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난 택시 기사와 무서운 10대를 만나다

Editor's Comment

대우조선해양에서 5년 동안 근무한 양승훈 저자가 영국의 산업도시를 찾았습니다. 정부의 잘못된 대처와 경기 불황 등으로 쇠락한 그 지역 중 몇 곳은 겨우 명맥만 유지했고, 다른 몇 곳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살아남습니다. 그 풍경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산업도시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문화·산업정책 연구자의 관점으로 고민했습니다. PUBLY는 그 질문의 여정을 리포트로 만듭니다.


리포트 프롤로그를 공개한 지난 글(쇠락한 산업도시에서 영국을 떠올렸다)에 이어 본문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리포트는 4월 11일 오후 6시까지 예약 할인 가격으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구매하러 가기: 사라진 영국의 산업도시 - 조선업 실무자의 유람]

해양 무역의 도시, 머지사이드(Merseyside) 주의 주도 리버풀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리버풀 라임 스트리트(Liverpool Lime Street) 역에서 게스트하우스의 위치를 검색했다. 월러시(Wallasey) 근처에 있다. 월러시는 한국의 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나는 보통 숙소를 찾을 때 도시 이름을 쳐서 나오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한다. 하지만 이곳은 리버풀 중심지에서 멀어 보였다.

 

오후 5시. 피곤하고 허리도 아팠다. 서울이나 도쿄 정도 크기가 아니라면, 금방 도착할 거란 생각으로 택시에 탔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줬다. 갑자기 그가 짜증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지도 다시 줘봐요.
뭐 이런 데를 가려는 거야?
그냥 가만히 타고 계쇼."

 

기사는 왜 외국인이 우버(Uber)가 아닌 택시를 탔냐고 물었다. 우버와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도 드러냈다. 

 

"이민자들이 우버를 싸게 몰면서 우리 자리를 다 몰아내는 거 아니요?"

 

우버는 지원자가 간단한 조건만 충족하면 기사로 채용한다. 구글 맵을 활용할 줄 아는 수준의 지리 지식과 간단한 영어 능력만 있으면 무리없이 우버 기사가 된다. 택시업계는 반대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영업 허가를 받은 기사로서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 우버가 사업을 시작한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손님 입장에서 우버는 매우 효율적이다. 거리 등에 대한 단가가 모두 자동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흥정에 기운을 쓸 필요가 없다. 승차거부도 없다. 그래서 우버가 들어간 도시마다 기존 택시 업계는 타격을 받는다고 한다.
 

우버의 장점에 대해서 따지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불안감이 생겨서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너무 외곽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건너왔던 강을 다시 건너고, 구불구불 몇 번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비조로 말하는 택시 기사는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양승훈

서울로 여행 오는 관광객들은 대개 홍대(마포구 서교동/동교동) 근처나 명동(중구) 정도, 즉 시내에서 2km 내외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리 멀리 가도 성북구나 서대문구를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게스트하우스는 동쪽으로는 중랑구, 북쪽으로는 도봉구 정도로 먼 곳이었다. 리버풀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두리 같았다. 고생은 예정된 것이었다.

 

택시 요금으로 70파운드(한화 약 9만 7천 원)를 냈다. 카드를 받지 않아 캐리어를 열고 현금을 꺼내야 했다. 카드 결제를 요구하며 실랑이했던 시간, 부산하게 캐리어를 열어야 했던 1~2분 동안 혼이 나간 기분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역에서 정말 멀었다. 월러시는 서울로 치자면 강남역에서 구파발 정도 거리였다. 서북쪽 끝의 전형적인 노동자 마을이었다. 택시에서 내려서도 수십 분을 헤맸다. 건물에 들어가려는 찰나, 10대로 보이는 십수 명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나를 지나쳤다.
 

무서운 10대들을 만난 숙소 ⓒ양승훈

영국에 가면 무조건 10대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깡패 같은 녀석들에게 돈을 뺏기거나 갑자기 얻어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젊은 남성은 리버풀 악센트가 너무 심했다. 리버풀 악센트는 스카우스(Scouse)라고 부른다. 스카우스를 배우는 영상을 보면, 러시아 사람이 학생으로 앉아 있다. 설정부터 스카우스가 얼마나 독특한 발음인지 암시한다. 발음 자체에 강한 성조가 들어간다. 한국어로 치자면 함경도 말을 듣는 느낌일 것이다.

