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

결혼과 육아 및 살림에 대한 질문 목록 

[결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결혼 여부(Marital status)를 여쭈어도 될까요? 어떤 남자와 결혼하셨나요? 아직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다녀오셨다면 홀가분하신가요? 어떤 마음이신지 나눠주실 수 있나요?

[육아] 자녀는 어떻게 되시나요? 아들? 딸?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어떤 의미였나요? 기억에 남는 체험이 있으신지요? 딸과 아들, 첫째 둘째를 키우실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나요?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겪으며 논문을 썼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공부는 모자라니 방향을 잘못 잡게 됐지요. 지도교수님께 사회과학도답지 않다고 꾸중도 엄청 들었습니다. 임신이나 출산이 퍼포먼스에 주는 영향은 사실 본인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건데요, 제 경우 손과 머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이건 늦게 들어간 신문사에서 둘째를 가졌을 때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인간에게는, 특히 임신과 출산을 거치는 여성에게는, 어쩔 수 없이 무능해지는 시점이 존재하더라고요. 스스로, 주위에서, 사회적으로 그걸 견디고 기다려주는 시간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없으니, 경력이 단절돼 버리는 겁니다. 

 

경력단절이라는 말이나 '경단녀(경력단절여성)'란 신조어에 동의하지 못하는 여성계 연구자도 많으신데요. 가정과 가사, 살림과 양육이라는 노동이 정당한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을 하고 싶은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의 시기를
경력단절로 느끼는 건, 현상적으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경우 결혼 시점도 문제였죠. 지금 생각해 보니 스물일곱이면 너무 이른 나이인데. 지도 교수님은 석사과정 중에 결혼하는 것 자체를 무척 말리셨습니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으면, 당신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당시 저는 방송가에선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아나운서 공채를 보고 똑 떨어진 뒤라, 자존감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어요. 인생이 자꾸만 지연되는 느낌이 들어 결혼이라도 일찍 하고 아이 낳아 키운 뒤 '인생 2막'을 빨리 열자고 생각했지요.

 

이건 제 생각이라기보다는 두 살 위 남자친구의 제안이었는데요, 당연히 착각이었죠. 아이를 낳는 순간 제 인생 2막이 열리는 게 아니라, 향후 십 년, 이십 년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남편은 서른을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레지던트 수련 중에 본인에게 '강직성척수염'이라는 난치병이 있다는 걸 알았고, 빨리 결혼해 안정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아나운서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본인에게 병이 있거나 없거나,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주길 원했달까요.

 

시댁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처음엔 아기자기 재미났어요. 석 달 지나 큰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무척 짧기는 했지만요. 해산하자마자 곧바로 박사시험을 봤는데, 남자 교수님들이 혀를 끌끌 차며 떨어뜨리셨어요.

저 대신 뽑힌 오빠는 미안해 했습니다. 
"공부는 네가 더 잘했는데, 미안하다."

 

다른 오빠는 돌려 나무랐습니다.
"인생을 너무 저돌적으로 사는 거 아니냐.
좀 쉴 줄도 알아야지."

지금은 다들 친하게 지냅니다. 교수님들에 대한 원망도 없고요. 두 아이를 낳고 사느라 아직까지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못했고, 유학은 더더욱이나 엄두를 내지 못했네요.

 

저는 아들만 둘이에요. 큰아이는 좀 별나요. 이를테면 아이큐가 측정되지 않는다는 고도지능아인데, 그놈에 대해서는 제가 양가감정이 있습니다. 아이의 정신적인 수준과 신체적, 감정적인 수준이 너무 달라서 끊임없이 손이 가거든요.

 

제가 그토록 좋아했던 기자를 그만 두게 된 것도 나이 대여섯 살에 계속해서 '죽음'을 말하는, 녀석의 비정상 행동을 목격하고서였습니다. 대치동 영재코스에서 키우면 정말 이상해질까 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 서울을 탈출해 제주까지 내려갔습니다.

 

아이가 너무 자랑스럽고 조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밉고 함부로 대하게 되는 거죠.

