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방망이가 되어버린 집

초등학교 때 한창 고구려와 부여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을 열심히 했다. 게임 속 수도인 국내성, 또는 부여성의 동쪽 문 지역은 유저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일종의 장터 역할을 했다.

 

기억나는 것 중 특이했던 것은 대부분의 아이템이 거래되는 단위가 금전이 아니라 '도깨비방망이'라는 무기였다는 것이다. 도깨비방망이 몇 개에 무슨 아이템 하나, 이런 식의 교환 비율이 그때그때 책정되곤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도깨비방망이는 매우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어서 아주 높은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고, 유저들의 증가세 대비 아이템의 공급이 희소했으니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만 있어도 가격은 오르기 마련이었다.

 

게임 속 도깨비방망이가 본연의 무기 역할 대신 재테크의 수단이자 교환 수단이었듯이, 20세기 한국에서의 아파트도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었다.

 

마치 도깨비굴에서 보스를 잡고 도깨비방망이를 주우면 환호하는 것처럼 분양권 추첨에 몰려들었고, 당첨이 되면 환호했다. 분양권을 얻어 아파트로 가는 티켓을 따내는 것은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지름길이었다.

 

그렇게 아파트라는 도깨비방망이에 기대어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며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한때 아파트는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사다리였다.

젊은이를 위한 집은 없다

"이런 편차에도 이들의 수학에서 변치 않는 공리의 역할을 해준 것은 '실패하지 않은 건 끊임없이 지어지는 아파트뿐'이라는 명제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산층 아버지들 중 어느 누구도 아파트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 차익이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p.52

아파트는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시스템'이라는 저자의 말이 특히 인상 깊다.

 

마치  도깨비방망이를 이벤트로 뿌리거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조정하는 것처럼, 정부는 수도권 주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분양해나가면서 부를 분배해나갔다.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정부가 만들어 준 사다리를 밟고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실은 그것마저 일부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그러나 고도성장의 열기가 식어가기 시작하자, 아파트 불패신화는 사상누각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임 속 경제와는 달리 실물경제는 매우 복잡했고 대처하기 어려웠다. 아마 게임이었다면 다시 숫자들을 분석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면 되었겠지만, 현실에서야 어디 그게 쉬운가.

 

중산층행 급행열차에 오르기 위해 빚을 지며까지 집을 산 베이비 부머들은 '하우스 푸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고, 그들의 자식 세대는 '큐브 생활자'라는 딱지를 달고, 방의 기능을 아웃소싱하고 있는 다른 공간들을 전전하다가, 몸 한 칸 뉠 단칸방으로 들어가 힘겹게 잠을 청한다.

아파트에 의지한
부의 재분배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은
'큐브 생활자'로 불리는 젊은이들이다.

서울 지역의 평균 전셋값이 평균 4억 원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진학해, 또다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취직을 한다고 해도 '내 집'은커녕 전셋집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에 있다. 이제 젊은이를 위한 집은 없다.

욕망의 구조조정, 슬프지만 현실적인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 무대에서 '정치'가 '저성장'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고안해내지 못하고 중산층이 욕망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아파트가 여전히 주인 행세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65

 

과거 고도성장기 수준의 욕망을 충족하기 어려워진 현실에서, 슬프지만 필수적으로 단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욕망의 구조조정'인 듯 싶다.

 

일각에서는 이미 서서히 대안적인 움직임이 보이고 있긴 하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와 같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도서들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기도 하고, 아파트 대신 협소주택(자투리 땅에 좁지만 높이 지어올린 주택)을 지어 살거나 하우스 메이트를 찾아 집을 나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서울, 수도권을 떠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불황에 강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이 '작은 사치' 트렌드와 함께 한국에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아파트 대신 작지만 원하는 것들로 채운 공간으로, 평수를 넓혀가며 이사를 가는 대신 가구와 인테리어를 바꾸는 정도로 그렇게.

 

꿈은 높은데 현실은 낮고, 그 현실을 크게 개선하기 어려울 때는 욕망의 레벨을 낮추는 수밖에. 슬프지만 현실에 발맞추어 보다 근본적으로는 좋은 주거지와 좋은 직장, 더 넓게는 '좋은 삶'이란 각각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어떤 정의를 내릴지, 그 답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