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간의 조선소 생활

Editor's Comment

대우조선해양에서 5년 동안 근무한 양승훈 저자가 영국의 산업도시를 찾았습니다. 정부의 잘못된 대처와 경기 불황 등으로 쇠락한 그 지역 중 몇 곳은 겨우 명맥만 유지했고, 다른 몇 곳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살아남습니다. 그 풍경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산업도시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문화·산업정책 연구자의 관점으로 고민했습니다. PUBLY는 그 질문의 여정을 리포트로 만듭니다.


리포트 세부 목차를 공개한 지난 글(영국의 오늘을 보며 우리의 내일을 질문한다)에 이어 프롤로그를 공개합니다. 리포트는 4월 11일 오후 6시까지 예약 할인 가격으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 조선업 40년 역사로 읽는 글로벌 경제' 리포트를 구매하신 분은 3월 31일 오후 6시까지 '조선업 할인'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구매하러 가기: 사라진 영국의 산업도시 - 조선업 실무자의 유람]

아무것도 모르고 조선사에 입사했다. 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랐다. 그저 여느 취준생처럼 회사(대우조선해양)의 전략상품인 해양플랜트 품목 이름을 외웠다.

 

반잠수식 시추 리그의 스펠링 'Semi-LEG'를 외웠고, 서류 전형 합격자 스터디에선 '드릴십'과 '시추선'이 무엇이 다른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사실은 'Semi-RIG'였고, '시추선'의 일부에 '드릴십'과 '반잠수식 시추 리그'가 들어갔다. 문과라서 배가 뜨는 이유, 배를 짓는 방식은 전혀 몰랐다. 다만 조선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 가지를 기대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조선소 풍경

언젠가 아버지와 술자리에 마주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다. 70년대, 선배를 따라 일을 하러 간 아버지는 울산 현대조선에서 마킹을 담당했다고 한다. 도면을 보며 부재 용접 위치를 확인하고 블록을 나눠 분필로 번호를 남기는 일.

 

일을 끝내면 조선소 근처 '하꼬방'*이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수십 명이 칼잠을 잤다고 한다. 합숙소 근처에는 선술집이 많았고, 봉급날이면 새벽까지 술판이 이어졌다고 한다.

* 상자, 궤짝 등을 뜻하는 일본어 하꼬(はこ)와 우리말 '방(房)의 합성어로 상자 같이 작은 집, 판잣집을 의미한다. - PUBLY

 

성실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알뜰하게 돈을 모았을 테고 나중에 정규직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일했다면 꽤나 부자로 살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기억 속에선 늘 많은 노동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노동의 피로를 푸는 사람들이 그려졌다.

 

회사에 합격했을 때 대학원 열람실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였다. 또한 아버지에게 들었던 사람 많은 동네, 노동자 문화를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학 전공자로서 회사 생활을 현장조사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노동자 문화 연구에서 시작해 이론으로 발전한 문화연구를 공부했기에 기왕이면 대규모 공단이나 조선소에서 일하고 싶었다.

조선소의 풍요로움은
충격적이었다

넉넉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돈을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딜 가도 누군가 '한 턱'을 냈다. 경조사가 있으면 누구나 빼놓지 않고 지갑을 열었다.

 

명절이면 경쟁이라도 하듯 '제대로 된 선물'을 주려고 애쓰는 이가 많았다. 벌이가 괜찮은 노동자는 항상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많은 선배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 회사 정도 다니면 다 된다."

 

좋은 회사에 취업했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회사니 좋은 반려자와 얼른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면 된다고 그들은 나를 독려했다. 현장 노동자 뿐만 아니라 사무직의 생각도 그랬다.

'88만 원 세대'로 불리며
고용불안과 취업 걱정에 벌벌 떨던 내겐
신세계였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반은 우스갯소리로 그 옷을 입고 결혼식, 장례식, 입학식, 졸업식, 소개팅을 다녔다. 똑같은 옷을 입고 획일화되는 스스로를 느꼈다. 약간의 짜증을 섞어 이야기하니 어떤 선배는 반문했다. "야, 거리에 나가면 다 우리 식구들만 있으니 얼마나 좋냐?"