저를 닮아서 밉고,
제가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어서 밉고,
언제까지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서
미워요.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려고 발버둥치면서도 한편으론 원망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른 한 놈은 지극히 평범해요. 이 아이의 평범함과 바보스러움에 몇 번이고 안도합니다. 남자 아이들 대부분이 겪는 공룡, 자동차, 로봇 코스를 '정상적으로' 거쳐 가고, 공놀이 좋아하고, 그 나이 또래 여느 아이들처럼 떼쓰고 뻗대는 게 고마워서 눈물이 난 적도 있어요.

 

둘째를 품었을 때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준 게 후회돼서, 낳고서는 사랑만 주려고 애씁니다. 큰놈과 달리 애초에 아무런 기대가 없어서 똥만 싸도 이쁘고, 잠만 자도 이쁘네요. 이런 게 진짜 새끼에 대한 사랑이구나 싶어, 큰놈에게 미안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회 생활

사회 생활에 대한 질문 목록 

[유리천장] '유리천장'이나 '새는 파이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시나요? 직접 체험하신 바 있나요? 여성이라는 게 커리어에 도움이 됐나요? 장벽이 됐나요? 

[캣파이트] 직장에서 만난 다른 여자들과는 어떤 관계였나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그 담론이 통용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섹시즘] '엔지니어처럼 생긴 여자' 논쟁이 났을 때, 일부러 섹시한 옷에 가운을 걸친 사진을 올린다거나 하는 저항운동이 있었어요. 여성성이나 섹시함을 극대화해 남성들의 호감을 사는 '여왕벌' 타입의 여성들도 있지만, 남자들에게 직업적으로/학문적으로 진지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외모를 망치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쪽이신가요? 일부러 치마를 입기도 하시나요? 일부러 바지만 입으시나요? 치마를 입지는 않지만 못 입는 걸 억울해 하시나요? 머리가 긴가요, 남자처럼 짧은가요? 화장은요? 액세서리나 명품가방은요?

[모성보호] 아이를 품고 낳고 키운다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와 양립할 수 있는 일이었나요? 육아휴직 등의 모성보호 제도는 어땠나요? 양육과정에 남편이나 다른 조력자들은 어떻게 개입하는지, 살림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들려주세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생활을 어떻게 챙기는지, 방관하는지도요.

큰아이 돌일 때 국회방송에 들어갔습니다. 찬밥, 더운밥, 기자, 아나운서,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일했어요. 거기서 저는, 말하는 것보다는 글 쓰는 걸 더 좋아하고, 더 잘한다는 판단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 두 돌 때 신문사 공채시험을 쳤지요.

 

그 결과 딱 서른 살 나이에,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알법한 메이저 언론사 최초의 애 엄마 수습기자가 됐습니다. 무려 최고령인데요. 석사학위 덕분에 막차를 탈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신문사에서 제 인생 최고와 최악의 시절을 모두 보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엿보고, 그것을 글로 전하는 일은 재미났어요. 해봤던 모든 일 중에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서 '올드루키'로 주목받던 기자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습니다. 종편 채널이 생기면서 앵커의 꿈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후보군으로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온갖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조직의 장애물처럼 느껴졌어요. 에이스에서 잉여로 급전직하한 제 모습을 받아들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말들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출산 전날까지 운전을 하고 다녔어."

"애는 너만 낳니,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육아휴직 다 쓰면, 조직에서 싫어해.

무슨 배짱으로 그러니."

 

심지어 옷 입는 것까지 뭐라고 하더라고요.

"얘, 어떤 임산부가 너처럼 이쁘게 하고 다니니? 그냥 못생긴 임부복 입어!"

"너 치마가 너무 짧아! 향수 냄새가 너무 짙어!"

제가 일하던 곳은 방송국을 설립하려고 준비하던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이쁘게 하고 다녔습니다.

 

돌이켜 보면 전략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저였다면 그냥 못생긴 임부복 입고 다니며 세월을 낚았을 것 같기는 합니다. 

