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힐을 신은 학과장

들어가며 : 이 글은 PUBLY의 Women at KAIST 프로젝트 유료 인터뷰 콘텐츠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Women at KAIST는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가 '여성'을 키워드로 과학하는 여자 7명과 남자 6명의 삶, KAIST 과학자 13명의 경험과 고민을 이어 인터뷰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펀딩에 참여하시면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가 인터뷰한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원장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포함해서 KAIST 구성원 13명(여자 7명과 남자 6명으로 구성)의 인터뷰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김소영 원장 편 외에 무료로 공개된 나머지 글은 PUBLY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이 :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원장

인터뷰어 :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일시 : 2016년 8월 24일

장소 :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연구실

사진 속 연구원 엄마는 휴일에 보육자를 찾지 못해 아이를 연구실에 데리고 와 일하고 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공모전 수상작으로 김소영 원장의 연구실 안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이진주

정치학자다. 페미니즘을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KAIST라고 하는 남초 사회에서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다 보니 여성문제에 무심해질 수는 없었다. 더구나 소싯적에 '운동'깨나 한 데모꾼이었던 처지인지라, 그에게 소수자 문제란 당연히 마음 쓰이는 주제다.

 

미인이다. '페미니스트'씩이나 내걸고, 인터뷰어가 누군가를, 특히 인터뷰이를 미인이라고 언급하는 데에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는 미인이다. 어디서나 눈에 띌만한 선 굵은 미모에, 화려하고 독특한 옷차림으로도 주목 받는다. 머리는 한 때 '나이아가라 파마'로 알려졌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김희선이 신세대의 아이콘이던 시절,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톡톡 튀는 드라마 속 막내딸의 성격을 외적으로 이미지화했던, 바로 그 사자머리 내지는 폭탄머리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세 딸 중 막내딸이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성적표를 '가'로 도배하던 골목대장이었고, 좀 자라선 공부건 연애건 시작을 하면 끝장을 봤다. 하고 싶은 걸 대체로 다 해야 직성이 풀렸던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단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세 아이를 부양하고
유창한 영어와 넉살좋은 사투리를 쓰며
하이힐을 '용기'내 선택한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원장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원장을 처음 본 건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한 세미나 자리였다. 첫눈에는 학생인 줄 알았다. 폭탄머리는 물론이고, 청바지에 형광 연두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청바지는 어디께가 쫙 찢어져 있었던가, 형광 연두색 후디에는 작은 공기구멍들이 나 있었던가. 참, 귀고리는 커다란 은색 후프 링(후프처럼 지름이 큰 원형 귀고리)이었다. 

 

입성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구두가 아주 높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놀라운데 무려 학과장이라고 했다. 킬힐을 신은 학과장이라니, 엄청난 인식의 낙차에 머리가 띵- 했다. 뒤풀이 자리로 옮겨서는 의외로 소탈한 성품에 반했다. 영어가 아주 유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플로리다애틀랜틱대학에 남아 조교수를 지냈다.

 

두어 달 후 애써 인터뷰 시간을 잡아 그를 보러 갔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 때 그가 어떤 옷차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기억에 남는 건 그의 구수한 말투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제주 출신이란 건 몰랐다.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혼성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넉살에 빨려 들어갔다. 

8월 24일 이진주 대표와의 인터뷰 중 연구실 책상의자에 앉아있는 김소영 원장. 뒤편 책장에는 과학기술계의 소수자 여성 문제만 따로 다룬 섹션이 있다. ⓒ이진주

나는 당시 큰놈의 초등학교 적응 문제로 제주와 대전을 오가며 한 달 넘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공계 여성들의 생존'이라는 대의명분을 잠시 젖혀두고, 우리는 자식 키우는 얘기들을 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이가 셋이었다. 우리는, 어딘가 좀 특이해서 학교 정글에서의 생존력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당신과 나의 다섯 아이들 얘기를 나누며 울고 웃었다.

 

세 번째엔 대학원 여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는 가슴이 살짝 패인 블라우스를 입고 나타났다.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 양반의 광팬이며 KAIST 여성친화적 남학생 중 하나인 이도 자리에 초청했지만, 영 부끄러웠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학생은 '우리 지도교수님의 칼럼'이라며 URL을 잔뜩 보내주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김소영이라는 사람이, 화려한 외모나 경력, 구수한 화법 말고도 날카로운 필력까지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무시무시한 여자였다.

