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 커플의 짜증이 늘어가는 것처럼

이제 긴 이야기의 끝이 보인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여전히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나는 성공한 사람인가?

 

뭐, 그런 것 같다. 국민프로그램을 5년이나 이끌었고, 온 국민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고작 나이 서른일곱에. 성공치고는 꽤나 화려한 성공이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일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성공이라는 건 화려할수록 그 그림자는 짙고 어둡다는 걸. 시상식 무대의 화려한 막을 올리기 위해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손이 찢어져라 줄을 당기고 있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사실 처음엔 안 그랬다. <1박 2일>을 처음 만들 때, 우린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했다. 뭐가 빛이고 뭐가 그림자인지도 몰랐다. 이명한 피디, 나, 신효정 피디, 이우정 작가. 우린 같이 밤을 새우고 같이 촬영을 하고 같이 프로그램을 키워나갔다. <1박 2일>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싱싱했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내 새끼가 한창 클 때는 똥 기저귀 가는 것조차 즐거운 법이다. 일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3년이 지난다.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되고 프로그램은 정체기에 접어든다. 시청률은 여전히 1등이고 시청자의 반응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키워갈 때의 그 짜릿한 보람은 없어진다. 권태기에 빠진 커플 같다.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말이야. 솔직히 옛날만큼 뜨겁게 사랑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 와중에 그래도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걸로 봐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널 사랑해, 정도 되시겠다. 여자는 미친놈, 무슨 소리야, 하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런 것이다.

 

권태기 커플의 짜증이 늘어가는 것처럼, 일의 보람이 줄어드니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몰려온다. 메인피디인 나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으랴. 화려한 무대 뒤에서 그동안 묵묵히 줄을 잡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슬슬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작은 조연출들이었다.

 

당시 조연출들의 일주일 스케줄은 그야말로 인간이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월요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답사하고, 화요일은 회의를 하다 저녁부터 프리뷰를 하고 수요일부터는 밤샘이 시작된다. 수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밤을 새워 편집을 하고 나면 목요일 자정쯤 시사를 하고 이것저것 고치라고 명령을 한다. 그리고 수정을 하다보면 어느덧 금요일 아침, 촬영을 떠날 시간이 된다. 그러면 또 다 같이 촬영을 갔다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면 토요일 오후, 다음날 방송을 위해 마무리 작업이 시작되고 모든 작업이 끝나 테이프를 넘기고 나면 일요일 점심이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수요일에 출근하면 일요일 날 퇴근하는 시스템. 잠은 편집실에서의 쪽잠이나 촬영날 이동할 때 버스에서 자는 걸로 때운다. 인간의 삶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온다.

너무 힘들어요, 선배. 죽을 거 같아요, 선배. 살려주세요, 선배.

아아, 너무 미안하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니. 내가 사장이면 너희들 보너스라도 두둑이 줬을 텐데. 일의 보람이 줄어든 자리를 돈으로라도 메꿀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사원이고 너희들도 사원이니 방법이 없다. 아니, 사실 방법은 있었다. 봄 개편이나 가을 개편 때, 조금 더 편한 프로그램으로 보내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새 조연출을 받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지옥 같은 업무량 덕분인지 그들의 스킬도 빠르게 향상되었고, 그들을 내보내는 순간 프로그램의 완성도도 같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게다가 몇몇 후배들은 눈이 부실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저 재능을 남을 주기란 실로 아까웠다. 혼자 쓰고 싶다는 욕심이 눈을 가린다.

 

결국 개편 때마다 후배들을 붙들고 사정을 한다. 너희가 한 번 더 희생해라. 회사가 원하는 일이다. 시청자가 원하는 일이다. 너희들 경력에도 도움이 된다. 힘들어도 참고 견뎌라. 그래봐야 안 죽는다 등등. 다행히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은 편집실에 오래 앉아 있다가 디스크가 왔고 다른 한 명은 스트레스성 장애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나는 또 개편을 앞두고 사탕발림을 하고 있었다. 이번 한 번만 더 하자. 이젠 진짜 마지막이다. 다음 개편 때는 꼭 빼줄게.

