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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토야 - 가장 비싼 땅에 우뚝 솟은 문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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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야 - 가장 비싼 땅에 우뚝 솟은 문구점
들어가며

 

 

필름회사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코닥, 독일의 아그파, 일본 후지필름의 시장 지배력은 막강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열리자 필름회사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살아남은 건 일본의 후지필름. 하지만 필름 사업을 대폭 축소했고, 신사업인 화장품 사업으로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후지필름은 안티에이징 화장품 브랜드인 ‘아스타리프트’를 출시해 1년 만에 100만 개를 판매하고, 세계 뷰티 어워즈 6관왕을 수상하며 화장품 사업을 통해 부활에 성공합니다.

 

필름을 만들던 회사에서 화장품을 출시한 것이 낯설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필름과 화장품 사이에는 콜라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콜라겐은 필름의 산화 현상을 막는 역할뿐만 아니라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역할도 합니다. 70년 넘게 필름을 연구하며 콜라겐 성분을 개발했던 후지필름이 화장품 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핵심역량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남달랐기에 회생이 가능했습니다.

 

후지필름 사례처럼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날로그라는 이유로 기존 사업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찾는 것만이 방법일까요? 100년이 넘은 문구점 ‘이토야’는 기존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색한 위치에 당당한 매장

 

긴자 거리의 비싼 명품 매장들 사이에 당당히 위치한 이토야의 모습입니다. ⓒ트래블코드

긴자는 임대료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비싼 땅이자, 일본에서는 가장 비싼 상권입니다. 그래서 긴자 거리는 주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명품 매장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명품 매장 말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긴자 거리에 문구점 이토야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00년 전부터 긴자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조의 선견지명으로만 바라보기엔 현재의 모습이 위풍당당합니다. 

 

이토야는 12층 건물과 6층 건물 전체를 본관과 별관으로 사용합니다. ⓒ트래블코드

긴자에 있는 이토야는 12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어 명품 매장들과 견줄 만큼 눈에 띕니다. 게다가 12층짜리 공간이 부족해 뒤편에 6층짜리 별관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12층짜리 건물은 ‘G.이토야’로 ‘머물고 싶은 매장’을 콘셉트로 하여 2015년에 리뉴얼했고, 6층짜리 별관은 ‘K.이토야’로 ‘어른들의 비밀 아지트’를 콘셉트로 2012년에 오픈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정면승부를 한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아서가 아니라, 시대에 맞게 경쟁력을 갖추며 시간을 이기는 이토야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1. 객단가를 높이는 고급화

 

백화점처럼 층별로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매장을 운영합니다. ⓒ트래블코드

이토야 매장에 들어서면 백화점에 온 듯한 착각이 듭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물론이고, 공간 구성도 백화점과 유사합니다. 층별로 판매하는 제품군이 구분되어 있고 꼭대기 층에는 고객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또한 지하에는 전시회나 세미나 등을 여는 문화공간이 있으며, 8층에는 아카데미나 워크숍 등이 열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문구류를 사러 오는 곳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문화공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에 고급스러운 내부 시설까지 갖췄다면 긴자의 이토야는 손해를 감수하는 플래그십 매장일까요? 이토야의 현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이토야는 일본 전역에서 9곳에만 매장을 가지고 있으며, 마루노우치와 시부야 등 일본에서 임대료가 비싼 곳들을 중심으로 매장을 운영합니다. 다른 매장에서 돈을 벌기 위한 홍보용 매장으로 생각하기엔 전체 매장 수도 적고 각각의 매장이 플래그십 매장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핵심 상권에 있습니다. 모든 매장이 수익을 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구조입니다.

 

칼 라거펠트와 파버카스텔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인 한정판 색연필 칼 박스(KARL BOX)입니다. ⓒ트래블코드

이토야가 수익을 내기 위해 선택한 건 고급화입니다. 이토야에는 노트류와 필기구류 등 없는 카테고리가 없지만, 카테고리 내에서 모든 제품을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고급스럽거나 희귀한 제품들을 중심으로 매장을 구성했습니다. 단가가 낮은 제품군이라도 몇천 원대가 아니라 몇만 원대에 달하고, 비싼 제품군은 수십만 원대의 제품이 즐비합니다. 또한 2500개만 한정 제작해 개당 400만 원이 넘는 파버카스텔과 카를 라거펠트의 컬래버레이션 제품도 판매하며, 3000만 원이 넘는 지구본도 있습니다. 럭셔리 상품을 판매하는 명품 매장이 부럽지 않은 제품 포트폴리오입니다.

