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게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저만치 앞서나가는 것 같다가도 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무력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얄궂어서 희망을 품으면 절망이 금세 따라오곤 하죠.

 

2018년은 직장 내 성폭력, 신체적·언어적 폭력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던 해였습니다. 유난히 새로웠던 것도 아니고 내년엔 확실히 달라질 거라 전망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달라질 것 없다'고 피곤한 귀를 닫을 때가 더 많아질 수도 있고요.

ⓒShutterstock그러나 누군가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변화를 모색한다면, 아무리 익숙한 반복으로 느껴지더라도 그 안의 구체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시감 속에서도 새로운 마음을 품는 일이 변화의 물결을 일게 하고, 그 순간 반복되던 서사는 한 발 나아갈 수 있거든요.

 

물론 더디고 지루한 일일 겁니다. 커다란 풍경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고요.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을 주목할 때,
나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다루기 시작할 때,
이미 변화의 물결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첫 기사로 구글 워크아웃(동맹파업)을 소개하는 이유도 이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폭력 문제로 사임한 앤디 루빈에게 9000만 달러(약 1012억 원)의 퇴직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뉴욕타임스의 최초 보도 이후, 2018년 11월 1일 11시 전 세계 약 50개 도시에서 약 2만 명의 구글 노동자가 사무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 세계 구글 노동자 중 20%가 손을 잡은 겁니다.

 

그들은 워크아웃과 함께 다섯 가지의 대안을 제시했는데요. 그중 하나는 회사가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자체적인 중재를 진행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소송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폐지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1월 8일, 구글은 해당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구글이 해당 조항을 삭제한 그다음 날, 연초까지만 해도 해당 정책이 적절하다고 옹호했던 페이스북이 회사 내 중재를 선택 사항으로 조정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읽은 버즈피드는 테크 기업에 '성폭력 문제를 기업이 중재하고 소송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없애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퀘어, 에어비앤비 그리고 이베이가 그러겠다고 답했습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더라도 기울어져 있던 절차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 관련 기사: Facebook is ending forced arbitration for sexual harassment complaints (The Verge, 2018.11.9)

** 관련 기사: Workers at Google, Facebook, eBay and Airbnb can now sue over sexual harassment—here's what that means for employees (CNBC make it, 2018.11.19)

 

사무실 밖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테크 업계에 큰 환기가 되었죠. 구글 워크아웃에 참여한 이들도 변화의 흐름이 얼마만큼 확장될지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변화가 시작되었음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는 구글과의 계약 기간 1년 중 가장 힘든 한 주 중 하나였어요. 하지만 오늘은 최고의 날이네요. 모두가 존엄성을 존중받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지닌 수천 명의 동료와 연대하는 기분이에요.


- 브랜다 살리나스, 런던에서 근무 중인 구글 노동자

우리는 이곳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구조적인 변화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 클레어 스테이플턴, 유튜브 프로덕트 마케팅 매니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2월 5일, 구글 워크아웃을 이끈 'Google walkout for real change'는 'Invisible no longer: Google's shadow workforce speaks up'을 발표했습니다. 구글의 절반 이상인 비정규직의 동등한 대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모두 회사 공동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지만 일주일 뒤 열린 전체 토론에서 비정규직은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글이 중재 정책을 삭제한 다음 날에도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끝내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권력 불평등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과 연결됩니다.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결과는 '모든 구글 노동자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투명성과 책임 그리고 구조적 변화'입니다. 이 안에는 인종, 성별, 계약 형태 등 모든 차별을 담고 있습니다.

ⓒThe New York Times이 변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냐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앤디 루빈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기폭제가 되었겠죠. 이전에 발생한 사건들 때문에 변화에 대한 바람이 누적되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터져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회사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해서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 주최자(organizer) 역할을 자처했을 수도 있겠죠. 또 누군가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전 세계 구성원의 의견을 받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게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이해한 개인이 구체적인 시도를 했고, 그로 인한 사건이 연결되어 구성된 흐름인 거죠. 이 흐름 안에 들어서는 순간, 지루하게 견뎌낼 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입니다. 지금 내가(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변화할지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고요. 밖에서는 잔잔하게만 보이던 물결일지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읽어내면 다를 겁니다. 'Google walkout for real change'는 물결 안에 있고, 물결을 바꾸고 있습니다.

 

물론 무력감에 뒤덮일 때가 있습니다. 침체한 마음을 다시 길어 올릴 에너지조차 생기지 않는 순간도 있고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2018년 초에 저도 그랬습니다.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여름이 되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저의 물결 안에서는 올해가 작년보다 나았고 내년에도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혹여 크게 봐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하더라도요.

 

반복적으로 들리는 절망적인 소식에 모든 게 지겨워지는 순간에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바라보고 나아가 어떤 시도로 사건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언제든 두 다리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는 언제나 그렇듯 선택의 문제입니다.

 

구글 워크아웃이 있었던, 같은 11월에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딸이 직업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던 황상기 씨는 11년 만에 삼성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습니다.*

* 관련 기사: 황상기 반올림 대표 "삼성 사과, 다짐으로 받겠다" (한겨레, 2018.11.23)

 

이야기가 반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큰 전환이 생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