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의 기회 1. 태동하는 신사업
한국의 산업 구조가 바뀌고 있습니다. 중공업, 제조업 등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기간 산업들이 위기라 합니다. 일시적 불황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상실하여 장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식시장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석유, 철강, 건설, 조선 등 중공업과 전자제품, 디스플레이 등 주요 IT 제조업의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 5년 동안 급격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에그 베네딕트
반면 SW/게임, 제약/생명공학 등 벤처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은 미국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하였습니다. 국내 바이오 벤처들의 연구 파이프라인(제품 특허 인증은 받았으나 시험이 필요한 발명품으로 제품화 과정이 오래 걸리는 제품)이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에 수백~수천억 원 대에 인수되는 일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식 시장에서도 벤처 산업의 비중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5년 전 약 1%에 불과했던 제약/생명공학 산업의 시가총액 비중은 2015년말 약 6% 이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에그 베네딕트
기존 기간산업의 쇠퇴와 이로 인한 불경기,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관련 종사자들의 고통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정부와 주요 경영진의 부도덕과 무능이 기간산업 경쟁력 약화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도 반드시 명확히 짚고 갈 문제입니다.
그런데 기존 기간산업의 쇠퇴는 근본적으로 산업 수명주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1960~80년대에 국가가 전략을 주도하고 해외 차관 등의 자본을 레버리지하여 근면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으킨 한국의 기간산업은 제2, 제3의 한국을 꿈꾸는 국가들에게 그 경쟁력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행인 것은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들은 훨씬 더 건전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존 주요 기간산업들이 국가 주도형 산업이었다면 최근의 성장 산업은 철저히 민간 중심입니다. 주요 소프트웨어, 바이오 산업은 개인 창업자들이 열정과 기술을 가지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필요한 자본은 벤처캐피탈들이 투자하여 지원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새로운 산업의 태동은
벤처 투자업계가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집니다.
불과 5~6년 전까지도 VC(Venture Capital)들의 주요 역량은 삼성, LG 등 거대기업의 기획, 구매 라인의 전략 방향을 추측하거나 먼저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거대 기업이 기득권을 가진 채 산업 성장을 주도하는 경제에서는 VC들의 투자기회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거대 기업의 사업계획에 맞춰 대규모 수주가 예상되는 기업을 찾아 시설자금/운전자금을 투자하고 해당 수주 매출이 극대화 되었을 때 재빠르게 IPO(Initial Public Offering)하는 것이 일반적인 투자 전략이었습니다. 투자를 하더라도 대부분 거대 기업의 사업 전략에 맞춰 투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바이오, 소비재, 서비스 산업의 성장이 VC 투자 판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의 흐름, 우수한 창업자들이 포착한 사업기회와 전략, 그들의 열정에 함께 호흡하며 다양한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VC의 기회 2. 높아지는 민간 투자 비율
민간 투자자의 증가도 VC에게는 기회입니다. 벤처캐피탈은 일반적으로 외부 투자자로부터 출자 받은 투자조합을 통하여 투자를 합니다. 외부 투자자는 모태펀드, 연기금 등 공공부문과 시중은행이나 일반 기업 등의 민간부문으로 나뉩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5년 VC 결성 투자조합의 일반법인 출자 비중은 14.5%로 전년 9.5% 대비 5% 가량 증가하였습니다. 민간 출자 비율만이 아니라 투자 금액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2012년 약 8,000억원이었던 신규 VC 조합 결성금액이 2015년에는 2.6조원으로 약 3배 증가하였는데도 민간출자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것 입니다.
또 하나 눈 여겨볼 사실은 개인 투자의 증가입니다. 2015년 개인투자자들은 벤처투자조합에 약 900억원을 직접 출자하였습니다. 또한 2015년 엔젤투자금액도 약 1,400억원으로 전년비 67.7%나 증가하였습니다.
