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습니까?

주요 등장인물

  • 장병규: 블루홀(현 크래프톤) 의장 및 공동창업자
  • 김강석: 전 블루홀 CEO 및 공동창업자

2013년 블루홀은 그나마 수익을 내던 테라의 부분 유료화를 결정했다. 뱅뱅사거리에 있던 회사도 판교로 옮겼다. 임대료는 줄이고 사무 공간은 넓힐 수 있어서였다. 희망 퇴직으로 사무실 여기저기 빈 자리가 보이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바꿀 계기도 필요했다. 게임 업체 웹젠과 스마일게이트는 2013년에, 넥슨과 NHN, 엔씨소프트, 네오위즈도 2014년에 판교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블루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판교에 터를 잡는 편이 나아 보였다.

 

테라의 부분 유료화로 2013년 블루홀은 반짝 힘을 냈다. 200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세 자리수 영업이익(131억 원)을 기록하며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 게임회사 영업이익 10위 리스트에 블루홀의 이름이 올라가기까지 했다.

 

김강석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매출의 상승 곡선은 지속되지 못했다. 구멍 난 튜브에서 바람이 새 나가듯 테라 트래픽이 줄줄 빠졌다. 부분 유료화의 효과는 한밤의 불꽃놀이로 그치며 반짝 흥행을 큰 바람으로 만들지 못했다. 블루홀이 테라로 MMORPG의 명가가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블루홀은 모바일 게임 제작에 착수했다. 테라 컨셉을 계승한 <엘린원정대>라는 게임이었다. 2007년 블루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장병규는 PC용 MMORPG를 10년 이상 서비스할 수 있는 제품으로 믿었다. 그는 수많은 투자자 앞에서 10년 동안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블루홀이 MMORPG를 제대로 만들어낸다면, 10년은 거뜬히 수익을 낼 줄 알았다. 테라를 서비스한 지 3년 만에 장병규는 그 믿음을 수정해야 했다. 멋진 10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게임 제작업은 본질적으로 흥행 비즈니스다. 히트작을 내야 생존할 수 있다. 제작하는 게임이 홈런인지 파울인지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최소한 타석에 여러 번은 서는 것이 중요했다.

 

희망 퇴직과 흔들리는 수익으로 경영진의 감정은 날카로워졌다. 장병규는 경영진 회의에서 볼펜을 내던지고 욕설을 뱉기도 했다. 이어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우선 공식적인 회의에서 욕을 해서 죄송해요. 감정이 많이 상하셨을 텐데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같이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죄송한 일이긴 하나, 앞으로도 필요하면 욕을 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2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늘 일모도원(日暮途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조직은 죽은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나요. 일단 살아야 인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

장병규에게 품격이란 일단 생존 다음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블루홀의 엔진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우선 살아야 했다.

중국, 아직은 먼 당신

블루홀은 북미·유럽·일본 등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남은 나라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었다. 마지막 성공의 불씨를 그곳에서 지펴야 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의 온라인 게임 시장 규모는 5조 2000억 원으로 미국의 2배, 한국의 3배였다.

 

장병규는 "확신을 위해서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만과 러시아 등 여러 번의 해외 서비스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최대한 끌어모아 마지막 승부수를 제대로 띄우고 싶었다. 중국 현지 퍼블리셔도 물색했다. 떠오르는 신생 업체 쿤룬과 1등 업체 텐센트 모두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텐센트와의 계약은 성사 직전에 결렬됐다. 블루홀은 쿤룬과 계약하고 출시를 준비했다.

 

쿤룬은 테라를 간판으로 내걸고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의 게임 축제 '차이나조이 2014'에도 참여했다. 쿤룬이 마련한 행사장 가운데엔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테라 몬스터 '쿠마스' 모형이 있었고, 무용수는 테라의 마스코트 '엘린'으로 분해 현란한 춤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국 게이머 수백 명은 부스 안을 북적이며 테라 게임을 맛봤다. 테라의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 계정 팔로워가 100만 명을 넘었다.

 

김강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블루홀은 동서양에서 성공하는 MMORPG 게임을 만들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블루홀의 모든 것은 테라 중국입니다. 여전히 중국 MMORPG 시장은 우리에게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테라는 중국 정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테라 개발팀은 모두 중국 올인 모드입니다.

도시와 농촌 풍경이 섞인 베이징 변두리 지역 아파트를 임대해 한국 직원 10여 명이 하숙을 했다. 근처 12평 남짓한 오피스텔로 출퇴근하며 중국 퍼블리셔 쿤룬의 의견대로 게임을 수정했다. 중국 이용자의 특성을 고려해 경제, 성장 시스템을 대폭 개선했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콘텐츠를 모조리 바꿨다.

