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됐어요, 아니 안 됐어요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8년 4월에 발간된 <나영석 피디의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의 본문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우리는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게 뭐니, 이게. 7프로? 이것도 시청률이냐?" 국장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그러곤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게 다 강호동 때문이야.

지금이나 그때나 톱MC는 유재석, 강호동이었다. 이들이 하는 프로그램은 늘 시청률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흥행 보증수표로 불렸다. 이 말인즉슨 이들을 데리고 있지 않은 피디에게는 일종의 면죄부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 재미없는데? 윗분들의 불평이 시작될 즈음 피디들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강호동, 유재석 핑계를 대곤 했다.

우리에겐 유재석, 강호동이 없잖아요. 그 양반들 데리고 오세요. 그럼 더 잘해볼게요.

이 핑계는 기가 막히게 잘 먹혀서 KBS예능국은 벌써 몇 년째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럴 땐 유재석 핑계, 저럴 땐 강호동 핑계, 큰 스트레스 없이 다들 즐겁게 각자 맡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강호동이 KBS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순간 태평성대는 끝났구나 하는 것을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시 무슨 이유에선지 이명한 피디와 나, 그리고 신효정 피디가 강호동과 진행할 새 프로그램에 배치됐고, 드디어 돌아온 톱MC와 함께 야심차게 시작한 <준비됐어요>라는 프로그램은 준비가 덜 되었던 건지 시청률이 바닥을 기는 참담한 성적표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참담한 성적표에 늘 따르는 변명, '강호동, 유재석 데려오세요'는 더이상 써먹을 수 없는 핑계가 되어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쨌든 국장님의 명은 실로 간단했다.

다 바꿔, 싹 다.

준비됐어요, 아니 안 됐어요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8년 4월에 발간된 <나영석 피디의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의 본문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우리는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게 뭐니, 이게. 7프로? 이것도 시청률이냐?" 국장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그러곤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게 다 강호동 때문이야.

지금이나 그때나 톱MC는 유재석, 강호동이었다. 이들이 하는 프로그램은 늘 시청률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흥행 보증수표로 불렸다. 이 말인즉슨 이들을 데리고 있지 않은 피디에게는 일종의 면죄부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 재미없는데? 윗분들의 불평이 시작될 즈음 피디들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강호동, 유재석 핑계를 대곤 했다.

우리에겐 유재석, 강호동이 없잖아요. 그 양반들 데리고 오세요. 그럼 더 잘해볼게요.

이 핑계는 기가 막히게 잘 먹혀서 KBS예능국은 벌써 몇 년째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럴 땐 유재석 핑계, 저럴 땐 강호동 핑계, 큰 스트레스 없이 다들 즐겁게 각자 맡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강호동이 KBS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순간 태평성대는 끝났구나 하는 것을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시 무슨 이유에선지 이명한 피디와 나, 그리고 신효정 피디가 강호동과 진행할 새 프로그램에 배치됐고, 드디어 돌아온 톱MC와 함께 야심차게 시작한 <준비됐어요>라는 프로그램은 준비가 덜 되었던 건지 시청률이 바닥을 기는 참담한 성적표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참담한 성적표에 늘 따르는 변명, '강호동, 유재석 데려오세요'는 더이상 써먹을 수 없는 핑계가 되어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쨌든 국장님의 명은 실로 간단했다.

다 바꿔, 싹 다.

네, 바꿔야지요. 우리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쯤 알고 있어요. 근데 바꾸는 게 어디 쉬워야 말이지. 당시 하고 있던 <준비됐어요>는 한자를 테마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강호동을 비롯한 MC 여러 명이 나와서 한자를 외우고 틀리면 벌칙을 받는. 흠, 한자는 안 먹힌다. 이건 증명이 된 거니 더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러면 새 프로그램 회의를 해야 되는데,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는 게 그렇게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최소 한두 달은 회의와 숙성 기간을 거쳐야 나오는 건데 문제는 그러는 동안 방송을 안 낼 수도 없다는 것.

 

'<준비됐어요>는 내부 공사중인 관계로 최소 한두 달은 쉽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 부탁드리며 준비가 되는 대로 돌아올 테니 그동안 옆 방송사 프로그램을 즐겨주세요.' 컬러바와 함께 자막으로 이렇게 내버리고 회의하러 산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거니까. 어쨌든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주일에 한 번 방송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피디들은 일명 '대충 찍기' 신공을 꺼내든다. 아무거나 그야말로 대충 찍으면서 나머지 역량을 회의에 집중한다. 촬영도 대충, 편집도 슬슬, 남는 시간에는 무조건 회의. 다행히 프로그램 제목도 '준비됐어요'다. 아무거나 시도해도 딱 좋은 제목.

뭐 찍지, 형?

이명한 피디에게 물어본다.

고민할 거 뭐 있냐. 에버랜드에 전화해봐. 

아아, 에버랜드. 에버랜드가 있었군. 요정들이 사는 그 나라는 예능피디들에게도 천국이었다. 거기 가서 뭐 하나 무서운 것만 태워도 60분짜리 방송이 뚝딱 만들어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난감했던 그 시절을 에버랜드와 함께 보냈다. 하루는 무슨무슨 익스프레스, 하루는 캐리비안 베이 미끄럼틀, 이런 식으로 방송을 때워나가며 남는 시간에는 회의, 회의, 회의의 연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충 찍기' 신공

당시 우리가 매달리던 테마는 '시골'이라는 주제였다. 연예인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뭐라도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몸뻬도 입고 밭도 갈고 하면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라도 생기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던 발상에서 시작했다. 이에 관해 오고간 대화들은 이러했다.

