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하우스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5년 10월에 발간된 <인사이드 현대카드>의 본문 내용을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발췌하여 재구성했습니다.
- 본문 속 현대카드 직원들의 직함은 책 출간 당시 직함입니다.

한도나 혜택과 상관없이 가장 현대카드스러운 카드는 퍼플(Purple)이라고 생각한다. 컬러, 이미지, 디자인, 마케팅 기법, 네이밍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현대카드의 수준을 명징하게 반영하고 있다.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특히 파리와 밀라노에서 미감이 발달한 숍캐셔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퍼플카드는 재질과 색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카드임에 분명하다. 그런 퍼플카드의 이미지는 고스란히 퍼플카드 멤버십 전용 공간인 퍼플하우스로 이어진다.

 

사실 퍼플하우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있다는데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도통 그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의외의 장소에 입구가 있을 뿐 아니라 일부러(!) 눈에 띄는 간판도 설치하지 않았다.

퍼플하우스 입구 ⓒ현대카드내친김에 퍼플하우스를 구석구석 둘러보기로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오덕'과는 차별되는 좋은 취향을 가진 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물찾기' 같은 느낌이었다. 커다란 호른과 압도적인 진공관의 배열이 돋보이는 웨스턴일렉트릭(Western Electric)의 앰프와 스피커는 단연 이곳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스타워즈>의 알투디투(R2-D2)를 연상케 하는 크롬 소재의 벨에포크 커피메이커 또한 공간의 품격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전설적인 소품 몇 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프랑크 부흐발트(Frank Buchwald)가 수작업으로 조립해 만든 머신라이트, 세계에 단 열두 개의 모델만 존재한다는 한정판 시리즈 중 여섯번째 작품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애플식 '심플디자인'의 경전과도 같은 디터 람스의 T1000 라디오도 분명 어딘가에….

 

보물찾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분명 한구석에 보일 듯 말 듯 배치되어 있는 이 엄청난 소품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을 테지만, 일반 고객들이 이것들을 제대로 보고나 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지금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의자가 무엇인지는 알까?

보일 듯 말 듯 배치된 엄청난 소품들 ⓒ현대카드심지어 아티스트 이명호의 <Treescapes>가 벽에 걸린 게 아니라 의자 옆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걸 보고선 의구심은 더 강해졌다. 오브제를 조화롭게 배치한 게 아니라 마치 자랑하듯 꽉꽉 채워놓은 것 같았다.

 

관계자에게 확인해보니 퍼플하우스를 설계한 네덜란드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스타트(Staat)는 이미 명확한 답을 제출한 상태였다. 퍼플'하우스'이긴 하지만 '집(home)'을 생각하고 컨셉을 잡았다는 이야기.

 

바와 레스토랑이기 이전에 집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거실과 부엌의 세련된 일상용품들을 자연스럽게 (때론 자랑하듯이)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것. 아하, 딴건 몰라도 명확한 컨셉을 잡는 능력과 그걸 클라이언트에게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능력만큼은 탁월한 에이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 프리미엄 카드 고객 전용 공간이었던 퍼플하우스는 2017년 12월 말로 서비스를 종료했다.

디자인라이브러리

전설적인 이탈리아 디자인잡지 <도무스(Domus)>에서 시작해 <레뷔(Revue)>까지 이어지는 디자인라이브러리의 장서 리스트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매거진을 만드는 세상 모든 에디터들의 꿈이자 로망인 <비저네어(Visionaire)> 역대 판본들을 첫번째 전시 프로그램으로 택한 그 세련된 취향에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 관련 기사: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는 곳: 디자인 라이브러리 (한겨레, 2013.3.13)

 

* 2013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운영의 담당자가 신입사원이라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그녀는 모마(MoMa) 인턴과정을 마치자마자 현대카드의 부름을 받고 입사한 신참이었다. 6개월 전 인터뷰를 했을 당시 TFT에 속해 있던 그녀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긴 회사가 참 놀랍다"는 멘트 외에 구체적인 내용은 이야기해주지 않았었다.