 

결과는? 테라는 중국에서 맥없이 고꾸라졌다. 장병규는 MMORPG가 복잡계(complex system)에 속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넘어졌다. 게임의 특정 부분을 바꾸면, 바뀐 부분이 게임 전체에 영향을 주는 까다롭고 정교한 물건이란 점을 간과했다. 예컨대 전투를 바꾸면 전투를 수행했을 때 줘야 하는 보상 체계를 다 손봐야 했다. 캐릭터 간 능력의 밸런스 하나를 손대면, 레벨 디자인 전체가 흔들렸다.

 

막상 게임을 런칭하니 생각한 대로 게임이 돌아가지 않았다. 캐릭터 능력이나 아이템 사이의 밸런스가 붕괴됐고, 완성도에 실망을 느낀 유저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바뀐 부분을 다시 땜질하려니 24시간이 모자랐다. 복잡한 물건을 너무 건드린 게 문제였다. 복잡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애초에 전담 인력을 늘렸어야 했는데, 20명의 전담팀으로 이를 해낼 수 있다고 본 게 패착이었다.

 

장병규는 중국 런칭을 준비할 때 커피를 달고 살았다. 중국은 될 거라고, 돼야만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모든 걸 쏟았다. 한국 런칭 때는 게임 서비스 경험이 적었고, 미국 런칭 때는 첫 해외 도전인 만큼 힘들 것이라 각오했다. 중국은 아니었다. 한국 게임 업체가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있는 시장이었다. 한국과 북미의 경험을 살리면 능히 성공할 거라 믿었다. 장병규 스스로도 블루홀과 테라본부에 몸담으며 MMORPG 서비스 노하우를 탐욕스레 흡수했다. 시장 분석과 라이브 대응*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 정식 서비스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버그 수정 및 개선, 유저 요구사항 처리, 차기 업데이트 콘텐츠 개발, 이벤트 계획 및 실행 등의 과정을 뜻한다.

 

중국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당시 테라 본부에서 중국팀에 대한 성과 평가는 최하위였다. 모든 것을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모두 패배였다. 한국과 미국, 중국에서 벌어진 삼세판에서 연전연패의 멍에를 쓴 장병규는 그즈음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 베팅은 해야겠습니다

매미 울음으로 시끄러운 2013년 늦은 여름, 장병규는 김강석을 회사 밖으로 불러냈다.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하나씩 사들고선 공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 장병규(이하 장): 지쳤어요. 번아웃 됐습니다.

🙍🏻‍♂️ 김강석(이하 김): 농담하지 마세요. 의장님은 절대 번아웃이 없는 사람입니다.

🤵🏼 장: 농담 아니에요. 진짜 번아웃 됐어요. 대표님은 어떠세요?

🙍🏻‍♂️ 김: 저는 괴로운데 살 만합니다. 어떡합니까, 가야지.

장병규는 잠시 침묵한 뒤 속 이야기를 꺼냈다.

🤵🏼 장: 블루홀을 매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공했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재무적으로 투자자들에게 나쁘진 않은 옵션이에요. 대표님이 힘들다고 하면 매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제 블루홀이 쓸 카드가 더는 없습니다.

장병규는 스스로를 하얗게 타버린 재로 여겼다. 무슨 짓을 해봐도 소용없다는 상실감과 허탈함에 잠겨, 휴식을 모르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씩 업무를 놓았다. 컴퓨터 화면도, 휴대폰도, 문서도, 아무것도 들여다보기 싫었다. 이미 주어진 카드를 다 써버려 손안에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개인 주식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돈을 부었는데, 회삿돈이 다 말랐다. 이제 그냥 다 정리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김강석이 카드 하나를 떠올렸다. 테라에 이어 새로 준비하고 있는 MMORPG 프로젝트 W(당시 프로젝트명, 현재는 엘리온)였다. 

MMORPG를 만드는 게 블루홀의 업입니다. W는 만들어볼 가치가 있는 게임이에요.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요.

W의 예상 런칭 시점은 2017년이었고, 그때까지 블루홀이 쓸 패는 없어 보였다. 장병규가 다시 한번 말했다.

팔까요?

김강석이 말했다. 

🙍🏻‍♂️ 김: 생각을 해볼게요. 파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회사를 팔면 창업자나 초기 멤버 몇 명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요. 저희 구성원 모두가 아니라요.

🤵🏼 장: 무슨 생각이 있는데요?

🙍🏻‍♂️ 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김강석은 블루홀의 미래를 생각해봤다. W를 출시하기 전까지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고 출시하면서 회사의 수명을 늘리는 것, 그 방법 말곤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작 PC 게임을 만드는 블루홀 개발진의 DNA는 작고 빠른 개발을 요하는 모바일 게임과 맞지 않았다.