 

그렇게 설득을 하고 돌아서 담배를 한 대 피우는데 누군가 날 툭툭 치며 말을 건다. 내 안의 '진짜 나'가 말을 건다. 웬 회사 핑계며 시청자 핑계며 경력 핑계야. 사실은 널 위한 거잖아. 네가 지금 굴러들어온 성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뿐이잖아. 심장이 쿡쿡 찔린다. 그래, 결국 내 욕심 때문이었다.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후배를 짓누르고 덕분에 프로그램은 또 1등 자리를 유지한다.

 

물론 후배들에게는 너무 미안했다. 그깟 시청률 1등이 뭐라고, 아픈 애들을 데리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매번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아니 이게 뭐, 나 혼자 덕 보겠다고 하는 일이야? 이 프로그램에 딸린 식솔들이 몇 명인데. 작가들도 있고, 촬영 스태프들도 있고 출연자들도 있다. 내가 쓰러지면 다 쓰러지는 거다…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 싶어진다.

 

조연출들이 편집실에서 죽어나는 동안 나는 회의실에서 작가들을 쪼아댄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매번 밤이 새도록 회의는 이어진다. 그렇게 또 프로그램은 1등 자리를 이어간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성공이 계속될수록,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폐해져갔다. 아니, 주변 사람뿐이 아니다. 나 또한 피폐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1박 2일>이 시작될 즈음, 첫 딸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녀의 한 살부터 네 살까지의 기억이 별로 없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면 아이는 자고 있었고, 딱 하루 쉬는 일요일엔 내가 잠을 잤다. 그러니 아이와 놀아준 기억도 없고, 어떻게 놀아주는지도 모른다. 오줌 기저귀는 몇 번 갈아주었지만, 똥 기저귀 가는 법은 모른다. 엄마와 있으면 아이는 잘 놀았지만, 나와 있으면 금세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울음을 달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아이에게 아빠는 그저 잠깐씩 스쳐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가장 슬플 때는 출근할 때. 신발을 신으며 짐짓 쾌활한 척, "아빠 회사 갔다올게요~" 하고 외쳐도 아이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 출근하는 내내 그 눈빛이 계속 떠오른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눈빛. 그게 마음을 후벼판다.

 

내가 뭐한다고 이러나.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아니, 부귀영화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한번은 회사에서 인센티브로 거금 천만 원이 나왔다. 세금 떼고 뭐 떼고 뭐 떼고 했더니 600만 원 정도가 남았다. 다 함께 고생한 대가를 혼자 쓸 수는 없었다. 그 돈으로 스태프들과 엠티를 다녀오고 남은 돈을 똑같이 나눠 가졌다. 막내 작가부터 FD까지 다 함께 나눴더니 정확하게 39만 원씩 돌아갔다.

 

39만 원을 들고 집에 들어갔더니 와이프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차라리 인센티브가 안 나왔으면, 엠티도 안 갔을 테고, 그럼 딸하고 하루 놀아줄 수 있었을 텐데.

아아, 그 말이 맞다. 그렇다고 주는 돈을 안 받을 수도 없고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그즈음이었다. 갑자기 종편이 생기고, 케이블이 커지고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전쟁이 시작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저는 사실 누군데요…' 하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소개가 이어지고, 그 중 몇몇 사람을 어둑한 지하 다방에서 만난다. 그들은 조용히 지갑을 연다. 직장인이 죽어도 꿈도 못 꿀 금액을 척척 제시한다. 내 이름에 가격표가 붙는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내 능력이 돈으로도 환산될 수 있음을. 그것도 아주 큰돈으로.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는다.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기뻤다. 벌써 돈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욱 나열하고 있다. 일단 빚을 갚아야지. 집 살 때 은행에서 빌린 돈. 25년간 갚아야 할 그 돈을 한 번에 갚아버리자. 그러고도 아직 한참 남는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한몫 떼어드려야겠다. 처가에도 용돈 쓰시라고 한몫. 그래도 남는다. 고생한 스태프들 데리고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그래도 남는다. 남는 돈을 은행에만 넣어놔도 평생 먹고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액수. 금액도 금액이지만 무엇보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종종 시청률로 평가받는 것처럼, 프로 운동선수들이 연봉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것처럼, 누군가가 나에게 수치로 환산된 가격표를 들이밀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나쁘지 않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골방에서 편집기와 씨름하고 현장에서 연예인과 씨름하고 그러다 서서히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이게 운명이겠거니 체념하고 있는 수많은 예능피디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이렇게 외치고 싶다.

