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의 세계' 속에서

책을 통해 '만일의 세계'를 상상합니다. 

'만일의 세계'를 상상하는 곳. 위 문장은 제가 일하는 동네 서점 '만일'의 페이스북 소개 문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PUBLY의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프로젝트 저자 중 하나이자 동네 책방 만일의 직원인 윤대현입니다. 

 

만일은 망원동에 있는 소규모 서점입니다. 소규모 서점이라고 하면 독립출판물을 파는 곳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만일에는 ISBN이 찍힌 일반 간행물이 더 많습니다. 주로 사회과학, 문학 분야 책이 많고 예술이나 자연과학 책들도 꽤 있는 편입니다.

 

만일이 문을 연지는 이제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일하게 된 것은 1년 반 정도 됩니다. 만일에 대한 제 첫 기억은 트위터였습니다. 새로 생긴 서점 소식을 보며, 신기하다, 나중에 가봐야지 생각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BIYN(Basic Income Youth Network) 활동의 일환으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Basic Income은 기본소득을 뜻합니다. 기본소득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에게 조건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일정 금액의 소득입니다. 제가 어떻게 제 나이 또래인 20대 친구들과 모임(BIYN)을 꾸려 2012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는지 찬찬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만일을 알게된 때는 이미 BIYN 활동을 한지 몇 년이 흐른 후였습니다. 

 

당시 준비하던 세미나는 자유와 기본소득의 관계는 무엇인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적당한 세미나 장소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그때 책방 만일의 SNS 계정에서 사진을 하나 봤습니다. 만일을 배경으로  당시 출간된 바티스트 밀롱도의 「조건없이 기본소득」 책의 표지를 사진 속에서 찾았습니다.

바티스트 밀롱도는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입니다. 그가 쓴 이 책은 기본소득 개론서로 기본소득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기본소득의 취지와 예상가능한 반박들을 어렵지 않게 설명해줍니다.

 

이런 책을 알고, SNS에 올리는 책방 사장님은 어떤 분일까. 만일에 연락을 드려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장님도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분이셨고, 마침 저희의 세미나 이야기를 듣고선 책방을 세미나 장소로 대여해주셨습니다. 두달 정도 진행한 세미나가 끝날 때쯤에 책방 사장님이 주변에 아르바이트 할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두 가지 일, 두 가지 추천

제가 만일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취재 대응과 큐레이션입니다.

 

만일은 인기있는 책방입니다. 언론사나 잡지사에서 취재를 많이 오는 편입니다. 요즘에는 동네서점이 많이 생기면서 '동네서점 문화'도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만일도 그 문화 중 하나인 셈입니다. 

 

취재온 기자들과 편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책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인지, 편하게 얘기하다 그냥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에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없기 때문에 진짜일 것 같기도 합니다.

ⓒ책방 만일

옆에서 지켜볼 때, 책방 사장님은 작은 출판사에서 내는 책을 챙기시는 편인 것 같습니다. 베스트셀러도, 유명한 출판사의 책을 파는 곳도 아니지만 손님들은 꾸준히 오고 책을 사갑니다. 만일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우연히 오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작은 책방을 응원하고 싶은 분들, 책을 무척 좋아하는 분들인 겁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책방에 앉아 책을 정리합니다. 비슷한 제목의 책들을 모아보거나, 제목들로 이어지는 문장을 만들거나 별로 상관이 없어보이는 책들을 나란히 배치해서 맥락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윤대현

만일에서 일하면서 인상 깊게 읽은 책 두 권을 PUBLY 독자들께 추천합니다. 먼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입니다.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장소, 즉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 기본 테마입니다. 주제 자체가 맘에 들었고 문체도 어렵지 않습니다. 

 

두 번째 추천할 책은 「결핍의 경제학」입니다. 행동경제학 분야의 책입니다. 새로운 관점을 갖는데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이 책 주장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가난하게 스스로를 만드는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책 속에서 이런 주장을 증명한 실험이 나오며 직관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을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한 책입니다. 

