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고요히 응시하다

- 들어가며 -

이 글은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 프로젝트의 세 번째 미리보기글입니다. 프로젝트 저자, BIYN(Basic Income Youth Network)의 백희원님이 자신의 삶과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백희원님은 성공회대학교 협동조합 경영학과 석사과정을 공부했고, 현재 희망제작소에서 근무하며 기본소득 연구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발행된 다른 두 저자의 글 '망원동 동네서점에서 세계를 보다', '품위있는 직업인을 위한 기본소득'은 프로젝트 새소식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억 없는 존재들

서늘한 눈과

뛰어노는 다람쥐들"

 

이 하이쿠를 나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서 마주쳤다. 그 뒤로 가끔 정신이 산란하고 피로할 때 적어보거나 소리 내어 외어보고는 한다.

사계절이라기보다는 두 계절과 두 간절기에 가까워져 버린 한국의 봄∙여름∙가을∙겨울 중 좋아하는 계절은 무난하게 봄과 가을이지만, 여름은 여름 나름대로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 좋은 순간들이 있다. 이 하이쿠는 나에게 겨울의 가장 좋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빠른 속도로 걸을 때의 가쁜 숨 속에 섞여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살을 에고 뼈를 시리게 하는 추위는 싫지만, 속이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차가운 들숨만은 좋다.

 

이 촉각적 심상에서 나는 그림자의 윤곽을 쨍하게 가다듬는 겨울의 하얀 별과 검은 밤하늘까지 함께 떠올리게 된다. 공기가 잠잠하던 어느 초겨울 저녁, 낙하하지 않고 눈앞을 아주 천천히 가로지르던 작은 눈송이도. 그러면 어쩐지 타인들의 스케쥴과 얽혀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제 자리를 디뎌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1. 좋은 친구 덕을 보다

대학원에서 협동조합 경영학 석사 과정을 거친 뒤 올해 초부터 희망제작소에서 일하고 있다. 이곳은 현장에서 직접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실험을 실행해보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혁신적인 대안을 연구하는 시민참여형 연구소다.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한국 현실에 맞는 대안, 한국에 필요한 기본소득의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선택한 일이다. 

 

기본소득(Basic Income) 제도를 알게된 때는 2011년이었다.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월 충분한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아이디어의 첫 인상은 엉뚱했다. 하지만 평소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로부터 이 아이디어를 전해들었기 때문에 공부해 볼 마음이 들었다. 누가 말하는지가 이렇게 중요하다.

 

당시 출간된 몇 안되는 기본소득 저서인  「분배의 재구성」,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등을 통해 한 사회에 보편적인 현금지급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지를 이해한 뒤, 그것이 개인과 사회, 국가, 시장 간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지 구상해보게 되었다.

2012년부터는 다른 기본소득 연구자들과 함께 BIYN(Basic Income Youth Network)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에게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는 여러 주제를 새롭게 공부할 수 있는 소재가 됐다. 현재 공급 과잉의 노동시장에 기본소득이 가져올 효과, 불확실성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자원으로서의 기본소득, 사회적 안전망이 미비한 한국의 복지시스템에서 기본소득의 역할 등 다양한 고민이 시작됐다.*

* 언론 보도와 저자 개인 블로그에서 관련 기획 및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PUBLY
∙ 함께사는 돈 탐방기
∙ 청년, 기본소득, 복지국가 토론문

2. 취향과 기본소득의 관계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은 항상 다른 어떤 주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되어 나간다. 기본소득은 어찌할 도리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거시적인 문제들, 예컨대 저성장, 글로벌 빈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등에 대한 '해결방법'으로서 담론화 되어왔다. 그래서 '만병통치약'이냐는 비아냥을 사지만, 나는 이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발화되는 순간부터 세계에 기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착오적이지 않게 미래를 상상하고 전진할 수 있는 서사를 제안했다.

 

이 점은 특히 88만원 세대니, 삼포세대니 하는 말로 불려온 세대에 속한 나 같은 청년세대에게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청년들은 사회의 잉여, 혹은 스스로를 무엇인가 포기한 존재로, 부정적인 언어로 정체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사회가 청년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 역시 '청년'으로서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입장을 요구받곤 한다. 물론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정당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취약화하게 되는 함정이 있다. 기본소득 제도의 연구자이자 활동가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사회안전판으로서 기본소득을 요구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이기도 했다.

 

직장을 찾기까지 취향은 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성장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취향은 나를 세상과 구분시키는 하나의 닫힌 체계이다. 앞서 언급한 '기억없는 존재들', '서늘한 눈', '다람쥐들'은 안전한 나만의 겨울로 나를 데려다 준다.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교사인 아버지에게 퇴직 후 연금이 보장되어 있고, 우리 가족에게 살 집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빚이 아닌 가정이었다. 덕분에 나는 불안을 덜고 내 용돈 벌이만 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만 고민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감사해야 할 일 처럼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나에게 취향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누군가에게는 운동이나, 연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내면'에 대한 실감, 자급자족하는 의사소통 체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사회생활'을 헤쳐 나가는 데 꼭 필요한 안정감을 준다. 취향은 사회생활에 몰입하다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켜 준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권리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구성원이든 삶의 일부는 온전히 자기만의 것, 개별적인 경험으로 의미화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의 기준을 세우고 정교화하는 데에는 지속적인 시간이 들고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3.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 보고서 작성에 착수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고 싶고, 그래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공통의 합의에 의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내가 원하는 나, 내가 원하는 가정, 내가 원하는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수 '익명'의 시민들과 서로를 지지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내 부모가 원하는 가정, 국가가 원하는 공동체, 상사가 원하는 내가 돼서 살아야 한다. 그러한 요구들에 타협의 여지 없이 맞춰 살아야 한다면 삶은 '버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사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제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반면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더 발전시켜나가는 사회는 아마 다양성이 담보된 경합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을 보호하는 기본소득이야 말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특히 더 그렇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가장 많이한 생각은 한국은 유럽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해외 사례에서 읽히는 경영학적인 효율성과 합리성도, 이해관계에 기반해 협력을 택한 자발적 결사체의 공동체성도 내가 이 나라에서 봐온 효율성이나 공동체성의 용례와는 퍽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을 한 해 앞두고 기본소득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현재, 한국 사회에 적합한 기본소득 로드맵과 형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해외 사례의 진행상황을 검토하고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비판적인 따라하기를 경계하고 한국 현실에 맞는 기본소득 제도가 무엇인지 비교, 판단해야 한다. 

 

이에 PUBLY와 함께하는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프로젝트에서 나와 BIYN(Basic Income Youth Network) 동료들은 해외에서는 어떤 의미를 담아, 어떤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본소득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Y 컴비네이터의 기본소득 실험과 인도,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실험, 영국에서 발표한 기본소득 정책은 형태도 의미도 상이하다. 한국에서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월 24일(월),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프로젝트의 4번째 미리보기 글, 김주온 저자의 글이 올라옵니다.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실리콘밸리 액셀러레이터 Y 컴비네이터, 핀란드 정부와 네덜란드 도시 19곳, 한국 성남의 청년배당 등 전세계 곳곳에서 진행되어 온 기본소득 실험의 성공과 한계, 실패의 기록 

 

2012년부터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 동향을 꾸준히 연구해온 젊은 저자 5명이 참여하는 리서치 리포트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