 

네 번째에 마침내 본격적으로 마주앉아 인터뷰 질문을 주고받았다. 사전에 준비한 순서 따위는 당연히 무시되었고, 우리는 방담을 나누었다. '소공녀' 같은 성장배경, '작은 아씨들' 같은 자매애와 우정, '앤 셜리와 길버트 블라이스' 같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초원의 집'이나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육아와 생활의 이야기들이, 한 사람 안에 모두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기뻤다. 공존할 수가 있었다. 

소녀다운 추억과 화려한 취향이,
구수한 언변과 날카로운 정치성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틀에 박힌 '지성과 미모' 같은 수식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파격의 쾌였다.

 

예컨대 그가 옷을 그렇게 입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 '여교수처럼' 보이는 옷이 있다고 치자. 검거나 하얗거나 무채색이거나, 아무튼 지적으로 보이는, 점잖은, 무난한, 그러면서도 여성성을 잃지 않는, 스커트 정장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 옷 속에 사는 다른 자아는 감춰진다. 그는 그걸 싫어했다.

"직업적으로 요구되는 측면 외의

다른 자아, 다른 취향, 다른 성격을 드러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면,

겨우 옷 하나를 입는 데조차 용기가 필요하다면,

 

그래, 용기를 내자!"

그래서 김소영 교수는 보글보글 파마한 머리를 사자처럼 풀어헤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

 

그건 전략적으로 선택된 행동이었다. 내가 바비처럼 머리를 말고, 임신선이 드러나는 배꼽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통굽구두를 받쳐신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것이었다. 아직 이유를 찾지 못한 나의 행동에 이론적 뒷배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유급 위기의 골목대장

인터뷰 질문
4. 학교생활에 대해 여쭙습니다. 

과학고나 외고 등의 특목고 출신이신가요? 경시대회나 우열반, 특별활동 같은 걸 경험하셨나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인상적이었던 체험이 있으신가요? 선생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걸까요?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면?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기까지 연결돼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원래 성향은 이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헬리콥터 같은 기계 좋아하고 분명히 그랬어요.

 

당시엔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문과를 가는 거라서요, 저도 문과를 갔죠. 결국 KAIST에 오긴 했네요."

'겉은 천생 여자인데, 속에는 남자가 들었구먼, 쯧쯧' 언젠가 나는 그런 점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여자로 잘못 태어난 남자란 거였다.

 

김소영 교수도 그랬다.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을 남성적인 특질로, 순응적이고 수더분한 성격을 여성적인 특질로 생각하는 성별 이분법에 의거한다면, 그 역시 남성적인 성향의 여성이었다. 두 언니들이 얌전하게 공부 잘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성별이 남자인 이웃 친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말괄량이 골목대장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에게 '아들 같은 역할'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올레길(제주도 마을길)'의 골목대장이었어요. 공부를 전혀 안 했죠. 무의식적으로 딸 셋 중에 제가 아들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언니들은 여성스럽고, 엄마는 저한테 '언니들이랑 다르게 드세다'고 그러고, 그러면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더 강화되고요. 남자애들 이끌고 전쟁놀이하고 하고 그랬어요.

 

대장놀이, 전쟁놀이를 하려면 현금도 꽂아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 돈이 내 돈' 거의 그런 식으로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돈을 맘대로 꺼내 썼어요. 어쨌든 우리집이 제일 부자니까요. 동네 친구들 과자값 정도야 제가 냈죠."

꼬마 여장부는 힘이 세고 통이 컸다. 그리고 성적이 엉망이었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4학년에서 5학년 올라갈 때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어요. 성적표가 다 '가가가가가' 였는데, 유급이라는 거예요. 교육청 기준에 따라 얘를 올릴 수가 없다고요. 엄마가 빌어서 겨우 유급을 면하고 5학년이 됐어요."

천하의 제주도 여자 1등, 서울대 출신, 풀브라이트 장학생, KAIST 학과장이 초등학교 4학년을 두 번 다닐 뻔 했던 유급 후보생이었단다. 선행시킨다고 일찍부터 애들 잡을 것 없다. 할 놈은 결국 하게 된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어느 저녁이었는데요, 저 멀리서 우리 어머니가 오는 거예요. 부두 저쪽에서 여기로 걸어오시는데, 전봇대마다 기대 쉬어요. 너무너무 힘들어 보이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제 의문은, '우리집은 이렇게 부잔데, 우리는 이렇게 공주님처럼 키우면서, 엄마는 왜 사모님들처럼 예쁜 옷 안 입고 화장도 안 하고 저런 몸빼 입고 다닐까'였거든요. 그게 제겐 큰 퍼즐이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저 멀리서 너무 힘겹게 걸어오시는 걸 보고 한꺼번에 깨달았어요. 내가 엄마 지갑에서 막 빼서 쓰는 돈이 거저 나오는 게 아니었구나. 엄마 속 썩이지 말아야겠다. 그때까진 남자애들 때려서 엄마가 병원비 물어주고 막 그러셨거든요.

