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궤도 이탈

은행원 아버지를 보고 자라 별 고민 없이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신입행원 연수 첫 날, 어쩐지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그 후 10개월을 매일같이 울면서 출근했습니다. 매일 카드와 보험을 팔고, 대출을 권하고, 대출이자 연체된 고객들에게 독촉 전화를 하는 것이 은행원의 삶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죠.

 

결국 1년도 못 버티고 낸 사표. 멘탈이 약하다느니, 은행이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 제 복을 발로 찼다느니 하는 어른들의 말에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 앞에 설 자신이 없어 도망치기로 했습니다. 가급적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 할 곳으로. 해서 떠난 곳이 아프리카 케냐. 거기에서 KVDA라는 NGO를 만났고, 나이로비에서 350km 떨어진 촌구석 마을에 봉사자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 사업을 지원한다는 거창한 미션을 품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여성'만 있고 '경제적 자립 사업'이란 실체 없는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이럴수가...털썩.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하나의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곳 여성들은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의 줄기를 엮어 자신들이 쓸 바구니를 만들곤 했는데, 그 바구니들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팔아서 돈을 벌자는 (돌이켜 보니 참 순진한) 아이디어였죠.

 

가까운 관광지에 가방을 들고 가서 팔아봤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은행원보다 더 고되고 구질구질한 3개월이 지나고, 4개월 차 되던 날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나면서 실패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남은 것이라곤 바닥난 통장, 냄새나는 레게머리, 그리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 할 난감한 이력서. 앞이 깜깜했습니다.

30대, 새로운 궤도를 향해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다가 유일하게 받아준 회사가 있어 머리를 조아리고 입사했습니다. 거둬준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7년여를 영혼 바쳐(!) 일했답니다. HR 업무부터 시작해서, 운 좋게도 일반 기업에서 경험하기 힘든 사회적 기업 설립, 임팩트 투자까지 다양한 업무 경력을 쌓을 수 있었지요.

 

일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회적 기업가들, 그들은 저에게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이었지요. 그들은 남들이 그려놓은 궤도가 아닌, 자신들만의 새로운 궤도를 그리며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편에서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고민 끝에 올해 초 회사에 작별을 고하고 다시 한 번 궤도이탈을 감행했습니다.

 

은행에 사표를 냈을 때보다 나이를 10년이나 더 먹었으니, 이번에도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때와 달리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어디에서 무엇을 하게 되더라도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마음속 나침반. 이것 하나 믿고 오늘도 새로운 궤도를 향해 항해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