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고서야

Editor's Comment

PUBLY는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망하는 'SLUSH, 핀란드라는 빙산의 일각'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SLUSH는 핀란드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스타트업 축제입니다. 

저자 박솔잎 님은 핀란드 알토대학교 대학원생으로 2016년 SLUSH 자원봉사자에 참여했습니다. 저자는 이 인연을 매개로 SLUSH 관계자 인터뷰를 포함하여 교육 기관을 중심으로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를 취재했습니다. 이 글은 리포트 일부로 저자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와 SLUSH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리포트는 4월 4일 오후 6시까지 예약 구매가 가능하며, 예약 기간이 지나면 가격이 인상됩니다. [바로가기]

11월 말의 핀란드는 영하 10도 안팎입니다. 흑야 현상 때문에 오전 9시 즈음에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석양이 집니다. 이런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이맘때만 되면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핀란드 수도 헬싱키로 모여듭니다. 스타트업 행사 슬러시(SLUSH) 때문입니다. 2016년 11월 30일부터 다음 날까지 전세계에서 온 17,500여 명이 슬러시 2016(이하 슬러시)에 참여했습니다.

Nobody in their right mind would come to Helsinki in November. 
Except you. You badass. Welcome.

 

미치지 않고서야 11월의 헬싱키에 오는 이는 없다. 
당신들 빼고. 너희 좀 쩐다. 어서 와.

 

- 슬러시 환영 문구

2016년 11월 30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가장 큰 컨벤션홀, 메쑤께스꾸스(Messukeskus)에서 슬러시의 문이 열렸습니다. ⓒ박솔잎

오프닝 행사는 파운더 스테이지(Founder Stage)에서 열렸습니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불을 주제로 꾸민 오프닝 무대에서는 진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불이 타오른 오프닝 무대 현장. ⓒSLUSH

행사장 중앙에는 스타트업을 위한 부스가 마련됐습니다. 2,300여개 업체와 1,100여개 투자사 관계자가 이곳을 찾았습니다. 

 

슬러시에서 만난 한국인 투자자는 토크 세션이 연이어 열린 무대, 블랙 스테이지(Black Stage)를 보고 "프로레슬링 경기장 같다.", "잘 놀아본 친구들이 만든 티가 난다."라고 감탄했습니다. 사방으로 열린 무대에서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360도 카메라로 실시간 중계됐습니다. 

토크 세션이 연이어 열렸던 블랙 스테이지. ⓒSLUSH

하지만 슬러시의 놀라운 점은 혁신적인 행사 진행이나 특이한 무대 장치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축제는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결과물이었습니다*. 소위 '높으신 분'들의 개입은 없습니다. 그 어떤 지자체나 교육기관도 슬러시 운영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 슬러시의 운영진과 시스템에 대한 내용은 리포트에서 자세히 소개됩니다. - PUBLY

 

모든 것은 20대가 주축인 젊은 사람들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헬싱키 시내 최대 규모의 행사장을 빌리고, 무대를 꾸리고, 전세계 스타트업 관계자에게 티켓을 팔고, 나아가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잘' 놀 줄 아는 핀란드 2030,
영하 10도의 헬싱키에
전세계 스타트업 관계자를
끌어모으다

이번 행사에는 2,300여 명의 청년들이 자원했습니다. 제가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만난 동료들은 물론 인터뷰에서 대화를 나눈 핀란드 젊은이들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핀란드를 청렴한 국가**로 인식했고, 학생의 기본 생계를 보장하는 복지제도에 만족했습니다. 슬러시를 통해 만난 젊은 핀란드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데 두려움이 적어 보였습니다. 

* 인터뷰 내용은 리포트에서 소개됩니다. - PUBLY
**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청렴도 인식 순위에서 핀란드는 매년 상위권을 차지했고 2015년 2위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한국은 37위, 2008년 후 순위권 정체 상태입니다. - PUBLY

 

또한 이들은 활기차며 실험적이었습니다. 슬러시를 기획하면서 억지로 최신 트렌드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행사를 주최하는 젊은 친구들의 일상 속 '핫'한 아이템이 바로 최신 트렌드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툭 던진 "미치지 않고서야"로 시작하는 이번 슬러시 환영 문구는 각종 SNS로 퍼져나가 유명세를 탔습니다. 

