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의 인터뷰

Women at KAIST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KAIST의 여교수님과 여학생, 여성친화적인 남교수님과 남학생 등 13명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학업성취도와 취미, 가족구성, 부모님의 성향과 같은 유년기의 성장과정에 대한 질문, 또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전공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 동료집단과의 관계 같은 사춘기의 성장과정에 대한 질문, 그리고 대학 입학 이후부터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까지의 지적이고 학문적인 성장과정, 그 사이나 그 이후의 결혼, 임신, 출산, 양육, 살림 등 또 다른 차원의 성장과정에 대한 질문들이었지요. 물론 비혼이나 이혼 이후의 삶을 얘기해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자녀가 없는 부부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요.

 

사회에서,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용인되고 통용되는 방식의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참고는 하되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는 인터뷰가 되었지요. 물론 사적인 고백을 듣는 것과 공적으로 그것을 표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서, 인터뷰이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은 어떤 것도 공개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습니다.

 

인터뷰 프로젝트 미리보기 첫번째 글에서는 인터뷰이 13명에게 보내는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던져, 그 안에서 제 인생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1978년 1월 생이니 낼 모레 마흔입니다. 직업은

 

삼성전자로 시작해서 국회방송과 중앙일보까지 꽤 여러 직장을 경험했습니다. 어릴 땐 재능만큼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여겼지요. 죽도록 공부했지만 교수가 되지도 못했고, 언제고 글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등단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늦바람이 불어 직장 다니다 말고 아나운서 시험도 봤었는데요, 문턱에서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음력 12월 뱀띠라 그런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신세라고 애통해 했죠. 하지만 누군가, 겨울 뱀은 먹이를 배불리 먹고 노닥거리는 존재라고 달리 풀이를 해준 뒤론, 아, 한량의 팔자가 내 것이로구나, 하고 저의 인생유전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유년기

유년기 질문 목록

[부모] 아버지는 어떤 아빠였나요? 딸에게 기대가 많았는지, 무심했는지, 아들만 편애했는지. 아버지 자신의 인생은 어땠나요? 성취가 큰 유명인사였는지, 평범했는지, 좌절을 겪었는지. 딸에게는 어떤 교훈을 줬나요?
[부모] 어머니는 어떤 엄마였나요? 일하는 엄마였는지, 주부였는지, 가사에 완벽했는지, 자녀들에 대해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어머니 자신의 인생은 어땠죠? 성공한 '여류'였는지, 가부장적 질서에 복종했는지, 속물이었는지, 페미니스트였는지. 딸에게는 어떤 교훈을 줬나요?
[형제] 형제, 자매들의 구성은? 관계는 어땠나요? 공부를 가지고 경쟁했나요? 부모님의 사랑을 두고 다퉜나요? 어떤 공부를 잘하고 어떤 놀잇감을 갖고 놀았나요? 어떤 특질들을 나눠가졌나요?
[환경] 집이나 주변 환경 상의 특징이 있었나요? 깡촌에서 자랐는지, 강남 한복판에서 자랐는지, 대치동의 문화를 체험했는지, 달동네를 겪었는지, 가정형편은 어땠나요? 그게 어떤 영향을 줬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습니다.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또는 무언가가 되거나 무엇을 성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버릇이 생겼지요. 원조 '딸바보'였던 아버지는 제 밑으로 두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첫 아이인 저만 편애하셨습니다. 하도 무등을 태워서 땅을 밟고 걷는 사진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지요.

 

맨바닥이나 구석자리에 앉은 기억도 거의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 당신의 무릎에서 세상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 낙향했을 때조차 한국일보와 매일경제를 비롯한 십여 종의 신문과 국내외 고급 잡지들을 읽으셨습니다. 저의 활자중독은 아버지의 다독병으로부터 기원한 것이었습니다. 타임-라이프지와 학원사의 백과사전 위에서 저희 형제들의 초기 미감과 지혜가 싹텄습니다.

 

한양공대 출신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인문적 소양이 기술을 압도하는 이였습니다. 문사철을 공부해 교수가 됐으면 딱 어울릴 양반이었죠. 문장도 좋았지만, 글씨마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생활에 쫓겨 억지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평생 쇳밥을 드셨습니다. "어디 가서 식구들 밥은 굶기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고 해요.

