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의 3년
저는 최근 「자유무역, 미국경제 그리고 일자리」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했습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한 이번 미국 대선, 이 역사적인 이벤트 시기에 미국 사회가 드러낸 자유무역에 대한 복합적인 입장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저 개인적으로도 뭔가를 찾아낸 기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뭘 써볼까, 몇 가지 주제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이슈인 '구조조정'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최근 급격히 심해지고 있는 '보호무역'의 이야기를 써볼까. 고민 끝에 이번에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보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 연재 시리즈 제목이 「뉴욕에서 본 한국경제」인데 정작 뉴욕 이야기는 거의 드리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저는 3년 넘게 뉴욕의 맨해튼이란 공간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의 삶. 이 물리적인 공간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살다 보니 이 차이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가 어디보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꽤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선택하고 만든 '이유 있는 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느껴왔던 그 '공간의 차이'에 대해 차근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뉴욕'에 대한 다른 질문
뉴욕에서 3년을 살다 보니 한국의 직장 선배나 동기, 후배들이 출장을 오면 얼굴을 보고 술을 마십니다. 오히려 서울에선 못보던 이들인데, 잡담할 기회가 더 자주 생겼습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이들이 '꼭 몇 가지 먹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1시간씩 줄을 서서 먹는다'고 약간은 과장하는 햄버거, Shake Shack
최근 한국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여성 분들이 많이 찾는 Magnolia 컵케이크
그리고 뉴욕 명물 피자와 3대 스테이크 집.
'내 주변의 누가 다녀왔다는데 진짜 맛있다고 해서 꼭 가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런 정보의 출처는 전부 주변 사람이나 블로그 혹은 SNS였습니다. '기대보다 훨씬 낫다'는 분도, '이게 다야?' 하시는 분도 계셨지요. 확실히, '뉴욕'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화제거리가 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만 이렇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만난 중남미나 유럽 사람들도 '뉴욕'하면 그들 나름의 동경이 다 있었습니다. 다만, 뉴욕에 대한 동경이 자칫 '뉴욕'의 모든 공간에 대한 과다한 기대로 이어질까 우려됩니다. 뉴욕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우리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그런 걱정말입니다.
지난달 뉴욕과 서울을 비교하는 한 TV 프로그램이 방영됐습니다. KBS <명견만리>에 나온 한 건축학과 교수는 '서울은 왜 아름답지 않은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주된 내용은 서울 건축물의 부족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울 강남과 뉴욕 맨해튼을 직접 걸으면서 비교하는 장면이 한참 나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뉴욕 맨해튼은 서울 강남에 비해서 걷기에 좋은 도시라는 점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한참 살았고, 이제 3년 조금 넘게 뉴욕에서 살아온 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처음 알게된 사실은 강남의 한 블록 길이가 60m인데 비해 맨해튼이 200m이고, 맨해튼이 강남에 비해 차선의 폭이 좁아 자동차가 속도를 많이 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살면서 느낀 것들과 일치했습니다. 실제로 맨해튼에서 비즈니스 미팅이 있으면 택시를 타기보다는 10개에서 15개 내외의 블록은 걸어서 다니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 프로그램은 '걷기의 편리성'에 대해 매우 강조했습니다. 걷기는 도시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며, 이는 사람 간 교류 가능성을 높여 도시의 매력을 더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이 강연 이후 관련 내용이 SNS에 공유되면서 서울 vs 뉴욕, '서울은 아름답지 않고, 뉴욕은 아름다운 곳' 같은 단순 비교가 여럿 보였습니다.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 특히 맨해튼은 저녁 해가 질 무렵 온 길거리에 검은 쓰레기 봉지가 가득합니다. 쓰레기 수거를 기다라면서 그냥 거리에 늘어놓는 것이지요.
오히려 '뉴욕은 어떻게 걷기 편해졌을까, 혹시 최근에 걷기를 편하게 만드는 요소를 더 늘려온 것은 아닌가' 같은 질문이 올라오고, 여기에 관심이 쏠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의 전형, 뉴욕
제가 여러 편을 연재하려니 글의 서두가 기네요. 본격적으로 도시라는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의 책,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책입니다. 도시에서 나타난 범죄나 환경파괴에 대한 부분 대신 이 책은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를 묻습니다.
뉴욕 출신인 저자는 '도시를 연구하면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된 여러 질문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을 고민하기에 도시의 전형인 뉴욕만큼 좋은 공간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마다 도시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선호하는 도시의 이미지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도시를 다루는 영화 가운데 대부분이 뉴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뉴욕은 가장 도시적인 공간 중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메가 시티 뉴욕의 출발
도대체 뉴욕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미국과 이곳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신 분들은 뉴욕(New York)이 새로운(New) 요크(York, 영국 지명 중 하나)라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동부를 여행하다 보면 지명에 'New'가 들어가는 곳이 정말 많습니다. 전부 다 유럽, 특히 영국계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붙인 이름들이지요.
그런데 사실 뉴욕보다 먼저 존재하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입니다. 네덜란드가 전성기 시절 서반구에 진출하기 위해 만든 서인도회사의 원거리 전초기지였고, 배를 정박한 사람들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는 일종의 요새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흔적은 월스트리트(Wall Street, 원주민과 네덜란드인 요새 사이에 생긴 장벽)라는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운하를 만들고 그 지역의 이름에 운하(Canal)를 뜻하는 단어를 넣어 커넬 스트리트(Canal Street)로 지은 것에서도 네덜란드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뉴욕 지도를 펼치면 가운데 위아래로 긴 섬 하나가 보입니다.