 


- 리버풀 악센트 강습

 

러시아어로만 들리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연신 "미안, 뭐라고?"를 외치며 다시 들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우자고 불러서 천천히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어려웠다.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가 생각났다. 이것이 영국인가!

 

시내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냐고 물었다. 버스로 20,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택시로 온 길을 떠올리니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근처에서는 무엇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10분 정도를 걸어가면 펍(Pub)과 요깃거리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아까 마주쳤던 10대들이 떠올랐다.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누워서 잠시 생각을 했다. 도저히 하룻밤을 묵을 자신이 없었다. 곧바로 짐을 챙겨서 숙박을 취소했다. 이틀 중 하루치 요금을 떼였지만 괜찮았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조금 더 비싸지만 안전해 보이는 숙소를 예약했다. 

 


-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

 

환불할 때는 좀 전에 있던 젊은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60대 남성이 카운터에 있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 위치를 알려주고 좋은 여행이 되라고 말했다. BBC에서 들을 법한 표준발음이었다.

 

버스를 타자 또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다. 버스비를 낼 잔돈이 없었다. 지폐만 있고, 동전이 부족했다. 버스 기사는 5분 간 차를 멈추고 다그쳤다. "돈을 정확하게 내쇼." 당황한 나에게 한 중년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얼마가 모자라나?" 그는 동전을 대신 내주었다. 나는 연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했다. 마을에 대한 불안감은 소년들에게 받은 위압감 때문에 생긴 막연한 감정이었다. 실체는 없는 것이다. 산업도시의 슬럼가, 노동자촌을 관찰하기 위해 왔다면서 그 중심에 들어가자마자 갖가지 편견으로 사람들을 재단했다. 새로운 숙소에 도착하는데 딱 25분이 걸렸다. 마음의 거리보다 실제 시간은 짧았다. 


마침내 리버풀 중심가에 도착했다.

새 숙소는 세련되고 모든 것이 매끄러워 보였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들은 친절한 목소리로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영국인 이미지, '신사' 그 자체였다. 버스에 타기 전까지 느꼈던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사람이 이렇게 알량하다. 몇 가지 단서로 오해하고 또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근처에서 만난 그 무서운 소년들이 조금 더 자라면 리버풀 어딘가에 위치한 호텔 카운터에서 표준어를 쓸 수도, 점잖은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영국에서 유학한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날라리' 10대 남자들이 40대가 되면 대부분 '무뚝뚝한 영국 신사'가 된다고. 

 

짐을 풀고 몸을 녹였다. 차를 마시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자 배가 고팠다. 빠진 혼도 제대로 돌아왔다. 매트리스에 몸을 뉘었다. 잠시 후 이불을 걷어찼다. 너무 겁을 먹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박물관에 담긴 리버풀의 과거

아침 일찍 동선을 짜고 앨버트 독(Albert Dock)으로 향했다.

 

앨버트 독은 1983년 머지사이드 개발 공사(Merseyside Development Corporation)가 도시재생 사업의 결과물로 만든 복합시설이다.1972년 폐쇄됐던 부두는 현재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같은 문화시설과 호텔, 상점이 모인 곳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다양한 상품이 교역하던 국제무역항이었다. ⓒ양승훈

내가 가고 싶은 장소 대부분이 그 근처에 있었다. 우선 시내에 있는 리버풀 박물관(Museum of Liverpool)에 들른 후 앨버트 독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해양 박물관을 방문하고 비틀스 투어(Beatles Tour)를 한 후, 비틀스 스토리 박물관(Beatles Story Museum)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리버풀 박물관은 비수기 맞이 공사 중이었다. 

