결을 요구받는 정치세력들에게 발권력을 동원한 재정확장은 보호무역과 고립주의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테마이다.

 

브렉시트(2016.6.23)로 동반 폭락했던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은 이틀도 채 안가 수습되고, 이제는 상당수의 자산가격이 오히려 브렉시트 이전 수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올라가 있다.

최근 3개월 간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일간). 브렉시트(6/23)와 일본은행의 추가완화 결정(7/29)을 기점으로 엔화가 큰 폭으로 움직였다. © Investing

금융시장이 빠른 회복을 넘어 더 가파른 상승세를 구가하고 있는 이유는 브렉시트가 계기가 돼 미국의 금리인상이 물 건너 감은 물론, 이전보다 더 확대된 경기부양책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러한 시장의 기대감을 배신할 수 없다. 배신은 시장의 혼란과 침체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기존 정책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시장의 기대감을 오래 끌고 갈 수도 없다. 배신의 의도는 전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장은 왠지 모를 기분 나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의 모든 국가의 정책 초점은 '파격적인 재정확장'으로 기울어 갈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

 

마지막으로, 헬리콥터 머니는 궁극의 정책대안일까?

 

그렇지 않다. 양적완화가 그랬듯이 헬리콥터 머니 역시 시행되는 중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임시방편이지 장기적인 경제체력을 회복시키는 궁극의 대안은 아니다.


1930년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자기가 시행한 정책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다가 암살당했다. 헬리콥터 머니를 일단 시행하고 나면 그 이후 정책을 축소하거나 중단할 때 엄청난 충격을 실물과 금융 양면에 주게 된다.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 체력이 회복되길 기대하는 것이 정책 시행의 근거이고 희망이지만, 그 불확실성은 가늠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세계는 또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6. 7. 18)

본 글은 강대권 님이 2016년 7월 18일에 작성한 '벤 버냉키의 헬리콥터 머니와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재편집했습니다.

 

[Big Picture: 한국 조선업 40년 역사로 읽는 글로벌 경제]
10년차 주식펀드매니저 강대권님과 대우조선해양 출신의 애널리스트 이상우님이 한국 조선업과 거시경제를 이야기합니다.
오는 9/7(수) 저녁의 발표와 지적 대화에 참여하실 분을 모십니다.

프로젝트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