 

이번엔 김강석이 먼저 장병규를 불렀다. 

연합군 같은 방법이 있습니다.

김강석이 말하는 연합 전략은 회사 외부의 개발팀을 블루홀로 흡수 합병하는 것이다. 

훌륭한 제작팀도 블루홀의 장점이지만, 제작을 이해하고 대화하려 노력한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대화가 가능한 경영이 존재하는 회사가 블루홀이에요. 회사의 유니크함도 거기에 있다고 봐요. 이런 개발 문화를 지향하는 회사는 제가 알기론 한국엔 없어요.

 

경영진이 시키는 대로만 게임을 만드는 업체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가 돈은 없어도 그런 회사 만들고 싶어 했잖아요. 우린 적어도 게임 업계 종사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개발진과 인재를 우대하는 문화가 있어서요. 장병규라는 경영자의 탁월함도 있습니다.

다른 게임 업체를 인수할 돈이 당장은 부족했다. 블루홀이 가진 주식을 인수 회사 주식과 교환하는 방식을 써서라도, 다른 게임 업체를 합병하자는 방안을 냈다.  죽더라도, 마지막 베팅은 해보고 죽고 싶었다.

 

며칠 후 장병규는 김강석을 찾아갔다.

대표님이 더 해볼 수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회사를 블루홀에 인수하는 일은 새롭고 완전한 변화입니다. 인수 전략을 쓰려면 적어도 앞으로 3년은 일하셔야 합니다. 3년 동안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으시겠어요? 못하시겠으면 지금 팔아요.

며칠 후 김강석이 답을 보냈다. 

3년은 더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해 가을 블루홀은 조직을 개편했다. 중국 사업의 실패로 테라 본부의 인력을 감축하는 동시에 신규 게임 제작 프로젝트를 위한 조직을 만들어 인원을 배정했다. 테라 본부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고생하며 돈을 버는 곳은 우리인데, 자원은 신규 프로젝트에 밀어준다는 것이었다.

 

테라 본부 직원들은 인력 감축에도 반발했다. 중국에서 안 되면 회사가 어려워질 것이란 신호만 미리 줬어도, 이렇게 갑작스럽다는 느낌은 없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중국에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될 것"이란 메시지만 보내던 회사가 이제는 "기대만큼 되질 않아 체질 개선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경영진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경영진 일부에서도 조직 개편안에 이견을 냈다.

지금부터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내년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은 저도 절절히 공감합니다. 그리고 이번 조직 개편이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출발점인 것도 이해합니다. 다만, 너무 희망적인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인력 감축이 실행되는 상황은 좀 피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블루홀 내부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많았지만, 2014년 겨울 블루홀은 지노게임즈라는 회사와 인수 합병을 했다. 모바일 성장을 위해 인수 합병 및 투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겠다는 계획의 첫 결과물이었다.

시장을 이기는 기업은 없다

블루홀은 사람을 믿었다. 지노게임즈 공동 창업자인 박원희와 김창한 모두가 제작을 지휘할 수 있는 역량과 경험을 갖췄다고 블루홀은 평가했다. 특히 오래도록 다져온 팀워크를 활용해 모바일 RPG 개발에 적극 매진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지노게임즈는 탄탄한 개발 역량과 지식재산권(IP) 자산을 갖췄고, 게임빌이나 넷마블, 433 같은 메이저 퍼블리셔에게도 많은 구애를 받았다. 대표 박원희는 2014년 연말부터 팀을 구성해 이듬해 연말 런칭을 목표로 데빌리언* IP를 활용해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다.

* 합병 전 지노게임즈가 개발했던 MMORPG. NHN을 통해 퍼블리싱했지만 흥행하진 못했다.

 

블루홀의 인수합병과 신규 조직 편성 과정이 매끄럽기만 했던 건 아니었지만, 모바일 게임은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였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포코팡, 몬스터 길들이기 같은 게임은 2014년 초에 매출 1000억 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포코팡은 출시 1년 만에, 몬스터 길들이기는 8개월 만에 이런 성과를 내고 있었다.

 

10명 안팎의 개발 인력으로 만든 스마트폰 게임 하나가 수백 명이 투입된 대작 PC 온라인 게임 못지않은 결과를 거둔 것이다. 이미 해외 시장에서는 앵그리버드나 캔디크러시사가가 모바일 게임 전성시대를 열고 있었다. PC 온라인 게임은 청소년과 젊은 남성의 전유물이지만, 스마트폰 게임은 여성과 중·장년층 모두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사용자 저변이 워낙 넓기에 매출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 시장의 룰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블루홀은 변화하는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였고 창업 초기부터 지켜오던 비전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강석은 전체 직원에게 비전 수정 계획을 이메일로 알렸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비전의 재검토 제안'이란 제목이었다.