 

앨버트 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항구로서의 기능이 멈춘지 30년이 넘은 곳이다. 넓은 터가 여기에 정박했을 배의 규모를 상상하게 만들 따름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해양 박물관의 원래 위치는 앨버트 독이 아니라 시청 근처였다. 20여 년 전 머지사이드 도시재생 과정에서 옮겨왔다고 한다.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닻이 보였다. 갤리선이나 증기선에서 썼던 것일까.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 전경. 방금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닻이 앞을 지키고 있다.

첫 번째 전시관에서 안전에 대한 기록부터 마주했다. 배의 침몰 사건을 상기하며, 안전을 강조했다.

 

조선소에서도 처음 나오는 표지판에 건강, 안전, 환경을 뜻하는 HSE(Health, Safety, Environment) 마크가 나온다.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뱃사람들에게 이런 문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곧이어 리버풀 만에서 침몰했던 배가 등장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사고 순간 용맹했던 선원들을 기리는 것은 항구도시의 하나의 의례다.
 

리버풀 만의 난파선에 대한 기록 ⓒ양승훈

해양 문화는 전쟁과 결합되기도 한다. 리버풀과 터널로 연결된 머지사이드 주의 또 다른 항구 도시, 버컨헤드(Birkenhead)의 조선소는 잠수함을 건조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다를 피로 물들이며 영국 해군을 괴롭혔던 독일 잠수함, 유보트(U-Boat) 때문이었다. 박물관은 잠수함을 비롯해 군함에 대한 기록도 남겨뒀다.

 

사실 리버풀 외에도 런던, 맨체스터, 뉴캐슬, 에든버러 어디를 가도 2차 세계대전을 기록한 박물관이 많았다. 그 기억을 새기는 것이 영국인들에게는 하나의 신성한 의식 같았다.
 

잠수함을 만든 독일 해군에 대한 기록 ⓒ양승훈

안으로 더 들어가자 조선업 자료들이 있었다.

 

다양한 물품을 포장하지 않은 채 그대로 실을 수 있는 벌크선과 화물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운송 상품을 보호하는 일이 중요해지자 등장한 컨테이너선이 보였다. 컨테이너선이 해운 시장의 대세가 되자, 영국의 조선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벨파스트(Belfast)에서 만들어, 리버풀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이 운영했던 타이태닉(Titanic) 호에 대한 기록도 나왔다. 화이트 스타 라인은 19세기 말 가장 화려하고 최신 기술로 지은, 대서양을 휘젓고 다녔던 올림픽(Olympic), 타이태닉, 브리태닉(Britannic) 호들을 운영했던 선사다.

 

1934년 크루즈 회사 카니발 코퍼레이션(Carnival Corporation) & PLC 산하 회사 큐나드 라인(Cunard Line)에 합병되기 전까지, 영국 최고의 페리 선사였던 화이트 스타 라인은 리버풀 사람들에게 영광의 상징이었다.

왼쪽부터 올림픽, 타이타닉, 브리태닉 호

조금 더 들어가자 해양 플랜트관이 있었다.

 

북해 브렌트 유전을 끼고 있는 영국은 브렌트유(Brent oil)를 만들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거래되는 원유 가격의 기준이 되는 유종이다.

 

두바이유와 서부 텍사스 중질유와 달리 브렌트 유전은 바다에 위치한다. 영국은 해상에서 원유를 시추하기 위해 정제 가공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영화 딥워터 호라이즌(Deepwater Horizon)에 나오는 멕시코만 석유 유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시추시설에 대한 운영권을 가진 회사는 영국의 BP(British Petroleum)였다. 시추선을 만든 곳은 한국의 현대중공업이었다.


반잠수식 시추선 모형. 북해 브렌트 유전 탐사용으로 보인다. ⓒ양승훈

해양 플랜트 기술은 기존의 노동집약적인 선박 운반 기술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설계하고, 건조하며, 운영한다.