 

제가 개과천선을 했어요. 그 때부터는 언니들이 용돈 허투루 쓰는지 감시하고, 저도 공부만 하기 시작했어요."

 

자식이란 평생 부모 뼛골 빼먹는 존재란 걸 모르고 가는 새끼들도 많은데, 그걸 스스로 깨우친 어린 딸이 대견했다. 허나 그걸 혼자 힘으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신 김소영 원장의 어머니도 보통은 아니셨다.

실제로 존재하는 '새는 파이프'

인터뷰 질문
8. 여성으로서 과학/공학 분야를 공부하고 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여쭙습니다. 

여자가 왜 이과를 가는지 같은 질문에 부딪힌 바 있으신지요?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으신 적은요? 남성이시라면 동료 여학생이나 여교수님들께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유리천장'이나 '새는 파이프'라는 말이 있습니다.여성과 커리어의 양립이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관용어들인데요, 실제로 여성이라는 게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 장벽이 되는지, 본인이 경험하거나 관찰하신 바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이공계는 아니었지만 제가 경험한 것도 비슷해요. 서울대 학부에서 정치학을 부전공할 때 저만 여자였어요. 대학원에서도 저랑 이대에서 온 친구 둘 뿐이었어요. 오랫동안 여자가 없는 분야였는데도 아무도 문제시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정치학과나 사회학과나 거의 여자들밖에 없고요.

 

반대로 제 전공인 사대 영어교육과에서 86, 87학번 남자는 2명뿐이었거든요. 88년 저희 때 선지원으로 바뀌면서 남자들이 처음 늘어났고요. 남학생이 많다고 해도 6:4, 7:3 정도고,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죠."

왜 이런 일들이 생길까. 왜 어떤 분야에는 여자들이 몰리고, 왜 어떤 분야에는 남자들이 몰릴까. 정치, 경제, 공학 같은 거대한 학문들은 애초 남자들의 것이고, 양육과 교육과 살림을 담당하는 건 오롯이 여자들의 몫일까. 타고난 머리와 성향이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게 살아남는 데 유리해서일까. 그리고 무슨 조건이 달라졌기에, 어떤 분야에서는 '방 안에 나 하나 뿐'이던 여자들이 그라운드를 점령하게 되었나.

 

직업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어떤 직업은 남자직업, 왜 어떤 직업은 여자직업으로 꼽히는 걸까. 남성과 비슷한 잠재력을 가진 여성들이 정치인이나 펀드매니저나 엔지니어 대신 교사직을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임신과 출산과 양육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중도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을 보면 명쾌해진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제가 KAIST에 부임해서 느낀 건 크게 두 가지였어요. '아, 다 검은 머리구나!' 그리고 '아, 여자들이 진짜 없구나!'

 

첫 번째로 놀란 건 강의실에 앉은 70명 모두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한 십 년,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지내다 보니 노란 머리부터 빨간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민머리, 이런 머리 저런 머리를 봤는데, 여긴 전부 단정한 검은 머리예요. 충격적이었어요.

 

두 번째는 사실 바로 느낀 게 아니고, 다른 학교 출장을 갔다가 KAIST랑 비교해 보고 놀랐던 거였어요. 저 다닐 때(88년)에는 서울대에 워낙 여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KAIST와서도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연세대에 출장을 갔더니 새 건물도 너무 많고 여학생도 너무 많은 거예요. 여대인가 싶을 정도로. 대학 전체에 여자가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서울대도 연대도. 근데  KAIST에만 여전히 적은 거였어요."

그의 문제의식은 KAIST의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외에 WISET(Center for Women In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 재단법인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의 멘토,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중장기정책위원장 같은 역할을 더하며 명확해졌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WISE 멘토링(Women Into Science and Engineering)'의 멘토로 활동하면서 '왜 여학생들이 이공계에 이렇게 적은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이공계에 여학생이 적으니까 많이 데려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러다 3-4년 지난 다음 대학원생들과 자주 보다 보니 '새는 파이프 현상'을 발견하게 됐어요. 

 

생애주기에 따라 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을 거치게 되는 여학생들이 학부에서 대학원 진학을 안하거나 석사 이후 박사를 못하는 현상, 박사를 받고도 관련 분야에서 일하지 못하는 현상들이죠.

