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8년 4월에 발간된 <나영석 피디의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의 본문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있던 날에는 일찌감치 달력에 동그라미를 해둔 터였다. 이날이다, 해방의 날. 모든 게 다 끝나는 날.

 

돌이켜보면 5년은 길었다. 무려 5년 동안 이 프로그램을 끌어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꽤나 유명한 피디가 되었고 자식 같은 프로그램은 여기저기서 상을 휩쓸었다. 그렇게 상을 휩쓸고 유명해지는 동안 이제 네 살 된 내 진짜 자식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서먹해하고 마누라는 길거리에서 사인 요청을 받는 남편을 창피하다고 모른 체하며 아이를 안고 저 멀리 앞서 가기 일쑤였다.

이런 젠장. 이런 대우 받으려고 열심히 일한 건 아니잖아.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구. 아니, 내 잘못인가?

어디부터가 내 책임인지, 잘한 일 잘못한 일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그리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뭔가를 판단할 시간 따위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일단 이 시기만 넘기고, 이번 방송만 잘 만들고, 복잡한 건 나중에, 중요한 건 다음에, 골치 아픈 건 뒤로,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그렇게 5년을 흘려보내고 드디어 '다음'이 왔을 때 난 (꿈에도 상상 못한 나이인) 서른일곱 살이 되어 있었고, 프로그램은 누군가 무를 동강내듯 갑작스레 끝이 나 있었다. 흠, 뭐 어때. 어찌 되었든 끝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제 쉴 수 있다. 숨을 고르고 이것저것 시간을 들여 생각할 수 있다.

ⓒStephen Isaiah/Unsplash회사에서 두어 달 휴가를 주려 한다는 것쯤 눈치로 알 수 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자상한 아빠가 되고 밀린 영화를 DVD로 탐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어쩌면 만화방에서 밀린 만화를 며칠 동안 보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고 마누라만 허락하면 어디론가 혼자 여행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 참, 대박이잖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하고 마지막 녹화를 하고 예상치 못한 눈물을 또 질질 짜고 그걸 또 편집을 하고 마지막 방송을 넘기고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방송은 잘 나가 드디어 2월 26일! 난 마치 말년 병장이 제대를 하듯 방송국 문을 박차고 나왔다.

 

마지막 테이프를 넘기자 평소 말이 없던 기술감독 선배가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어"라고 웃으며 말을 건넬 때 눈가가 좀 짠해지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슬픔 따위 제대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밤 같이 일한 후배 피디, 작가들과 같이 모여서 마지막 방송을 보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한동안 헤어지는 슬픔에 또 눈물을 좀 흘린 것 같지만 그것 또한 제대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헤어짐 같은 건 프로그램을 하다보면 늘 겪는 거야. 울고 있는 막내작가에게 난 속으로 그런 말을 건네며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늘어지게 자고 나면 난 자유의 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