 

수십 년의 호황이 그런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위기가 만성화된 상황이 되자 그 세계는 여기저기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위기가 불거졌다. 유가 하락이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조선소의 '히트 상품' 해양플랜트 수주 계약은 취소되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최종 생산에 이르기까지 엔지니어링의 미숙함이 만들어낸 공정 지연, 설계변경이나 자재 지연 때문에 생긴 손실을 최종 생산자인 조선소가 온전히 끌어안는 계약 구조 등에서 빚어진 연쇄 충격이 조선소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제조업 영역 중 스마트폰 회사가 아님에도 놀라운 영업이익률을 올려왔던 조선회사는 '자구계획'의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제 발로 떠나는 사람과 사직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왁자지껄했던 주변 식당가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술자리에선 웃음 대신 눈물이 흘러 다녔다.

마지막 산책

5년이라는 기한을 채우고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회사는 연인 같았다. 피붙이 가족처럼 당연하지 않고, 서로 탐색하며 정과 신뢰를 혹은 미움과 불신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입사 초년생 시절, 한 주에 2~3일씩 술자리가 열리자 그렇게나 좋았던 술이 싫어졌다. 정확히는 매번 똑같은 사람과 마시는 술자리가 싫었다.

 

매일 같은 사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술을 마셨다. 이 조직의 사람이 될 수 있으되 다른 세계와 접점은 끊어지리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아마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 탓일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조직문화에 투항하기
싫었을지 모른다

늘 술자리를 피했다. "매일 술만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회사가 망하지." 독설을 날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새 '회식을 기피하는 젊은 친구'로 자리매김했다. '비슷비슷한 사람을 만들려는' 조선소 문화가 지긋지긋했다.

 

퇴근 후 매일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데이터 과학을 공부했다. 언제든 다른 조직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전문성과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사 면담을 마친 후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났다. 동기, 선배, 일하다가 친해진 다른 부서의 동료 등 어떤 술자리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주말을 서울에서 보내며 다양한 일을 하는 지인들을 만나서도 퇴직을 핑계로 술을 얻어 마셨다.

"안은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

만화 미생(未生)의 경구를 떠올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 직장'이란 말이 죽은 지 20년 가깝게 지난 지금, '일장춘몽'이었던 조선업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위치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됐다. IMF 시기는 물론 얼마 전까지도 정년과 고소득을 동시에 보장했으나 이제는 글로벌 시장 침체 상황에서 제조업 쇠락의 첫 번째 타자가 된 조선업.

 

매일 술을 퍼 마시던 어느 날 숙취로 탈이 났다. 몇 개 남지 않은 월차 휴가를 쓰고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아침 겸 점심으로 마셨다. 마지막으로 '낮의 조선소'를 가벼운 몸으로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대를 잡고 거제도를 한 바퀴 돌았다. 조선소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는 거제도는 한편 관광도시다. 구조라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걷고, 산책로를 잘 갖췄다는 대명리조트에 처음 들어갔다.

거제도 대명리조트 산책로 ⓒ양승훈

산책로에서 마주친 아저씨들의 이야기가 귀에 꽂혔다. 

박정희 5개년 계획 말이다, 그거 어떤 놈이 장면이 만든 걸 박정희가 그대로 따라한 거라 하던데 내가 이랬다.

택도 없는 소리다! 누가 계획이 없어서 일을 못 했나? 실행, 실행을 해야지 말이다!

박정희 정권이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의 남동 임해공업지구를 거점 삼아 기반시설과 공장, 조선소 건설 사업을 대기업에 맡겼다. 그는 중공업, 석유화학 공업 발전을 통해 산업 고도화를 추구했다.

 

한국의 산업도시는 '도시'로서 기능한 지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이 주요 산업군과 거점 위치를 결정하면, 그에 따라 도시가 만들어지는 식으로 성장했다.