 

같은 여자들, 그것도 평소 여기자들의 멘토를 자처하던 '왕언니' 몇이 앞장서서 찌르더군요. 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 후배들에게
당신들과 똑같은 희생을 강요할 거라면,
도대체 여기자협회는 왜 만들었고,
여성주의 운동은 뭐하러들 했던 걸까.

그렇다고 회사에서 만난 여자들이 다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국회방송에선 40대 미혼 여성부장이 제 보스였습니다. "신문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을 때 저를 말리셨어요. 휴가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갈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잘 안 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요.

 

제가 일하는 방식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껴주셨고 애 엄마가 다시 사회에, 그것도 언론 직종에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충분히 헤아려 주셨습니다.

 

신문사에서는 남기자 스무 명은 찜 쪄 드실 여걸이 제 보스였던 적이 있었어요. 심미적 기준이 높고, 기획력이나 추진력이 탁월한 데다, 문장은 독하고 입마저 걸어서, 어지간한 기자들은 남녀불문 나가떨어지곤 했습니다. 문예지로 등단한 작가인 데다 삼국지를 다시 풀어쓸 정도로 취향이 남다른 분이었고요. 

 

그 분께 인정받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믿는 사람은 아주 확실하게 믿으셨어요. 몇 번 시험해 보신 뒤에는 완전히 신뢰하고 진정한 자유를 안겨주셨죠. 덕분에 아주 신나게 일했습니다. 당시 한 팀이었던 사진기자 선배는 지금도 그 시절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회고합니다.

 

스스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제게는 겉으로만 왕언니인 척 하는 '입페미'들보다 훨씬 더 페미니스트처럼 여겨졌습니다. 사내 흔들기에 지치고 가족 이슈로 결국 일을 그만둘 때도 이분께 한 번 안아달라고 청했어요. 지금도 무슨 자리만 생기면, 저부터 챙기시는 멘토셔요.

 

그리고 외인부대처럼 어울리던 여자들의 그룹이 있었거든요. 하나는 조직에서 약간 방외인 취급 받는 이들이 함께 모인 여비서/여직원/여기자들의 연합체, 또 하나는 애 엄마 주니어 여기자 모임. 

 

앞의 그룹에서는 포 떼고 장 떼고 실컷 수다를 떨었고요, 뒤의 그룹에서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집에 불러다 놀리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누가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유산을 하거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 같이 울고, 같이 목소리 높였고요.

캣파이트(Catfight)만이 아니라
그런 관계들도 있었기에,
숨 쉴 수 있었습니다.

또 저처럼 늦게 회사에 들어온 여기자들의 존재도 제게는 큰 힘이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해야 또 30대 여기자, 유부녀 여기자, 애 엄마 여기자를 뽑을 거란 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죠. 회사를 그만둘 때, 그녀들의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그만큼 마음에 걸렸던 이들이었어요.

 

이런 일들을 겪으며 어렸을 때 접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언니들의 충고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새록새록 되살아났어요. '알파걸'로 키워진 요즘 여자친구들은, 최소한 학부를 마칠 때까진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성별에 따른 차별 같은 건 없으며, 있다 해도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길 수 있고요.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해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부딪히다 보면, 그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여성들이 생깁니다. 더더욱이나 결혼 이후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 선택에 책임져야 하는 날들이 펼쳐집니다. 그건 개인적인 노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개개인의 여자 하나하나는 바위에 내던져진 계란처럼 부서지고 맙니다.

새로운 직업

둘째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걸스로봇(로봇공학 분야 여성들의 네트워크)이라는 소셜벤처의 대표로 일을 시작했던 건, 제 이런 경험과 문제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십 년 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덕분에, 저는 제가 겪어온 일들이 개인적인 오류나 성격적 결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대학 단짝친구의 돌연한 죽음을 겪으며 결심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을 때,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하자.

2015년 크리스마스 때 국내외 톱클래스 여성 로봇 공학자들을 모아 네트워킹 파티를 열었고요. 이후 닥치는 대로 여성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일단 행동하고 천천히 수습하는 편이라, 두려움 없이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중입니다.