인포메이션 부스의 자원봉사자는 비니(핀란드의 겨울 필수품 중 하나)를 쓰고 방문객을 맞이했습니다. ⓒSLUSH

슬러시는 본래 자그마한 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몇 차례 세대교체를 거쳐 큰 규모로 성장한 지금도 그때의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먼저 자그마한 부스가 눈에 띄었습니다. 관객들은 깔끔한 의자 대신 (물류창고에서 방금 공수해 온 듯한) 나무 박스에 천을 깔고 앉아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쪽에서 B2B 미팅이,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기업가들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세션 주제는 가상현실부터 핀테크, 스트리밍, 교육, 놀이, 복지 등 다양했습니다. 얼핏 관련성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래에는 뭘 먹고 살지?"라는 공통된 질문으로 연결됐습니다.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입니다.*

* 자세한 세션 내용은 리포트에서 소개됩니다. - PUBLY

피칭 스테이지(Pitching Stage)의 모습. ⓒSLUSH

중앙에 앉아 있는 맷 크리스로프(Matt Krisiloff) 와이 콤비네이터(Y Combinator) 리서치 디렉터를 포함해 미국과 핀란드의 VC, 스타트업 관계자가 모인 토크 세션 현장. 주제는 기본소득이었습니다. ⓒSLUSH

국민 기업 노키아의 몰락 이후

저는 핀란드 젊은이를 잘 알진 못했습니다. 취침 전 자일리톨 껌을 씹고, 영어를 상당히 잘하며, 한국 학생보다 교실에서 훨씬 적은 시간을 보내고도 OECD 최고 수준의 학업 성적을 기록했다, 정도였습니다. 직접 만나 보니 자일리톨 빼고는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민 기업의 몰락을 어린 시절에 목격한 세대였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무수히 많은 핸드폰을 만들며 핀란드 경제를 지탱했던 노키아(Nokia). 2007년 아이폰 출시로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하자, 노키아가 몰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년에 불과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국민 기업 하나가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구조조정이 이어지며 무수히 많은 핀란드인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국가는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대학 나오면 노키아에 취직한다."는 핀란드의 믿음은 무너졌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핀란드의 경제 지표는 아직도 저조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핀란드 젊은 세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 위기의 10년 동안 스타트업 생태계의 자생력을 길러냈고, 매년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축제를 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싱가포르와 상하이, 도쿄의 젊은 세대에게 슬러시를 수출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리포트에서 소개됩니다. - PUBLY

청년 세대 중심의 스타트업 생태계,
노키아 몰락 이후
핀란드의 오늘을 비추다

슬러시의 성공과 핀란드 스타트업 성장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선 핀란드 사회 전체로 시야를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보장 제도 및 교육 정책, 청렴과 평등 그리고 실용주의 같은 키워드로 설명되는 북유럽 국가의 사회적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산업 육성' 프레임으로 슬러시를 해석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적어집니다. 단편적인 정책 벤치마킹 정도의 결론밖에 나올 수 없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답을 억지로, 서둘러 도출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리포트에선 슬러시를 매개로 만난 핀란드 스타트업 관계자 인터뷰 및 리서치 내용을 정리합니다.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행사를 만든 핀란드 젊은이와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짚어보겠습니다. 자연히 우리 사회와 비교되겠지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 위부터 사회혁신가 발표 무대, 푸드 코트, 소지품 보관소, 스타트업 피칭 공간을 가리킵니다. ⓒSLUSH

[SLUSH, 핀란드라는 빙산의 일각]

국민 기업의 몰락을 지켜본 핀란드 젊은 세대, 그들이 키워낸 유럽에서 가장 핫한 스타트업 축제와 그 이면의 특징을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