저는 'MMORPG의 명가'라는 선명한 비전을 가진 블루홀이 자랑스럽습니다. 기업의 비전은 경영진의 일방적 선언이 아니라, 구성원이 함께 공감하여 성장의 동력이 되는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 제 믿음인데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블루홀의 지난 8년은 공동의 비전을 향한 훌륭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MMORPG는 블루홀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우리의 전부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블루홀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경영진은 '시장을 이기는 기업은 없다', '기업은 계속 성장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루홀의 성장과 진정한 명가로의 도약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변화될 미래를 그리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담아낼 수 있도록 지금의 비전을 재검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생각이라서, 회사의 일부 멤버들과 간담회를 먼저 가졌습니다. 첨부한 메일은 그 간담회를 제안했던 메일이니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블루홀의 변화된 미래란, 간단히 말해서 MMORPG만 잘하는 제작사가 아니라, MMORPG와 모바일을 모두 잘하는 제작사로의 변신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모바일 시장을 향한 투자와 액션을 대폭 늘리려 합니다. 이 일은 제가 직접 책임지고 챙깁니다.

 

오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강조하는데, 저는 우리가 MMORPG를 계속 열심히 하여 글로벌 MMORPG 시장의 끝판왕이 되자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담회를 해보니, 여러분의 의견을 잘 수렴해 가면서 비전을 재검토하고 수정하는 일이 추진해볼 만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하여 다음 주부터 경영기획실에서 새로운 비전의 필요성과 그 내용에 대한 의견 수렴을 다각도로 진행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을 많이 피력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모바일을 향한 계획과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별도로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블루홀은 모든 구성원이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곧장 내부 커뮤니티 게시물에 비전에 관한 댓글을 달 수 있게 했다. 이메일로 의견을 받기도 했다.

 

블루홀 직원들의 의견은 유사했다. 구성원 모두가 모바일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직접 비전 문구를 제시하기도 했다. 게임의 명가. Beyond Bluehole(블루홀을 넘어). Masterpieces on My Fingers(내 손가락 위의 걸작). 블루홀 경영진은 직원의 의견을 종합해 비전 문구를 확정하기로 했다. 블루홀이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경영진 그 누구도 다시는 희망 퇴직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블루홀 2.0: 연합 그리고 생존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던 12월, 김강석은 '모바일 중심의 변화와 비전의 재검토'를 주제로 전사 발표를 했다. 

 

'테라는 수익성의 한계를 맞았다. 의미 있는 수익 창출은커녕, 현상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다. 테라 차기작인 W는 2017년 말 상용화될 예정이다. 블루홀은 그때까지 긴 겨울을 견뎌야 한다. 새로운 성장 동력은 결국 모바일이다. 모바일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고,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모바일 제작 라인을 확대하기 위해선 제작의 연합군이 필요하다.'

 

김강석은 덧붙였다.

우리는 '제작의 연합군'을 추구합니다. 게임 제작사라는 우리의 사명과 정체성은 변함없이 지키되, 변화하는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고 있습니다.

블루홀이 생각한 연합군은 훌륭한 팀과 IP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콘텐츠는 언제나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게임이어야 한다. RPG가 중심이지만 장르에 제약을 두진 않는다. 내부 팀 셋업은 물론 M&A와 지분 투자, 공동 개발, IP 라이센싱 등 다양한 시도를 벌인다. 인재와 자금을 끌어들여 체력을 늘린다. 타석에 가능한 한 많이 서서, 홈런율을 높인다는 전략을 잊지 않는다. 늘어나는 제작 라인의 자율성은 보장하지만, 경영의 견제와 개발 결과물의 공유 정도를 더욱 높인다. 블루홀은 이렇게 해야 새로운 시대에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잘하던 걸 포기한 건 아니었다. 비용 대비 수익은 낮고, 이러니저러니 말도 많았지만, 테라는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이 높은 게임으로 인정받았다.  블루홀은 테라 같은 대규모 MMORPG 제작의 끝판왕으로 남길 원했다. 블루홀은 이러한 명성을 지키되 PC와 모바일 게임 모두를 만드는, 균형을 갖춘 제작사로 성장하는 밑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가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게임 제작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가진, 게임 제작의 가치를 믿는, 훌륭한 제작인, 제작팀들과 많이 연합하여 진정한 명가를 이루고 싶습니다.

김강석은 제작 연합군으로의 전환에 '블루홀 2.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블루홀 2.0의 키워드는 연합 그리고 생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