트래블라이브러리

드디어 트래블라이브러리가 개관했다. 볕은 따갑지만 여전히 바람은 선선한, 딱 여행에 맞춤한 여름 초입과 맞물려 현대카드의 야심작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현대카드의 지난 10년이 레이디 가가, 빌리 조엘 등의 공연과 전시, 독창적인 이벤트 등으로 구성된 컬처프로젝트로 대표된다면, 앞으로의 10년은 디자인과 여행에 이어 음악과 음식으로까지 이어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대카드의 야심작, 트래블라이브러리 ⓒ현대카드트래블라이브러리의 내부 공간은 사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서 보통 1층 공간에서 20~30분 정도 대기하다가 2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사실 트래블라이브러리의 진정한 가치는 수준 높은 인테리어나 시설에만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1만 4761권에 달하는 컬렉션의 방대함*과 <가디언> 여행 칼럼니스트 케빈 러비 등 세 명의 유명 큐레이터가 각 2000권씩 장서를 골랐다는 전문성보다도 더 주목할 부분이 있다.

* 사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셔널지오그래픽> 전질을 갖췄다는 실무진의 자랑이 이번에는 왠지 어색해 보였다. 희귀 장서를 모은다는 컨셉은 디자인라이브러리 당시까지는 적합해 보였지만 트래블파트에 이르러서는 조금 애매한 느낌이다. 장서의 규모나 희귀성에 집착하는 것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재해석한다는 컨셉과도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여행'이라는 테마를 목적지 중심이 아니라 아트, 아키텍처, 모험을 위한 여행 등 '영감을 얻기 위한 지적 활동'으로 규정했다는 신선한 발상이다. <타임>의 트래블앤드레저 에디터인 캐롤리나 미란다의 다음과 같은 추천사가 바로 트래블라이브러리만의 남다른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저 라이브러리를 어슬렁거리다, 책 더미 속에서 길을 잃고 아무 책이나 하나 집어들어라. 아마 이런 식이 아니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책과 장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좋은 라이브러리에는 놀라운 발견이 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여행은 모든 감각의 스위치를 켜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경험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영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트래블라이브러리의 가장 핵심적인 컨셉이며, 그 덕분에 여행이라는 테마를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확대해 정의하는 색다른 시각이 가능했던 것이다.

내부는 2층으로 나눠져 있다. ⓒ현대카드여행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컨셉도, 내부 공간의 세세한 디테일도 참 좋았지만 아쉬운 점 또한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먼저 위치 선정의 문제.

 

소개 책자에는 "소비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숨가쁜 변화의 한복판, 청담동이라는 공간에 '여행'을 테마로 한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내겐 잘 와닿지 않았다. 지역, 더 나아가 서울이라는 공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건너뛴 채 규모가 큰 팝업스토어의 컨셉에 가깝게 트래블라이브러리를 바라본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설핏 들었다.

 

트래블라이브러리 오프닝 이후 일부 현대카드의 임직원들이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고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은 '여행'이라는 폭발력이 강한 테마를 우리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콘텐츠로 여겼다기보다는, 하나의 이벤트적 계기로 바라본 측면이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사실 '여행'이라는 테마가 우리 사회에서 화제의 중심에 올라 있는 이유는 학교, 직장 가릴 것 없이 강압이 일상화된 억압적인 사회구조와 나날이 창의성이 질식되어가는 후진 사회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젊은 층의 욕망이 그 배후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세계 여행자들의 경전인 <론리플래닛>이 서울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다시금 되짚어본다면, 당시 <론리플래닛> 편집장은 1년간 홈페이지에서 진행한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도시' 투표 결과 미국의 디트로이트, 가나의 아크라에 이어 서울이 3위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부드럽고 느긋한 아시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서울을 지나쳐도 좋다. 홍보 영상에서 보았던 부드러운 탈춤, 색색의 한복은 이곳 서울에 없다."

 

덧붙여 10년째 서울에 거주하며 아시아 각국을 여행해왔다는 <론리플래닛> 기자 네이트 하이의 말은 카운터펀치라 할 만했다. "형편없이 반복적으로 뻗은 도로들과 구소련식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들. 심각한 환경오염 속에는 어떤 마음도, 영혼도 없다. 숨막힐 정도로 특징이 없는 이곳은 사람들을 알코올중독자로 몰아가고 있다."

 트래블라이브러리 ⓒ현대카드나는 현대카드만의 남다른 열정으로 창조되고 있는 라이브러리들이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서울이라는 척박한 공간을 근원부터 바꿔놓기를 희망한다. 지금의 라이브러리들이 일회적인 팝업스토어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들과의 연관성, 무수한 사람들과의 교류 가능성 등을 더 세심히 고려해 서울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영구한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뉴욕에는 브루클린, 런던에는 쇼디치, 베를린에는 이스트 지구가 있는 것처럼 향후 10년간 현대카드가 엄밀한 컨셉에 맞춰 세워나가는 새로운 공간(또는 지역)들이 서울을 문화적으로 유의미한 도시로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뮤직라이브러리

뮤직라이브러리에 소장되는 바이닐(vinyl) 레코드판과 희귀 도서의 규모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지난 두 번의 라이브러리 오픈과정을 지켜본 경험으로 봤을 때 역시 국내,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닐레코드를 갖춘 공간이지 않을까, 능히 짐작이 갔다. 역시나 맞았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매된 각종 희귀 앨범을 포함해 총 1만 장이 넘는 LP*를 입수했고, 전설의 <롤링스톤(Rolling Stone)> 매거진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 모두 1161권을 포함해** 3000여 권이 넘는 희귀 음악서적까지 갖췄다.