#2. 흉내 내기 어려운 전문화

 

단순히 고급 브랜드만 취급한다면 차별적 경쟁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토야는 전문성을 갖춘 매장을 추구합니다. 전문성을 추구하기 위해 제품 카테고리 내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고급스러운 만년필은 2000종류 이상, 세계 각국의 고급 노트도 2000종류 이상, 색감이 다양한 화구도 1600여 종을 취급합니다. 전문적인 제품을 원한다면 대안을 찾기 어려울 만한 숫자입니다.

타케오와 제휴하여 1000종류 이상의 종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트래블코드

특히 종이류는 더 세분화했습니다. 종이는 다 똑같을 것 같지만 이토야에서는 종이 코너를 2개 층에 걸쳐서 운영합니다. G.이토야 7층에서는 종이 전문점 타케오와 컬래버레이션해서 색깔, 질감, 목적 등에 맞춘 종이를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타케오는 100년 이상 고급 종이를 개발하고 생산해왔으며, ‘타케오 프라이즈’ 등을 통해 종이 문화와 종이 디자인의 발전을 선도하는 업체입니다. 8층은 포장지와 공예 종이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판매하는 물감의 색상과 질감을 알 수 있도록 실제 물감을 발라 보여줍니다. ⓒ트래블코드

이토야는 종류의 숫자만큼이나 종류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제품을 전문가의 눈높이에 맞춰서 전시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화구입니다. 유화물감의 경우 같은 색상이라도 제조회사별로 안료의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에 사용했을 때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전문가용 유화물감 제품의 질감 및 색감 등을 비교할 수 있도록 제조하는 회사별로 제품 시현 결과를 표현해 보여줍니다. 전문가의, 전문가에 의한, 전문가를 위한 제품 판매인 것입니다. 

#3. 어디에도 없는 맞춤화


아날로그 제품은 감수성의 영역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유행하는 제품도 의미가 있지만, 아무나 갖고 있지 않은 제품일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이토야가 맞춤화 서비스에 주목한 이유입니다. 이토야에서는 스스로의 감수성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감수성은 갖고 싶지만 취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도 희소성이라는 아날로그의 가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토야에서는 노트 제작, 펜 케어 서비스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트래블코드스스로의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제품을 맞출 수 있습니다. G.이토야 2층에는 ‘노트 꾸뛰르Note couture’가 있어 원하는 크기, 디자인, 질감의 종이를 선택하여 노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층의 ‘펜 케어Pen care’에서는 만년필 등의 필기류를 선호에 맞춰 튜닝할 수 있으며, K.이토야 지하 1층에서는 자신의 소중한 추억에 어울리는 맞춤형 액자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페이퍼 컨시어지에서는 고객의 취향이나 구매 목적에 따라 맞춤 상담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트래블코드

또한 취향을 갖고 싶거나 전문적인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G.이토야 3층의 만년필 코너에서는 전문가가 상주해 2000여 종의 만년필 중 고객의 니즈에 맞는 제품을 상담해주고, 7층에는 ‘페이퍼 컨시어지Paper concierge’가 있어 고객이 원하는 용도와 상황에 맞춰 적절한 색감과 질감의 종이를 제안합니다. 8층에는 ‘래핑 스타일리스트Wrapping stylist’가 대상과 목적에 따라 선물의 가치를 높이는 포장을 디자인해줍니다. 맞춤화는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아날로그의 보루입니다.

시간을 이긴 이토야

"전구가 발명됐지만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다. 양초는 예술의 영역으로 이동해 낭만적인 물건으로 용도가 달라졌다."

《문구의 모험》의 저자 제임스 워드의 설명입니다. 그의 말처럼 신기술의 제품이 구세대의 제품을 완전히 도태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만의 가치를 찾아 변화에 적응한다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수경재배 방식으로 채소를 기르는 11층 ‘Farm’의 모습입니다. ⓒ트래블코드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서, 명품 거리의 한복판에서 아날로그 제품인 문구류를 판매하는 이토야. 이 건물의 11층에는 ‘Farm’이 있습니다. 흙을 사용하지 않고 채소를 수경재배해 12층에 있는 카페, 레스토랑의 식재료로 활용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도시 농장의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손님들은 11층에서 창을 통해 야채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토야의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농장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의 틀은, 이토야를 리뉴얼하기 전에 긴자 거리를 수십 년 동안 바라보며 이토야를 지켜왔던 창틀을 재사용해 만든 것입니다. 미래를 추구하면서도, 과거를 계승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래와 과거에서 균형감각을 찾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토야에겐 시간을 이겨낼 자격이 있습니다. 

