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디자이너의 시각: 물리적 거리 vs. 심리적 거리

애프터 파티 장소인 VR 월드 앞에는 빨리 도착한 학회 참석자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듣기로는 최초이자 최대인 VR 시설이라는데, 일단 외견만 놓고 보면 여타의 게임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 뒤에서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명은 한눈에도 미국인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금발의 중년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어두운 피부색에 귀걸이를 한 젊은 남성이었다.

밖에서 본 VR 월드와 그 앞에 줄지어 늘어선 참가자들 ©김서경

VR의 매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며 끊임없이 설명을 늘어놓는 중년 여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응대하는 그의 손에는 작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케이스를 쳐다보던 내게 중년 여성이 활달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게 이번 쇼케이스에서 발표한 게임이야! 정말 굉장하지! 제드, 설명 좀 해 봐요."

 

제드라고 불린 친구는 무표정하게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 든 건 보드게임이었다. 설명서를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갔다. 게임의 무대는 필리핀으로, 플레이어는 마피아와 NGO 중 한쪽을 선택하여 민간인을 사살하거나 보호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왔어?" "부모님은 필리핀 출신이야. 나는 유학을 왔고. 이건 파슨스 졸업 작품."

 

마르코스와 막사이사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의 외조부가 막사이사이가 집권하던 시절 대통령궁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학회장에서 스치듯 이야기를 나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비디오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게임업계 및 미디어 쪽에서 일하던 제드는 이윽고 파슨스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게임 디자인을 공부하게 된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VR 쪽으로도 쉽게 넘어오던데. 3D 환경에 익숙하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해?"

 

"글쎄. 나로서는 VR이 제공하는 환경이 아주 기이하게 느껴져. 이번 서밋에 참석하긴 했지만 사실 난… VR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직접 해본 적도 없고."

 

호기심이 동했다. "그건 왜? 특별한 이유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