 

선박은 운반이 중심이고, 해양 플랜트는 원유 시추나 정제 및 생산이 중심이다. 그래서 선박은 항해에 필요한 엔진, 항해장비 등을 제외하면 최대한 가볍게 짓는다. 복잡한 기계 설비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반면 해양 플랜트는 시추나 생산을 하는 지형 구조에 맞춰서 배를 짓고, 복잡한 기계 설비와 배관 설계가 들어간다. 기계 설비가 있기 때문에 전기 설비도 추가 된다. 영국은 유전을 가까이에 두고 해양플렌트 엔지니어링 실력을 백 년 넘게 다져왔다. 설계-건조-설치-운영, 각 단계마다 노하우를 쌓았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런 해양 플랜트 '건조' 과정을 주로 담당했는데, 2000년대 후반 '설계'와 '설치' 단계까지 포함해 수주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조선업계의 손실 대부분은 해양 플랜트 공정 지연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배 짓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훨씬 복잡한 구조를 세밀하게 처리하는 기술의 노하우가 부족했다. 

 

그리고 영국이 더 이상 해양 플랜트를 짓지 않는다는 점에도 생각이 미쳤다. 원가를 아무리 절감하려 해도 복잡한 설비를 만들면 품삯이 많이 든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중진국 문턱을 넘으면 노동력을 많이 투입하는 조선업 같은 산업은 결국 타산이 맞지 않게 된다. 보통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정도에는 원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엔진 전시관은 목선부터 강선까지 어떠한 방식으로 배 조립법이 발전했는지, 어떤 설비를 설치했는지 보여준다. ⓒ양승훈

오래된 항구의 역사, 산업혁명을 이끌며 축적한 다양한 기술의 역사, 기술을 구현한 장인과 노동자들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 산업도시 리버풀의 역사였다.

 

철판 두 장의 끝을 겹쳐 구멍을 뚫고 쇠못을 넣어 연결하는 방식으로 증기선의 선체를 만들고, 다른 산업에서 사용하던 엔진을 키워 선박에 탑재했다. 그리고 가까운 유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면서 해양 플랜트 엔지니어링의 노하우를 쌓았다.

 

바다와 맞닿아 산업을 영위해온 '축적의 시간'이 느껴졌다. 충분히 축적된 자본과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며 얻은 노하우를 통해 산업을 키워온 영국.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링 기술을 갖고 그 후예들을 양성해온 역사. 영국의 힘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산업의 패권을 넘겨줬다. 영국의 수출품은 산업의 흐름과 함께 바뀌어 왔다. 19세기 면직물과 철강 위주의 수출은 20세기 선박을 포함한 기계 상품 수출로 변했고, 21세기에는 자동차 부품, 석유화학제품, 컴퓨터 장비, 전자 기계, 산업 기계 등이 수출의 주력상품이 됐다. 이제 금융업이 영국의 대표 산업이 됐다. 한국의 다음 먹거리는 무엇일까. 

 

산업의 흥망성쇠를 다룬 해양 박물관의 위층에는 국제 노예 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이 있었다.

 

영국은 20세기까지 가장 많은 식민지를 지배했고, 가장 많은 노예를 만들어냈다. 리버풀은 영국의 가장 큰 노예 무역 도시였다. 자본가들은 노예 무역과 다양한 교역품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 부의 일부를 선단과 조선산업에 투자했으며 노동자를 고용해 배를 지었다.

 

박물관은 참혹했던 노예제의 현실을 그대로 전시하며 반성을 시도했다. 아프리카를 분할했던 열강의 지도, 흑인 인권 운동가들의 사진이 이어졌다. 바로 옆 시청각실에서는 인신매매∙납치가 횡횡했던 시기의 아프리카 마을 영상이 나왔다. 분노와 끔찍함에 치가 떨렸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가 이렇게 손쉽게 반성할 수 있는 걸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 식민지 역사에 대한 반성이 될까? 리버풀은 왜 도시가 스러져 가는 순간, 부의 원천인 노예 무역을 기록했을까?

과거 노예 무역을 반성하는 박물관을 세운 리버풀 ⓒ양승훈

비틀스를 낳은 노동자 촌의 흔적 

점심을 먹지 못한 채 비틀스 투어에 나섰다. 예약 시간이 오후 2시였다. 앨버트 독을 돌아다니고, 해양 박물관을 다녀오니 시간이 밭았다.