하하하 이거 보세요. 우리도 잘만 하면 한몫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 세상에나, 우리 능력이 알고 보니 돈으로도 환산이 된대요.

 

이런저런 거 다 떠나서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편히 모실 수 있고, 당분간 와이프가 돈 걱정은 안 하게 할 수 있다. 직장인으로서, 누군가의 아들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행복해할 수는 없었다. 모든 돈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번 경우 그 대가는 너무도 명확하다. 바로 <1박 2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소위 <1박 2일>의 잘나가는 연출자로서 '한창 물이 좋은 나'라는 존재일 터. 내 몸값의 50퍼센트 이상은 <1박 2일>에 빚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지금이 아니면 이런 후한 조건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 버리고 떠나야 하나. 내가 그만둔다고 〈1박 2일〉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다른 피디가 와서 또 잘해나갈 것이 분명한데. 속으로 수없이 그런 핑계를 만들어나가면서도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못한다.

 

게다가 <1박 2일>은 누군가 한 사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나 혼자서 만들어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연기자와 스태프의 피와 땀이 이 프로그램 하나에 녹아 있다. 사정은 다르지만 상렬이 형이나 홍철이가 떠날 때, 종민이가 군대에 갈 때, 김C가 사라질 때, 우린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연기자도 아니고 메인피디라는 내가 중간에 사라진다는 건 역시나 말이 안 된다.

이 프로그램은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또 전체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 프로그램의 끝을 봐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이 기차에서 내려도 나는 끝까지 기관실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 의무감 따위 다 떠나서 당장 이 프로그램을 계속하지 못하는 나를 떠올려보니 기분이 아득해진다. 이 멤버들과 이 스태프들을 촬영장으로 다 떠나보내고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권태기의 커플이 이별을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사랑의 크기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처럼, 그날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고야. 저 큰돈이 허공으로 날아가는구나.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정이 뭐길래. 게다가 지금은 옛날만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별수 있나. 사랑이라는 게 다 그런 건데. 결국 다시 어둑한 지하 다방에서 전화했던 사람들을 역순으로 불러내어 힘들게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못 갈 것 같습니다.

사랑이 꽤 아프긴 아팠나보다

그 이후는 다들 아는 스토리.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1박 2일>은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고, 우리는 묵묵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녹화 때, 극장에서 지난 영상을 보다가 펑펑 울어버렸다. 그때 왜 울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아직도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눈물이 나더라. 그리고 그때 눈물로 보내준 그 여자친구는 지금 다른 남자 만나서 잘 살고 있다(<1박 2일> 다음 타자가 왜 나냐고 툴툴거리던 재형이 형 얼굴이 눈에 선하다). 뭐, 어쩔 수 있나.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다만 그 사랑은 꽤나 아프긴 했나보다. 마음도 몸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이게 끝나면 또 뭘 하지. 또다른 프로그램을 할 텐데. 그럼 또 욕심에 겨워 다른 사람을 쥐어짜고 내 자신을 쥐어짤 게 뻔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른 어느 날, 결심을 했다. 회사를 관두자고. 더이상 나나 다른 사람을 학대하며 살기가 싫었다. 민폐 끼치며 살고 싶지 않다. 그래, 떠나자. 미련 없이 털고 가자.

 

종영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는 그 생각뿐이었다. 회사를 관두고 뭘 할까 하는 생각.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혼자 고민을 한 결과 네 가지 정도의 안이 나왔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펜션을 하는 게 1번 안(촬영 갈 때마다 제주도가 정말 좋았던 까닭이다). 콧수염을 기르고 술집을 여는 게 2번(대학시절부터의 꿈. 마흔이 되면 콧수염을 기르고 술집을 열 거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요리학원을 다니고 식당을 여는 게 3번(다큐국의 이욱정 선배는 회사를 1년 휴직하고 영국의 르 코르동 블뢰에서 요리를 배워왔다. 아아, 르 코르동 블뢰라니! 내 롤모델이다). 지인들과 프로덕션을 차려서 구멍가게처럼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4번 안(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스태프들 듬뿍듬뿍 챙겨주면 착취의 죄의식이 좀 덜하지 않을까 해서 나온 생각).