 

대학원을 운영하다 보니까 '학생들을 아무리 꼬셔서 이공계에 데려온들, 책임을 못 지는 거 아닌가' 싶죠."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잃어버리지 않고 활용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우선 이 분야에 여학생들을 더 많이 들어오게 하는 것도 중요한데요,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죠. 어떻게 하면 경력단절 없이 쭉 유지해서 갈 수 있는가 그런 걸 고민하는 거예요. 

 

임신, 출산, 육아 문제도 그렇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예컨대 노모를 돌봐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여자들이 더 부담을 하게 돼요.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돌봄 노동이 여자에게 집중돼 있어요. 저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의 고용률은 M자 커브를 그린다고 알려져 있다. 20대에 최고점을 찍고, 30대에 떨어져 경력단절을 겪고, 40대에 경력전환이나 재훈련을 통해 다시 사회에 나오는 그림 말이다. 그런데 과학기술 분야는 조금 다르단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과학기술 분야는 L자예요. 경력단절 여자의 경우 완전히 도태돼요. 그 학문 분야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는 거죠. 

 

연구개발 쪽은 특히나 한 번 경력이 이탈하면 다시 돌아가는 게 어려운 분야가 많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새는 파이프를 막을 수 있을까. 그의 고민이 실질적인 정책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어깨라도 두드려드리고 싶어졌다.

하루하루의 일 년, 하루하루의 평생

인터뷰 질문
13.자녀는 어떻게 두셨습니까?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인생에 어떤 의미였나요? 아이를 품고 낳고 키운다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와 양립할 수 있는 일이었나요? 육아휴직 등의 모성보호 제도는 어땠나요? 양육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지,살림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들려주세요. 제자들과 자녀를 키울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으십니까?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어요. 첫째가 딸이예요. 1996년 겨울에 결혼해서 97년 9월에 허니문 베이비로 첫째 낳고, 99년에 둘째, 2000년에 셋째까지 낳았어요. 쉴 틈이 없었죠. 처음에는 부부싸움을 많이 했는데 셋째 낳은 후로는 평안해졌어요." 

기혼 여성 유학생들의 경우 '친정엄마찬스'를 쉽게 쓰지 못한다. 아무리 보육제도가 잘 돼 있는 미국이라 할지라도, 혼잣손으로 육아와 살림을 하다보면 공부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아이가 셋이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그를 지탱해 준 파트너는 친정 어머니였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제가 유학 갈 때 엄마가 따라오셨어요. 아버지랑 사이가 불편하신 김에 사업을 정리해서 건물로 남겨놓고 미국으로 오셨죠. 살림도 해 주시고, 애 셋도 다 돌봐주셨어요. 

 

그 때 어떤 선배가 그랬어요. 자기는 '다른 여자의 희생을 딛고 성공하는 여자가 너무 싫다'고요. 한동안 괴로웠어요. 그런데 '다른 여자의 희생을 딛고 성공하는 남자는 문제가 없나',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선배도 유학을 나왔는데, 부인이 약사였거든요. 커리어를 접고 도왔던 거죠.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잖아요. 아내의 희생을 딛고 성공하죠. 저도 '엄마 도움을 120프로, 200프로 활용해서 더 열심히 해야지' 싶더라고요.

 

그러다  2006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졸업식 때(2003년)엔 투병 중이셔서 아버지가 오셨어요. 고생의 열매는 아버지가 보신 셈인데, 너무 속상했어요."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할 때는 여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친정 어머니는 그가 만들어가는, 강인한 여자들의 시조이기도 하니까.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어디선가, '공부를 많이 하면 공부가 늘고, 운동을 많이 하면 운동이 늘듯이 걱정을 많이 하면 걱정이 는다'고 말하던데, 그래서 저는 걱정을 하지 않아요

 

누군가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자)'가 공무원의 복지부동 정신을 표현하는 새 표어라고 나무라던데, '워매 나는 딱 저런디 어쩐댜' 하고 말죠. 하루하루 수습하며 살아가는 것밖에는 무슨 방법이 있나요.

 

어떤 대단한 여성 멘토가 그래요. 

자기도 그럴 듯한 스토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없다고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거예요. 저도 그래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하루하루', '죽거나 아프지만 말고 버티자. 버티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이건 나를 포함한 모든 워킹맘들의 표어일 터다. 우리가 뭐 엄청나게 크고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오 분, 앉아서 밥 먹을 수 있는 십 분, 쪽잠이나마 잘 수 있는 삼십 분, 끊어지지 않고 책 한 줄 읽을 수 있는 한 시간, 그저 숨 쉴 수 있는 틈을 소박하게 바랄 뿐이다. 그렇게 버틴 하루하루가 모여서 일 년이 되고, 평생이 된다. 아이들은 자라고, 엄마도 성숙한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한국 사회는 참 빨라요. 일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여자들한테는 더 힘든 게 있어요. 똑같은 노동조건에 그거 외에 부담을 지고 가는 게 많기 때문에요.