 

비틀스가 처음 공연했던 캐번 클럽(Cavern Club)이 투어 사업을 운영한다. 티켓에는 비틀스의 1967년작 앨범명,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Magical Mystery Tour)가 인쇄돼 있었다. 티켓을 수령하러 들어간 샵에선 비틀스의 싸이키델릭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어울리는 굿즈와 영국 특유의 디자인 상품들이 있었다. 

 

투어 시작 전 10여 분 대기했다. 캐나다, 러시아, 브라질 등에서 온 사람들은 조용히 담소를 나누면서 앨버트 독을 응시했다. 곧이어 버스에 올라탔다. 
 

비틀스 투어 버스 ⓒ양승훈

가이드는 60대 남성이었다. 본인은 리버풀 토박이로 노동 계급 출신이고, 비틀스의 세기를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도시 런던의 곱디 고운 소년들이 아닌, 노동자 촌의 아이들이 어떻게 세계를 뒤흔든 뮤지션으로 성장했을까? 영국 음악을 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킨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주역은 노동자 촌에서 어떻게 재능을 키울 수 있었을까?
 

존 레넌의 통학로였던 페니 레인(Penny Lane)(좌)과 폴 매카트니의 집(가운데), 비틀스가 어울려 놀던 성공회 성당(우) ⓒ양승훈

어젯밤 무서워서 도주했던 게스트하우스 근처와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 매일 페니 레인(Penny Lane)을 걸으며 놀러 다니던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즈 밴드의 피아노 연주자였던 폴 매카트니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의 아버지들은 변변치 않은 벌이로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다.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의 아버지는 선원으로 바다를 헤맸고, 링고 스타의 아버지는 날품팔이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시절이 길었던 존 레넌은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s)에서 친구들과 담배와 술을 배웠다. 깡패가 많은 육체 노동자들의 공동주택에 살았던 조지 해리슨은 시비가 붙기 싫어 테디 베어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일용직이나 자영업을 하는 아빠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많았던 서울 변두리에서 자란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s)

비틀스가 태동하던 시기는 산업의 호황기가 절정에 달아, 끝나가던 때였다.

 

버컨헤드에는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사 캠멜 레어드(Cammell Laird)의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에서 비틀스 노래에 나올 법한 핵잠수함이 건조됐다. 앨버트 독에는 세계의 물자가 벌크선에 담겨 왔다 갔다 했다. 영국 최고의 산업 항구이자, 상업 항구였던 리버풀에는 물자가 흔했다. 또한 리버풀의 청년들은 대서양을 타고 들어오는 미국의 문물을 런던보다 더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늘 같은 일을 하였기에 다른 방식을 상상하기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고루하고 답답한 노동계급 아버지 세대와 달리, 청년들은 전통에 반기를 들고 앨비스 프레슬리와 흑인 음악을 들었다. 늘 일터와 펍만 전전하며 심플 라이프를 살아가던 아버지들과 달리 청년들은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와 앨버트 독이 위치한 머지사이드 근처 바닷가 클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그 중에서 튀어나온 특별한 부류가 바로 비틀스였다.

 

공부하라고 강요하기보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던 노동계급 가정의 독특한 문화, 미국 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지리적 특성, 영국 제조업의 마지막 호황기가 만들어낸 풍요와 클럽의 호황 등이 결합한 환경 속에서 비틀스가 자랄 수 있었다. 

비틀스 박물관의 전시물 ⓒ양승훈

70-80년대 리버풀 인구는 85만에서 약 57만으로 1/3이 줄었다.

 

경쟁력을 잃어버린 조선업은 붕괴했다. 기존 작은 벌크선을 통해 물자를 나르던 항구 기능은 대형 컨테이너를 운반할 수 있는 맨체스터 운하의 개장으로 인해 소멸됐다. 결국 1972년 앨버트 독은 기능을 멈췄다. 1986년 리버풀의 실업률은 25%로 치솓았다. 젊은이가 떠나고 나이 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리버풀은 희망이 사라진 도시로 전락했다.

 

[사라진 영국의 산업도시]

리버풀, 맨체스터, 글래스고, 뉴캐슬... 영국의 몰락한 산업도시 풍경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