 

뭘 할까. 그 생각만 하며 마지막 반년을 버틴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이슬란드로 날아왔다. 오로라의 신이 뭔가 점지를 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Carson Arias/Unsplash이 긴 이야기 끝에 결론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제부터 대답해보려 한다. 나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선한 프로그램을 만들려 노력하지만, 그걸 위해서 악한 수법도 자주 쓴다. 순수하게 스태프들에게 다가가지만 음흉하게 그들의 등골을 파먹는다. 성공하고 싶은 욕심은 많은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강단은 없다.

 

한마디로 나는, 그냥 약한 사람이다. 내 욕심을 못 이겨 그걸 남에게 쏟아붓기도 하고 그러다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다(<1박 2일> 한창 할 때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한 적도 많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범한 대답. 참 한심하다. 고작 이런 결론이라니. 그러면 또 질문. 그런 약해빠진 나라는 사람은, 앞으로 뭘 하는 게 좋을까. 펜션을 할지, 술집을 할지, 식당을 할지, 프로덕션을 할지? 아니 뭘 하든 사표 먼저 내야 하는 건가.

예정에 없던 방황의 시간을 지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다. 회사가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 참, 파업 중에 사표를 내기도 그렇고 그럼 천천히 생각해볼까 하고 빈둥거린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세 달이 간다. 파업은 휴가가 아니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그리하여 2주로 예정되었던 나의 휴가는, 무작정 길어지기 시작한다. 5년 동안 밤낮 없이 일만 했는데 갑자기 거의 100일간을 아무 일 없이 노는 사람이 된 것이다. 파업기간 틈틈이 글을 쓴다. 아이와 놀아준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온다. 그래도 파업은 끝나지 않는다.

 

흠, 그렇다면 사표 낸 이후를 좀 준비해볼까. 단골로 가는 홍대 술집 주인에게 술집 운영의 비용과 노하우를 물어본다. 보증금은 얼마구요, 권리금은 얼마구요, 인테리어 비용은 얼마구요 등등.

 

혹시나 프로덕션 사무실을 차릴 수도 있으니 이런저런 사무실 자리를 알아보기도 한다. 여의도는 일단 비싸다. 20평 남짓한 사무실 월세가 300~400만 원씩 한다.

그러면 서강대교 넘어나 파천교 건너의 사무실들은 어때요? 여의도만 벗어나면 좀 싼데 말이야. 근데 유명하신 피디님이 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시나?

부동산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냥요… 좀 힘들어서요.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겨워져 또 빈둥빈둥.

 

갑자기 베를린의 어느 골방에 누워 있겠다던 김C가 생각난다. 언젠가 손이 까딱하고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보겠다던 김C. 이것 참. 원했든 원치 않았든 딱 그 짝이다. 내 손가락은 언제쯤 움직이려나.

 

그러던 어느 날, 승기한테서 전화가 온다.

감독님 요즘 뭐 하세요. 심심한데 밥이나 한번 먹어요.

그럴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약속 장소로 나간다.

 

그러고 보니 승기도 오랜만에 본다. <1박 2일> 마무리하고 승기는 바로 드라마에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니 더 어른스러워진 느낌. 아니, 사실 어른 맞지. 승기가 <1박 2일> 시작할 때만 해도 스무 살 초반의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 녀석도 20대 후반. <더킹 투하츠>에서 제법 남자다운 연기를 선보이기에 집에서 보며 '어라.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컸지' 하고 놀라기도 했다. 한창 프로그램 할 때는 오히려 밥 한 끼 맘 편히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이 녀석이나 나나 요즘은 쉬고 있으니 마음은 참 편하다.

 

덕분에 남자 둘이서 수다 삼매경. 요즘 사는 얘기, 여행 다녀온 얘기, 다른 멤버들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든다. 그러다가 주제는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얘기로 넘어갔다.

감독님 요즘 뭐 생각하시는 프로그램은 없으세요?
 

프로그램? 프로그램이라…

있지. 있기야 있다. 요즘은 남는 게 시간이니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프로그램 생각을 꽤나 했던 터였다. 길을 걷거나 집에서 TV를 보다가도 문득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으니.

 

나도 모르게 신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순전히 아이디어 차원의 잡스런 생각들. 이날 저날 문득문득 떠오른 것들을 신나게 풀어낸다. 승기는 뭐가 재밌네 뭐는 별로네 감상평을 섞어가며 맞장구를 쳐준다. 몇 달을 빈둥거리며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았는데 이날만큼은 나도 신이 났다. 결국 그렇게 승기와 점심을 핑계로 세 시간을 떠들다가 헤어진다.