바로 그 유명한 맨해튼 섬입니다. 이 섬 좌우에 강이 흐르며 왼쪽이 허드슨(Hudson)강입니다. 빙하가 이동하면서 깊게 파놓은 탓에 수심이 깊고 내륙으로 바로 연결돼, '자연이 준 항구' 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깊은 강과 항구는 강 한복판까지 유럽과 카리브해에서 출발한 크루즈 선이 들어오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뉴욕은 이곳 맨해튼 말고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탠튼아일랜드를 합쳐서 총 5개의 자치구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공간에 대해서는 차후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인근 항구 도시와의 치열한 경쟁
처음부터 뉴욕은 지금처럼 독보적인 도시의 전형이었을까요?
처음 이민자들의 미국 정착이 시작될 무렵, 뉴욕은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 같이 대서양을 접해서 유럽과 무역이 가능한 다른 항구 도시와 비슷비슷한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뉴욕은 영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와의 무역에서 중심에 서고 동시에 설탕과 담배 같은 원료를 재배하는 남부의 밀. 밀가루와 같은 식량을 북부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급속히 그 규모를 키우게 됩니다.
지금의 뉴욕은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와 원유 거래량 세계 1위인 뉴욕상업거래소(New York Mercantile Exchange), 장외주식 거래시장이 존재하는 도시입니다. 그만큼 뉴욕이 다양한 거래가 일어나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미국 경제가 계속
담배와 면화, 인디고 같은 대규모 노동집약적 산업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서배나(Savannah)나는 최근 미국에서 한인 거주 비율이 급증한 남부 애틀랜타 조지아주의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
작년 11월 이 항구도시에 가보니, 면화 거래소(Savannah cotton exchange) 건물이 보였습니다. 미국 남부 거대 농장에서 흑인 노예를 동원해 만든 면화를 거래하던 장소입니다. 당시 서배나는 면화와 인디고의 수출항으로 큰 항구였지요.
'만약 미국 경제가 계속 대규모 노동집약적 산업에 머물러 있었다면, 뉴욕이 아니라 서배나가 지금의 뉴욕이 가지는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첫 번째 뉴욕의 전성기
뉴욕이 지금의 도시로 발전할 수 있던 배경은 항구를 통한 유럽과의 교역 외에 또 있습니다. 뉴욕을 미국 중부 5대호와 연결한 이리운하(Erie Canal)입니다. 과거 육상 운송 비용이 해상 운송보다 훨씬 비싸던 시절, 5대호 연안의 농업・목축업・제조업 생산품 운송통로인 '운하'가 건설되면서 뉴욕은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독보적인 규모의 도시가 됩니다.
앞서 언급한 「도시의 승리」에 따르면, 뉴욕은 이런 해상 운송을 통해 제조업의 중심 도시가 됩니다. 19세기 당시 낮은 기술 수준 때문에, 항구를 통해 들어온 원료는 가까운 곳에서 가공에 들어갔습니다. 설탕 정제나 의류 생산, 출판 같은 제조업 분야에서도 뉴욕은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20세기 이전 뉴욕은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제조업의 허브'였습니다. 물론, 제조업 운용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금융업 역할을 과소평가해선 안됩니다.
이후 두 번의 세계 대전 때문에 군수산업이 발달하면서, 뉴욕은 다시 유럽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항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저렴한 인건비가 더 중요한 생산요소로 작용하면서 뉴욕이 갖췄던 제조업 경쟁력은 사라져갔습니다.
파산 직전 뉴욕을 구한 금융업
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욕의 의류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 전반이 몰락했고, 뉴욕은 갈등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지금 제가 사는 할렘이 원래 백인 중산층의 공간이었지만,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보통 흑인이라고 부르지요)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인종갈등의 중심지로 바뀌게 됩니다. 1970년대 뉴욕은 파산 일보 직전 상황이었고, 대통령은 구제금융을 거부하는 일까지 겪게 됩니다. 지금의 뉴욕을 생각하면, 뉴욕 이야기라고 믿기 힘든 시기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뉴욕은 어떤가요? 2014년 통계로 뉴욕의 한해 연간 관광객이 5천 640만 명입니다.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이 뉴욕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저도 「도시의 승리」에서 1970년대 뉴욕의 쇠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과거의 '흑역사'를 절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뉴욕은
어떻게 1970년대의 위기에서 벗어났을까요
도시의 산업으로 보자면, 결국 금융 서비스 산업에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 맨해튼의 임금 소득 중 40% 정도가 금융 서비스업으로 향합니다. 이는 미국 경제가 1970년대 이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그중에서도 금융 서비스업의 경쟁력을 확보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렇다면 돈만 많이 번다고 뉴욕이 지금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도시의 부는 물적 토대의 근원이지만, 이렇게 만들어 낸 부가 도시 전체를 융성하게 한 데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습니다.
저는 지금 2016년의 눈으로 뉴욕이 지난 수십 년간 어떻게 재생돼 왔는지를 앞으로 쭉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냥 그 서론과 같은 글입니다.
뉴욕 200년 정도의 역사를 몇 줄로 요약하려니, 고등학교 시절 국사 세계사를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기분이네요. 뉴욕은 200년 동안 미국 도시의 전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은 곳입니다. 따라서 앞서 소개해 드린 몇 줄로 이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삶고, 자기의 꿈과 욕망을 불사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꼭 책과 영화에서 찾아보시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늦은 저녁,
뉴욕에서 Shallow Economist 드림
[연재 종료 안내]
이 글을 마지막으로 Shallow Economist의 '뉴욕에서 본 한국경제'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