민간 투자자의 증가와 함께 투자 시장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현업에서 느끼는 경험과 현상들 위주로 설명하겠습니다. 기존 민간 기업의 벤처 투자는 주로 CVC(Corporate Venture Capital)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부분 CVC들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정도의 거대기업의 자회사였고 주요 투자분야도 모기업의 협력사, 관계회사로 집중되었습니다. 인력도 모기업의 기획, 구매 부문 출신 위주라 투자 전략도 대개 모기업의 사업 목표 달성을 위한 자원 확보 측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존 거대기업 CVC 투자는 벤처 기업들과의 수직적, 배타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들이 벤처 투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2015년 한 해에만 14개의 벤처캐피탈이 신규 등록(창업투자회사 기준)하였고 지난 5년 동안은 무려 42개의 신생 창투사가 등록*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중견기업 또는 상호출자제한 미해당 규모의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형 기업들의 벤처투자는 보다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기존 사업의 수명주기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신사업 기회를 찾기 위한 경우도 있고 IPO 공모 등으로 모집한 여유 자금의 수익을 극대화 하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 중형 기업들의 벤처투자는 모기업의 기존 사업의 관계사로 대상을 한정하기에는 투자 대상 자체가 적어 모기업과 무관한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곤 합니다.
다양한 민간 기업의 벤처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벤처 생태계에 좋은 일입니다. 투자철학과 전략이 다양해질 뿐 아니라, 벤처 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기업들과 협력할 기회가 늘어납니다. 또한 한국 벤처생태계의 취약점, 적은 M&A(Mergers & Acquisitions)도 민간 기업의 벤처투자 증가와 함께 개선되기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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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말 기준 등록 창투사는 115개사입니다.
VC의 기회 3. 싹트는 VC 문화
한국의 벤처캐피탈 산업이 큰 기회를 맞이했다고 보는 마지막 이유는 철학과 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처캐피탈을 소개하면 제일 먼저 서로 묻거나 소개하는 것은 AUM(Asset Under Management), 운용 규모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벤처캐피탈들이 운용 규모를 늘리는 볼륨 비즈니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운용 규모는 곧 관리보수 매출액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투자를 하는 어떤 사람들이냐 보다는 얼만큼 돈을 굴리느냐가 벤처캐피탈을 평가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의 몇몇 벤처캐피탈들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운용규모도 중요하지만 투자 철학이나 투자 분야에 대한 전략을 명확히 하는 벤처캐피탈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VC 투자의 사회적 가치,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블로그나 오프라인 행사 등을 통해서 벤처캐피탈의 비전, 투자 성향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VC들이 투자기업과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산업에 대한 인사이트를 기르고 투자 방향을 협의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인의 오랜 VC 경험을 블로그나 칼럼 등을 통해 공개하는 선배 벤처캐피탈리스트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께 경쟁사(?)에 근무하는 후배인 저와 제 동료들도 깊은 존경심을 느낍니다.
VC, 사모투자업은 남 몰래 하는 게 능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경험을 공유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한국 벤처캐피탈리스트들도 역사를 공유하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단계로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VC의 미래
지난 3~4년 동안 한국의 VC 산업은 호황이었습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14년 매출액 1천억 원을 달성한 벤처기업은 총 460개였다고 합니다. 이 중 43.5%가 VC투자를 받았습니다. 2010년도에는 매출 1천억 원 달성 기업이 약 315개였고 이 중 약 40%가 VC 투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 비중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정부의 여러 정책, 엔젤투자와 엑셀러레이터 등의 활성화 등으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개선됐습니다. 자금은 필요하지만 투자 리스크가 높은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도 훨씬 활발해졌습니다.
VC에 대한 공공, 민간의 출자가 모두 늘어 펀드 결성하기가 비교적 쉬웠고 IPO 시장도 호황으로 투자기업 회수도 활발했습니다. 물론 VC에 대한 LP(Limited Partner) 출자와 IPO시장 모두 경기 순환성 있기에 VC산업의 호황이 꾸준히 계속 될 수는 없습니다. 벌써부터 VC 업계 내부에서도 펀드레이징과 투자 모두가 얼어붙는 시기에 대비하자는 얘기가 들립니다.
하지만 한국 VC산업의 미래는 길게 보면 매우 밝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점점 더 우수한 창업가와 벤처기업이 주도하는 경제로 변화할 것이며 민간 자본도 벤처 투자 시장에서 기회를 찾을 것 입니다. 또한 규모로 경쟁하는 VC가 아니라 투자철학과 전략의 차별성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VC 산업은 더욱 성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