 

주된 일은 아니지만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책방 옆에 작업실이 있는 친구와 베케이션 타임테이블이라는 독서모임도 만들었습니다. 방학의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고, 개학의 마음으로 힘들게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시 책을 잡다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책과 책방과의 인연은 만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9년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하기 전까지 저는 부산에 살았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헌책방 골목에 가면 길마다 책이 높게 쌓여있습니다. 높은 곳은 바닥에서 시작해서 제 머리 위까지 쌓이기도 합니다. 책들이 가지런히 꽃혀있는 서점이나 도서관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길가에 쌓여있는 책들을 구경하고 서점 안에 들어가면 넓지도 않은 공간이 나옵니다. 사람이 지나갈 통로 빼고는 다 책으로 쌓여있어서 뒤쪽의 책을 보려면 옆으로 걸어가야 할 정도입니다. 특별히 찾는 책도 없으면서, 설렁설렁 훑어보면 왠지 중요한 책을 놓칠 것 같아서 젤 위쪽부터 바닥까지 하나하나 훑어가며 살폈습니다. 몇 곳 보지않아도 두, 세시간이 지나있고 손 끝이 까맣게 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책수집 같은 취미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  저에게 책은 사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것이어서, 책방 골목도 그냥 구경할 목적으로 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굳이 커다란 가방을 매고 가곤 했고, 가끔 책 한두 권 가격에 좋아하는 만화책 한 셋트를 가득 담아오면 가방이 무거워서 더 즐거울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저인데, 대학생이 된 후에는 오히려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학과 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지막 학과 행사 참여는 아마 1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되서 가는 학과 단체 엠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히 싫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몇십 명의 사람이 다같이 모여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또 1살 많은 선배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어하거나 저를 굳이 예뻐해주려고 하는 것도 별로였고요. 그곳에서 친구를 찾으려면 어색한 긴 시간을 견뎌야했는데, 중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저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음해 저는 사회복지시설의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게 됐습니다. 

 

제가 일한 곳은 부모가 없거나, 양육여건이 되지 않는 환경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생활하는 양육시설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들은 모두 착해보였지만 그들의 생활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복지사들의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퇴근 시간은 다음날 오전 8시였지만 대부분은 다음날 점심, 늦으면 오후 네다섯시에야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가득한 집이라 그런지, 크고 작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은 많았고 인력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받는 임금도 매우 낮아보였습니다. 

 

제가 일하던 곳은 정부 표창장도 받을 만큼 대외적으로는 훌륭한 복지 시설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선 부당한 일들이 비일비재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부당한 지시에 반발해 일을 그만둔 복지사들은 관련기관장들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저는 삶의 터전을 빼앗기거나, 어쩔 수 없이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문명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겨우 삶을 이어갈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엄을 타인이 망가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막연한 생각이 쌓여갈 때 기본소득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조건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일정 금액의 소득. 신기하게도 짧은 한 문장에 고민들이 하나씩 스쳐지나갔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부당하고 불의한 일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본소득을 더 잘 알기 위해 온라인에서 참여인원을 모집하던 한 기본소득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만난 이들과 BIYN을 꾸려 지금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더 잘 알고, 알리기 위해 다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이란 층위

기본소득은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가능합니다. 가깝게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부터 시민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까지 다양한 이슈가 기본소득과 연결돼있습니다. 

 

PUBLY의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프로젝트를 통해, 저희 저자들은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활발하고 복잡한 논의를 정리해드리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9월 26일(화),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프로젝트의 2번째 미리보기 글, 박유형 저자의 글이 올라옵니다.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을 담다]
실리콘밸리 액셀러레이터 Y 컴비네이터, 핀란드 정부와 네덜란드 도시 19곳, 한국 성남의 청년배당 등 전세계 곳곳에서 진행되어 온 기본소득 실험의 성공과 한계, 실패의 기록 

 

2012년부터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 동향을 꾸준히 연구해온 젊은 저자 5명이 참여하는 리서치 리포트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