애초 한국 산업도시의 명운은
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됐다

영국 여행에서 만난 손정원 런던대(University College of London) 교수에 따르면 이 순서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한다. 도시의 자생력은 때가 묵고, 묵은 때를 벗겨내는 시간을 수십 번 거치면서 생겨난다. 마을에 사람이 모이고, 그에 맞는 일을 한다. 또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더 모여 큰 주택단지가 되고, 그와 걸맞은 산업이 등장한다. 때로는 산업이 먼저 등장해서 이주가 벌어진다. 도시와 산업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의 축적 단계에 따라 다양한 산업이 도시의 성장경로대를 따라 자라난다.

 

영국에서는 대학이 자리 잡은 오래된 중소도시 혹은 상업이 흥한 신흥도시를 기반으로 도시 안에 살던 부농이나 귀족들이 자본력으로 공장을 차렸다. 노동자들이 모이자 인구가 늘어나고 자연히 기존의 도시 공간은 새로운 모습으로 정비됐다.

 

영국의 도시는 이런 자생적인 방식으로 형성됐다. 많은 갈등과 혼란을 수습하면서 도시 자체의 역사성이 생겼다. 하지만 한국은 반대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같은 방식으로 지도 속 위치를 찍으면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곧바로 노동자들이 황량한 공간에 전격적으로 입주했다. 시설은 나중에 급조되었다.

 

우리 산업도시의 역사는 짧다. 내부적인 갈등을 조정하고 구획을 정비해본 경험이 부족하다. 게다가 영위해본 산업도 거의 한두 가지씩 뿐이다.

주력 산업에 위기가 닥친 때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도시는  
오랜 역사를 경험한 도시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산책을 마치고 거제도 바람의 언덕과 해금강을 마저 둘러봤다. 몽돌 해수욕장까지 다 보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 길에 눈물이 났다.

 

생각과 달리 회사에서 얻은 추억이 많았다. 회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괜찮을까. 물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내 진로도 고민됐다.

산업역군의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그 와중에 개념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숙련편향적 기술진보'*라는 개념이다. 고숙련, 고학력 일자리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고 고임금이다. 하지만 저숙련(주로 서비스업) 일자리는 다르다. 수요와 공급이 모두 많지만 기계로 대체하기에는 기계 설치비보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임금은 적을 수밖에 없다.

* 참고: 건국대 경제학과 권남훈 교수, 「불평등에 관하여 11-1: 숙련편향적 기술진보」

 

그렇다면 조선소의 일자리는 어떤 수준의 숙련도일까? 장인에 대한 예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지만, 오롯이 손재주만으로, 오랜 시간 한 종류의 일만 했던 사람의 '숙련'이라는 것이 과연 언제까지 경쟁력을 가질까.

 

30년차 조선소 용접 노동자의 기술은 경제학적 개념으로 중숙련 노동에 속한다. 이 기술은 노동자의 고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저학력자도 노동 현장에서 경험해가며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자동화된 산업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이 급속히 많아지는 이 시기에, 기계에 대체될 수 있는 일이다.

향후 기계가 가져갈 일거리를
능숙하게 처리해온 '기술'의 소유자들이
산업이 휘청거리는 시간을 버틴다한들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봉급이 나올 때마다 풍요로워지던 거제도 식당가 모습이 사라지는 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산업도시의 주인으로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모두가 잊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산업역군으로 모여들어 고된 노동을 하고 연대와 우애를 강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산업도시와 산업정책 그리고 엔지니어에 대해 실무자의 생각과 연구자의 고민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 시작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산업도시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에 무작정 가기로 했다.

 

산업도시 거제시에서 느꼈던 충격적인 풍요로움, 어쩌면 단순한 삶의 양태, 숱하게 마셨던 술 그리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흥망성쇠를 견주어 볼만한 도시와 나라가 떠올랐다. 글래스고, 뉴캐슬, 맨체스터, 리버풀... 영국이다.

 

[사라진 영국의 산업도시]

리버풀, 맨체스터, 글래스고, 뉴캐슬... 영국의 몰락한 산업도시 풍경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