 

 

주소: 2 Chome-7-15 Ginza, Chūō-ku, Tōkyō-to 104-0061 일본

 

※ 본 프로젝트는 PUBLY의 오픈 프로젝트로, 콘텐츠에 대한 권리와 책임은 저자(트래블코드)에게 있습니다. 콘텐츠 관련 문의가 있으신 분께서는 contact@travelcode.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9 이토야 - 가장 비싼 땅에 우뚝 솟은 문구점 마침.

독자 리뷰

현재까지 570명이 읽은 콘텐츠입니다

  • 윤**

    콘텐츠의 내용도 충실하고, 한번은 도쿄를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진행되거나, 한국에 잘알려진 기업도 있지만, 왜 선정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들어있었고.
    한번 발행 된 이후에도 추가로 더 업데이트를 해 주는 점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 E***********

    세상을 보는 눈이 길러지는 느낌이 드네요. 만족합니다!

호우잔 - 고깃집에서 경매를 시작한 사연

다음 글 계속 읽기 →
총 32개의 챕터 220분 분량
  1. 1. 누구나, 언젠가, 한번쯤 퇴사준비생이 됩니다

  2. 2. 퇴사준비생의 도쿄 출장지 25

  3. 3. 아코메야 - 미리 보는 쌀가게의 미래

  4. 4. 미스터 칸소 / 니시키야 - 요리사가 없어도 요식업을 할 수 있을까?

  5. 5. 시루카페 - 커피를 공짜로 팔아도 돈 버는 카페

  6. 6. 마구로 마트 - 젓가락보다 숟가락이 필요한 참치 전문점

  7. 7. 카노야 애슬리트 레스토랑 - 조깅족을 위한 식당이 오피스 빌딩에 있는 이유

  8. 8. 아스톱 - 한 개의 매장 속 1000개의 피규어숍

  9. 9. 이토야 - 가장 비싼 땅에 우뚝 솟은 문구점

    9.1. 들어가며

    9.2. 어색한 위치에 당당한 매장

    9.3. #1. 객단가를 높이는 고급화

    9.4. #2. 흉내 내기 어려운 전문화

    9.5. #3. 어디에도 없는 맞춤화

    9.6. 시간을 이긴 이토야

  10. 10. 호우잔 - 고깃집에서 경매를 시작한 사연

  11. 11. 센터 더 베이커리 - 줄 서서 먹는 식빵 가게의 비밀

  12. 12. 아카데미 힐즈 -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

  13. 13. 파이트 클럽 428 - 주먹을 부르는 술집

  14. 14. 파운드 무지 - 숨은 ‘다움’ 찾기

  15. 15. 니콜라스 G. 하이에크 센터 - 공개적으로 숨어 있는 비밀의 시계 매장

  16. 16. AKB48 극장 / AKB48 카페 - 팬심이 자라나는 극장

  17. 17. 이키나리 스테이크 - 당신의 스테이크는 몇 g인가요?

  18. 18. 쿠시야 모노가타리 - 손님이 요리하는 튀김 가게

  19. 19. 니코니코 렌터카 - 주유소에 서 있는 자동차의 정체

  20. 20. 츠타야 티사이트 / 츠타야 가덴 - 지적 자본이 만드는 어른들의 공간

  21. 21. Knot - 5평 가게에서 파는 5000개의 시계

  22. 22. solco / 100% 초콜릿 카페 - 아는 것이 맛이다

  23. 23.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 - 잡화점과 편집숍의 결정적 차이

  24. 24. 도쿄 캐릭터 스트리트 / 지브리 미술관 - 캐릭터의 생명연장을 돕는 공간

  25. 25. D47 - 일본 47현에서 발견한 제품의 본질

  26. 26. 넘버슈가 / 페브 - 포장 디자인의 정석

  27. 27. B by B - 좁은 공간을 감각 있게 넓히는 지혜

  28. 28. [PUBLY only] 농가의 부엌 - 야채만으로 정면 승부하는 샐러드바

  29. 29. [PUBLY only] 아깝지만 담지 못한 곳들

  30. 30. [PUBLY only] 가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31. 31. 누구에게나 계기가 있습니다

  32. 32. 퇴사준비생의 도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