 

강남 길바닥에서 승기를 보내고 나니 갑자기 외로워진다. 또다시 혼자다. 어디로 갈까. 집에 들어가서 또 빈둥빈둥 영화나 볼까. 아니,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아까부터 느끼던 거지만 오늘 나는 조금 흥분해 있다. 오랜만에 승기를 만나고 오랜만에 프로그램 얘기를 하다보니 뭔가 근질근질한 것이다. 결국 이번엔 이우정 작가를 불러낸다. 바쁘다는 친구를 억지로 불러 커피숍에서 만난다.

 

옛날부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 친구와 가장 먼저 상의를 하곤 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또다시 아까의 프로그램 이야기 재탕. 한 시간 넘게 열변을 토한다. 이런 기획이 있는데 말이야. 이건 누구를 섭외하는 게 좋고, 이건 예산이 얼마가 들 것 같고, 이건 좀 약하지? 이렇게 바꿀까…… 등등. 한참을 쏟아낸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이우정 작가가 웃으며 입을 연다.

니가 요즘 심심하기는 하구나? 뭘 이렇게 많이 싸들고 왔어. 파업이라며. 파업중에 프로그램 생각해도 되는 거야?

글쎄, 파업이라.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파업중이지. 그 전엔 휴가중이었고. 계속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몇 달 동안 나는 뭐 이리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한 걸까. 당장 프로그램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프로그램은커녕 일 때려치울 생각에 골몰하던 중이었는데. 마치 당장이라도 낼모레 촬영 시작할 것처럼 흥분해 있는 꼴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이우정 작가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1박 2일> 한창 할 때는 매일 회의다 뭐다 붙어 다녔는데.

그러는 너는? 요즘은 뭐 하고 사는데?
 

드라마 준비하잖아. <응답하라 1997>이라고. 예능작가가 갑자기 드라마 쓰려니 힘들어 죽겠다, 야.

이제는 이우정 작가의 차례. 준비하는 드라마의 내용을 가지고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

이게 말이야. '빠순이들'의 사랑 얘기인데, 주인공이 H.O.T. 팬클럽인 거야. 예전 학교 다닐 때 아련한 그런 거 있잖아. 첫사랑, 성장통, 어쩌구저쩌구…… 잘될까 이거?

글쎄, 솔직히 잘 안 될 거 같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뜬금없이 드라마라니. 잘하던 예능을 계속해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은 마당에 갑자기 드라마라니. 말리고 싶어진다(내가 극구 말리고 싶었던 이 드라마는 다들 알다시피 몇 달 후 초대박이 난다. 어쨌든 뭐, 그때는 몰랐으니깐). 나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진심으로. 정말 진심을 다해 얘기했다).

너도 예능작가로 이 바닥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뭐하러 위험한 선택을 하느냐. 괜히 다른 장르에 손댔다가 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원호 걔도 그렇지(신원호 피디는 내 동기다), 예능하던 피디가 갑자기 웬 드라마를 한다고 그러는 거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거다. 그러다 실패하면 원호나 너나 큰일 난다. 화려한 경력에 오점을 남긴다. 대체 언제 철이 들려고 이러는 거냐. 굳이 해야 되는 거면 대충 짧게 하고 얼른 끝내라. 가능하면 안 하는 게 가장 좋고…

등등. 정말이지 걱정돼서 한 얘기였다. 10년을 넘게 같이 일한 작가가 걱정되고 동기가 걱정돼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실로 쿨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공, 실패 따져가며 일했어. 재미있을 거 같고 꽂히면 하는 거지. <1박 2일> 시작할 때는 성공할 줄 알았나 뭐. 그냥 우리끼리 즐거워서 한 거잖아. 이번 것도 똑같아. 나도 드라마는 처음 써보는 건데 의외로 재밌더라고 이게. 망하면 망하는 거지 뭐.

답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잠시 잊힌 것뿐

이 대답을 듣고, 순간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이게 뭐지 싶다. 그뒤로 나눈 이야기들은 사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잡답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헤어져 집으로 오는 내내 그 친구의 대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이 대답에는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다. 나도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다. 일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명령하는 것이다. 성공을 좇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그동안 왜 잊고 살았을까. 그리고 그녀의 저 실로 쿨한 대답에 비해, 나의 조언은 얼마나 비루한 것들인지. 나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경력이 아까우니 모험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언은,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들이대던 잣대는 아니었을까.