 

저는 핸드폰을 쓰지 않아요. 스마트폰이 아니라 아예 핸드폰이 없죠. 그게 없으니까  대신 이메일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요.

 

애들 밥 주려고 몇 시간 떨어져 있는 사이에 직장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일이 안 되면 어떡하죠? 일하는 시간 말고 가정을 유지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 사이에 여러 결정이 나버리니까 여자들한테는 더 터프한 환경인 거죠." 

김소영 원장은 시간을 뺏길까 봐 핸드폰을 쓰지 않는 구식의 존재다. 워킹맘의 주변에는 시간을 뺏어먹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라도 끊어내지 않으면 휘둘리고 만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저는 진짜 한 가지 꿈이 있다면, '저녁 회식 좀 하지 말고, 6시 땡 하면 안 되나' 그런 거예요. 물론 대학은 기업이나 그런 데 비하면 훨씬 나은 환경일 거예요. 

 

근데 미국에 비하면 멀었죠. 미국에서 교수회의 할 때는 금요일 하루 날을 잡고 아무도 수업 안 하게 해요. 그리고 그날 점심에 모여 샌드위치 먹고 딱 집중해서 회의하고 말았는데요. 여기는 회의도 너무 많고, 기본적으로 여섯 시에 집에 가는 사람이 없어요."

회의와 회식과 야근을 끊을 수 없어서 핸드폰을 끊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지만, 종합해보면 그랬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뭔가 멋있는 이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너무 편한 거예요. 핸드폰은 워낙 방해를 많이 하는 물건이잖아요. 일장일단이 있죠. 불편한 게 있고 편한 것도 있고요.

 

KTX 티켓 같은 것은 미리 종이로 출력해야 하고 그런 면은 불편한데요,진짜 중요한 일들은 이메일이로 처리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글로 쓰기 애매한 일들을 전화로 처리하는데, 이메일로 처리하면 저절로 문서화 되어서 좋더라고요. 뭐든지 오픈을 하면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거죠. 남편은 3G 폰 하나 있고, 세 아이들은 하나도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지금 사회랑 거리를 두는 하나의 방식이랄까요. 외국에 있지는 않지만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죠. 아웃사이더적인 그런 걸 즐긴다고 하나. 정 급하면 빌려 쓰면 돼요. 

 

제 생각은요, 핸드폰으로 미세하게 관리감독 한다고 해서 사고가 안 나거나 하지는 않아요. 막을 수 없는 일이예요. 기왕 생긴 일은 어떻게든 연락이 되고요."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관리감독하고, 아이에게 생긴 일로 부모가 덩달아 일희일비하는 세상에, 요즘 보기 드문 담대한 어머니다. 옷차림도 유행을 싫어한다더니, 양육방식마저 유행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건 보통 배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도 그러셨다. 제주가 낳은 수재였던 큰딸(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의 큰 언니)이 서울대 가서 학생운동을 하다 그 일환으로 인천의 공장으로 갔을 때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한 마디만 하셨단다. 내심 아들처럼 여기던 수재 막내딸이 좋은 장학금을 받아 유학가기 직전에 옛 동네 친구를 데려와 결혼하겠다 할 때도, 오히려 눈 하나 꿈쩍 않고 '애보기'로 따라나서셨던 양반이다.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그런데 제 이런 성격을 이용해 먹는 학생들이 있어요. 제가 자유방임 스타일로 거의 방치하거든요. 그걸 핑계 삼아 대학원 와서도 날아다니는 것 같아요. 

 

자유방임인 이유 첫 번째는 제가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고요, 두 번째는 어릴 때부터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대학원에 목매달아 살 것도 아니고 안 맞으면 나가서 다른 거 하면서 살면 돼요. 너무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자들에게 남기는 말도 딱 그 같다. 프리해 보이는 가운데, 뼈가 있다. 나는 이 멋진 여자와의 정신 없는 수다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 4, 8, 13번 인터뷰 내용을 포함한 인터뷰 전문(全文)은 유료콘텐츠를 통해 발행됩니다. -PUBLY

 

[Women at KAIST]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의 본격 인터뷰 시리즈

 

과학하는 여자 7명과 남자 6명, KAIST 교수와 학생 등 구성원 13명의 삶을 '여성'이란 키워드로 인터뷰한 콘텐츠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