제목은 '컨츄리 스타' 어때? 제목도 제목이니만큼 컨츄리 꼬꼬를 섭외해. 도시에서의 인기에 안주하지 마라! 시골에서 인기 있는 당신이 진정한 연예인~ 이런 콘셉트로 말이야. 컨츄리 꼬꼬 섭외되면 닭도 한 마리 데리고 다니고, 애완용으로. 웃길 거 같은데?

마을 하나를 정해서 연예인들이 아예 거기서 사는 거야. 일주일에 단 이틀이라도. 거기서 일도 하고 사람들이랑 교감도 나누고. 어르신들이 딱 스무 가구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인 거지. 처음에 이 분들은 이 총각들이 연예인인지 모르는 거지.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예능프로그램은 잘 안 보시니까. 이름 따위 알 수가 없는 거야. 이 총각들이랑 교감을 쌓아가다보면 이름을 하나둘 외우시겠지?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마을회관 같은 곳에 모여서 어르신들께 이름을 물어보는 거지. 할머니, 이 총각 이름이 뭐예요? 응? 강호동이던가? 그럼 이 총각은? 신…… 뭐라더라? 그럼 가차 없이 땡.

틀리면 뭔데?

틀리면…… 마을에서 한 달을 더 있어야 하는 거지. 연예인들은 처음엔 시골이 너무 싫은 거야. 그래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해. 벗어나려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이름을 알려야 하니까 더 열심히 일도 하고 대화도 하고 교감을 하는 거지. 그렇게 두 달 세 달 시간이 흘러. 이제 스무 가구 중에서 열아홉 가구는 어느덧 이름을 다 외운 거야.

드디어 마지막 시험날. 마지막까지 틀리던 할머니가 드디어 멤버들 이름을 하나둘 얘기하기 시작해. 드디어 마지막 멤버 한 명, 예를 들어 지원이만 남겨둔 상황이야. 그 친구 이름만 대면 이 시골을 벗어날 수가 있는 거지. 마지막 이름을 대려는 순간, 이미 연예인들은 눈물바다인 거지. 저 이름만 불리면…… 한 달만이라도 이분들과 더 있고 싶다. 이런 기분인 거지, 다들.

이때 지원이가 울면서 뛰쳐나와 할머니 입을 틀어막으며 꺼이꺼이 우는 거지. 할머니, 말하지 마세요. 저희 그럼 가야 돼요. 말하지 마요. 이때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거지. 왜 그러니 지원아. 헉, 이건 뭐. 시청하는 전 국민이 울음바다인 거지. 아이고야. 어쩐대. 말해버렸네. 그럼 이제 헤어지는 거야, 저 사람들? 나 너무 슬퍼. 으앙~~ 이러면서. 어때?

뭐, 이런 얘기들이 오고갔던 것 같다. 흠, 손발이 오그라든다. 게다가 시골 가서 뭐 하지? 논 갈고 밭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재미가 있을려나? 걱정이 쌓여간다. 찍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준비됐어요>의 실패로 자신감도 꽤나 빠진 상황. 회의실은 다시 정적. 그리고 다음 주제로.

ⓒSteve Johnson/Unsplash

당시 시골 말고 두번째로 매달리던 주제는 바로 '복불복'이라는 틀. 거기에 관해선 또 이런 대화가 오고갔던 것 같다.

우리가 뭘 하든 말이지. 게임이든 뭐든 '복불복'이라는 틀을 가지고 가는 거지. 재밌지 않을까?

복불복? 그게 뭐냐? 복걸복 아냐? 복골복이던가?

아니야. 정식 이름은 복불복(福不福)이래. 복이냐 아니냐. 둘 중에 하나 골라라. 어때? 뭔가 도전을 할 때, 예를 들어 에버랜드에서 놀이기구 탈 때도, 잘만 고르면 면제인 거야. 꽝이 나오면 타야 되는 거고. 100프로 운에 맡기는 거지.

그건 어디서 많이 하던 거잖아. 우리도 많이 하고 있고. 너무 흔하지 않아? 가위바위보도 일종의 복불복인 건데, 가위바위보 한다고 시청률 잘 나오는 프로그램은 이제껏 못 본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상황만 적절하게 주어지면 재미있을지도 몰라. 흔한 게 뭐가 중요해. '복불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걸 하나의 틀로 가져가는 순간 새로워 보일 수도 있잖아. 연예인들도 재미있어할 거 같은데? 으악, 나 또 걸렸어. 아싸, 나는 통과야. 어때? 무조건 복불복. 바이킹을 타든,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를 타든 공포체험을 하든.

가만, 공포체험?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여름이다. 이번 주에도 뭔가 찍어야 방송을 낼 수 있을 텐데. 어디 폐교라도 하나 섭외해봐. 이번주는 공포체험이라도 찍어야겠네. 그거 할 때 복불복 시켜보든지.

그럴까? 회의는 뭐. 다음주에 또 하자.

그렇게 마무리. 아이고, 지겨워. 공포체험은 무슨. 이젠 그런 거 아무도 안 보는 세상인데. 그래도 어쩌랴. 이제야 고백하건대 우리는 그 당시 '대충' 찍고 있었던 것을. 그리고 '대충' 찍던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1박 2일>을 시작할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포체험을 하던 그 폐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