 

그래도 <1박 2일> 피디인데, 유명한 사람인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인물인데. 그러한 무게에 그동안 짓눌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다음 작품을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들로 머릿속만 채운 채, 술집이니 펜션이니 하는 핑계로 그저 도망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가슴으로 두근거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재단하려 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낯이 뜨거워지고 창피해진다. 그러나 더불어 속이 시원해진다. 지금껏 날 둘러싸던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낮에 승기 앞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 얘기로 열을 올릴 때. 그때가 사실 그 몇 달 동안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말하는 내내 가슴속의 무엇인가가 요동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우정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요동치던 것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두근거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대학교 때 연극을 할 때부터 <1박 2일>을 마무리하던 그날까지 이어져온 그 두근거림을 나는 왜 잊고 있었던 것일까. <1박 2일>을 시작하던 5년 전.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던 기억. 이명한 피디, 신효정 피디, 이우정 작가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 일하러 가던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진심으로. 그 무엇과 바꿔서라도, 타임머신이든 뭐든 써서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아… 이거였구나.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그때의 그 두근거림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거구나. 나의 머리가 여러 현실적인 고민과 그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느라 발버둥치는 와중에도 나의 몸, 나의 가슴은 계속 이걸 찾아 헤매고 있었구나.

 

앞날에 대한 불안감마저 동료들이 있어서 참아낼 수 있었고,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가던 시절. 성공이나 실패보다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했던 시절. 그래서 즐거웠던 그 시절. 바로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 다시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드디어 답을 알게 된다. 그때처럼 다시 일하고 싶다. 술집도 펜션도 아닌, 그것이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100일간의 긴 휴식을 거쳐 얻어낸 대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인생이라는 건 혹시 신이나 누군가 초월적인 존재가 미리 구성해놓은 패키지 투어 같은 건 아닐까 하고. 우리는 묵묵히 깃발을 따라 여기에서 저기로, 또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상상. 30분간 오로라를 보고 났더니 가이드가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5년간의 <1박 2일>을 끝낸 나에게도 누군가 다가와 자, 다음은 여기야 하고 안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 행선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하는 것이다. 아아, 차라리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지경이지만 어쩌랴. 어른인데, 이젠.

 

물론 개인적으로는 어른 맞나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고 있지만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아이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뭐든 다 아는 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1박 2일> 다음은 당연히 이거 아냐?' 또는 '바보야, 사회라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또는 '성공하려면 물어볼 것도 없이 무조건 이렇게 해야 돼' 등등의 말을 뱉으며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는 진리나 원리나 원칙이나 뭐 그런 것들을 훤히 꿰뚫고 있는 척을 해야 한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거고,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안 하는 게 어른이다. '나'가 원해서가 아니라, KBS 직원이니까, <1박 2일> 피디니까, 한 가족의 가장이니까, 팀의 리더니까, 무시당하면 안 되니까, 잘 보여야 되니까, 한마디로 어른이니까 등등의 핑계가 모든 결정을 내릴 때마다 줄줄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시간이 남아도는 어느 날,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런 핑계의 껍질을 하나둘 벗겨가다보면, 그 안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짜 '나'가 숨어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아, 어른은 개뿔. 나는 지금까지 '어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그래도 그 힘겨운 코스프레의 와중에도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있다. 파업이네 뭐네 하고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뇌는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 한마디로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특기인 '진짜 나'는 오랜만에 힘주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심심하지? 프로그램이나 하나 만들지 그래? 그때처럼 말이야. 지지고 볶고 울고 웃고 하는 그 지긋지긋한 일. 다시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나한테 말하는 것이다.

 

아이고 그래, 놀면 뭐하나. 일이나 해야지. 군대 제대하자마자 다시 군대에 들어가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이 미친 도돌이표를 나의 진짜 '나'는 명령하고 있다. 이 일이 좋은가보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해야지 뭐, 별수 있나. 싫어해봐야 나만 피곤해지는걸. 일하다 짜증나면 또다시 사표를 품에 안고 어딘가로 휴가나 가야지 생각한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