 

얼마 전 KAIST 여성박사 한 분을 통해 「평행우주 속의 소녀」란 책을 접했습니다. 원제는 '방 안의 유일한 여자(The Only Woman in the Room)'인데요, 아일린 폴락(Eileen Pollack)이라는 여성 작가가 미국 과학계의 소수자, 여성 문제를 지적한 논픽션입니다.

ⓒ도서출판이새

저자는 무려 예일대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여성 과학자로서의 미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의심한 끝에 문학의 세계로 옮겨갑니다. 그곳에는 더 많은 여성 동료, 그리고 확실한 피드백과 지지, 칭찬과 격려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작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물리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아파 합니다.

 

그러다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 총장의 여성차별적 발언을 듣게 됩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과 수학 영역에서는 남녀 간에 선천적인 소질 차이가 있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강도 높은 헌신을 요구하는 직업을 추구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자연과학 분야에 여성 종신교수가 부족하다.' 서머스 총장의 이런 취지의 입장은 전세계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그는 결국 사임했습니다. 

 

아일린 폴락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 전역의 이공계 여성 교수들과 여학생들을 인터뷰하기에 이릅니다. 광범위한 심층 인터뷰를 통해, 시대가 바뀌어도 여학생들은 여전히 비슷한 종류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 이공계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덜 경쟁적이며 덜 위협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인문사회 분야에 남게 된다는 것을 밝혀냈고요.

 

저자는 '젠더에 대한 편견이나 편견을 조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면, 더 많은 여학생들이 본인의 진정한 취향과 적성을 찾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해당 분야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요. 그리고 저자는 그 과정에서 과거의 자신과 닮은, 우주물리학을 전공하며 행복해하는 한 소녀, '평행우주 속의 소녀'를 만나 마침내, 물리학을 포기한 과거의 자신과 화해합니다.

 

이 책과 저자의 존재를 몰랐던 저는, 책을 읽는 내내 그야말로 평행우주 속의 제 자신이나 도플갱어를 만난 듯 전율했습니다. 단숨에 쉽게 읽어낼 수가 없어서 며칠에 걸쳐 울면서 책장을 넘겼지요. 다 읽고 난 지금은 책이 꼬깃꼬깃해져 버렸습니다. 이 경험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여성 공통의 것이며, 또한 세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KAIST의 과학자를 '여자'란 키워드로 인터뷰해서 기록을 남기는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결론은 뭔가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과학하는 기쁨, 공학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매일 한 걸음씩 내딛는 KAIST의 여자들과 그들의 남자 동료들을 관찰한 결론 말입니다.

 

KAIST의 여자들을 관찰하며 제가 들은 제1성(第一聲)은, '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버티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무치도록 외롭다."

저는 당신만 외로운 게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당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란 것을 말예요. 저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기워, 어쩌면 하나의 조각보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KAIST의 남자들을 보며 느낀 건 이런 거였어요.

이들은 정말로 악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무지해서,
여자인 동료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서,
여자들을 외롭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여자들이 동료로서 훌륭하다는 걸 알면 어느 순간 그들도 팔을 벗고 돕더라고요.

 

그러니 되도록 빨리, 이 두 집단은 서로 만나야 합니다. 

여자들에겐 좋은 남자들이 필요하고
남자들에겐 좋은 여자들이 필요하며,
좋은 남자의 모델과
좋은 여자의 모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게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대학 여성학회의 남자 선배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제가 KAIST에서 벌였던 지난 반 년 간의 실험과 관찰이 우리 이공계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증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속한 우주의 룰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단 한 사람의 소녀라도, 여학생이라도, 여성 연구자라도, 남성 파트너라도, 저와

 

8월 9일(화), Women at KAIST 프로젝트의 세 번째 미리보기 글이 올라옵니다.

 

[Women at KAIST]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의 본격 인터뷰 시리즈

 

과학하는 여자 6명과 남자 6명, KAIST 교수와 학생 등 구성원 12명의 삶을 '여성'이란 키워드로 인터뷰한 콘텐츠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