* 이중 70%는 이미 절판된 탓에 전 세계 곳곳을 훑으며 사 모으는 데 1년도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 <내셔널지오그래픽> 때도 그랬지만 매거진사도 다 갖추고 있지 못한 전권을 보유한 곳은 세계에서 현대카드가 유일할 것이다.

 

다만 조감도를 보니 이전 두 개의 라이브러리에 비해 전체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아 보였다. 언더스테이지라는 공연장을 준비하던 중 '라이브러리'가 현대카드 컬처마케팅의 중심으로 부상하며 뒤늦게 뮤직라이브러리를 추가 건설하는 논의가 시작된 탓도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바이닐레코드의 작은 부피상 더더욱) 비틀스 초기 오리지널판, 롤링스톤스와 레드 제플린의 첫 앨범 오리지널판 등 희귀판을 포함해 음악사에 의미 있는 웬만한 음반들은 모두 다 집결시켜 서가에 진열하기에는 충분한 공간, 충분한 넓이였다.

 

* 2015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현대카드

 

아무래도 본격적인 참관을 하기 전에 류수진 팀장에게 이렇게 방대한 LP를 모을 수 있었던 노하우를 물어보는 게 먼저인 듯싶었다. 그녀는 어느덧 디자인·트래블라이브러리를 거치며 "이제 세계의 웬만한 도매상, 소매상을 다 알기 때문에 서점을 해도 잘할 것"이라며 농담을 하는 베테랑이 되었다.

전체 비율은 미국에서 40%, 유럽 40%, 일본 20% 정도 될 거예요. 세계 유수의 큐레이터들과 같이 작업했죠. 그런데 책보다 LP는 더 어렵더라고요. 아무래도 LP는 사양, 아니 멸종산업이었다가 최근에야 다시 기사회생한 거잖아요. 이미 절판된 상태라 대형 레코드점에도 없는 게 너무 많았어요.

 

'러프트레이드(Rough Trade)'라고 아시죠? 뉴욕과 런던에도 지점이 있는 세계 최대의 레코드숍인데 예를 들어 1000개 정도 오더를 내잖아요? 그러면 한 100개 정도 간신히 찾아서 배송을 해주더라고요. 물론 우리가 정말 찾기 힘든 레어 아이템만 주문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 류수진 팀장

희귀 LP를 구하기 위한 현대카드 직원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이제 그야말로 서점을 넘어 레코드숍까지 열 수 있을 정도로 전 세계 모든 구매 루트를 완벽하게 개척해냈다. 희귀 LP를 사고파는 전 세계 웬만한 딜러쇼를 모두 훑는 것은 기본. 추수감사절이라 미국 딜러들이 영업하지 않을 때는 일본을 중심으로 뒤지는 등 세계를 훑었다. 그래도 구하기 힘든 희귀 앨범은 개인들과 접촉해 구매하는 초강수까지 두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바이닐 ⓒ현대카드배송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과 무게에 약한 바이닐의 특성상 30개만 같이 묶어서 나르려고 해도 금세 휘거나 손상되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대단위의 LP를 단기간에 배달하는 경우가 없다보니 현대카드에서 배송방법까지 개발해야 했다. 결국 미국 LA에 있는 아메바라는 세계 최고(最古)의 업체와 함께 LP 대규모 수송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실 뮤직라이브러리에는 당연히 바이닐레코드가 소장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열심히 찾아다니다보니 LP가 다시 음악의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트렌드까지 읽게 됐어요. 라이브러리라는 아날로그 감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아이템이라는 확신도 갖게 됐고요.

 

참, 그거 아세요? 아이튠스와 같이 성장한 음악시장은 디지털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LP밖에 없더라고요. 앞으로 이런 지점들을 어떻게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나갈지, 어떻게 뮤직라이브러리의 자산으로 만들어나갈지 계속 고민중입니다.

 

- 류수진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