 

일본어를 익혀 선진 기술을 빨리 배운 것이 아버지의 초고속 승진 비결이었습니다. 오너의 세대가 바뀌고 정치 싸움에 밀려나기 전까지는요. 그 와중에 서울공대를 가지 못한 것이 일생의 한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제법 똘똘해 뵈는 딸에게 큰 기대를 거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딸이라는 억울함은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집안의 전제군주로서 부모님을 대리해 두 남동생을 완전히 압도하면서 자랐습니다. 제게는 아마도 그 시절부터 싹텄을 남성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남편은 나이도 두 살 어린 저를 엉겁결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어딜 가든 보스가 되고 싶어 했고, 대체로 그런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테스토스테론이 많은 여자'라서 이공계 공부를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엄마는 그런 제게 숙녀로서의 에티켓이나 여성의 몸, 살림의 지혜 같은 건 단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부만 잘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사춘기

사춘기 질문 목록

[학교] 이 무렵 학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체험은? 과학고, 외고 등의 특목고 출신인가요? 선생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좋아하던 선생님과 싫어하던 선생님, 그들의 특징과 담당 과목은? 학업과 자아형성 과정에 미친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을까요?
[학업] 특별히 두각을 드러냈던 과목이나 취향은? 경시대회나 우열반 체험? 특별활동 같은 걸 했나요? 과목별 격차 같은 게 있었나요?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기까지 연결돼있는 경험이 있다면?
[교우관계]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잘난 척한다고 왕따나 폭력을 겪었나요? 보스나 여왕벌이었나요? 학교에서는 시험성적 외엔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나요? 단짝이 있었나요?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그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분홍색과 드레스, '바비'와 '키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색과 체육복, '과학상자'와 '글라이더'를 더 좋아했다는 게 함정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공룡에, 과학을 배우면서는 원소기호 같은 것에 집착했고, 수학 중에서는 도형이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국어를 잘 하고 좋아했던 것과는 또 다른 이유에서였지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이웃 학교의 남자 친구들은 저를 좀 어려워했고, 여자 친구들은 연애편지와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곤 했습니다. 그 땐 머리도 남자처럼 짧았어요. 춤을 추거나 농구하는 걸 좋아해서, 친구들이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다 갖다 주기도 했네요. 아무래도 지금보다 훨씬 더 양성적이었던 것 같아요. 복도에 숨어 있던 후배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회장 언니, 한 번만 안아주세요." 하고 울기도 했답니다.

 

글을 잘 쓰는 게 멋진 일이라는 건, 선배 언니를 통해 배웠습니다. 교지에 실린 학생회장의 인사말은 보통의 수준을 훌쩍 넘기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근사하던지, 그런 문체를 흉내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연설도 엄청나게 잘해서, 그 언니가 저의 롤모델이었어요. 저희 학교 재단은 유례없이 중학교에도 회장 직선제를 도입했고, 덕분에 카리스마 있는 여성 리더십이 뭔지 직접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예쁜 척하지 않았어요.

 

반전은 고등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인근에 소문난 공주 학교였는데요, 겨우 동네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가치관이 전혀 달랐습니다. 선생님들은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의사 판검사가 되지 말고 사모님이 되세요."

 

그 때 제가 들었던 또 다른 충고들은 이런 거였습니다.

"의대 가면 이쁜 얼굴 망가져요."

"뭐 하러 힘들게 경찰대 같은 데를 지망하니?"

"서울대 가면 4년이 행복하고, 이대 가면 평생이 행복하다."

"서울대 반은 공부만 잘해서 싫고, 이대 반은 예뻐서 좋아."

 

저는 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모욕적인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왜 아무도 항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더 나쁜 건 당시 스며든 속물적인 사고방식이나 공주의 애티튜드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다 빠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잘 나가는 여자애'가 되고 싶어서 방송반에 들었습니다. 음악을 틀어줄 땐 목소리를 변조해 예쁜 척을 했지요. 방송반은 학교 축제의 꽃이었습니다. 남자 친구들이 게시판 사진에 장미꽃을 붙이거나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과학영재 모임에 빠지고 방송반 모임을 준비하다가 과학 선생님께 불려가 경을 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과학계를 이끌어갈 인재가 그러면 안 돼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학교에서 들었던 말 중에 거의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당장 혼나는 것만 섭섭해 했어요.

 

다른 한 선생님은 "과고, 외고를 못 간 너희들은 쭉정이"라는 말씀을 대놓고 하셨죠. 거기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거의 소녀가장 역할을 하던 친구에게 과학고 티켓을 양보하라 하셨거든요. 추천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요. 그 때만 해도 과학고를 가지 않으면 대입에 필패하는 시절이 아니었고, 저는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를 지키는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 때 다른 선생님이 부모님께 해주셨던 놀라운 충고도 생각나네요. "과학고 가면 쟤 좋은 성격 다 버립니다. 이상한 여자애 만들고 싶으세요?"

 

학년이 올라가고 속물적 분위기에 반항을 하면서 사춘기를 심하게 탔습니다. 방송실에 틀어박혀 엄청나게 음악을 들었고, 교과서 밑으로 소설을 읽어댔습니다. 이문열부터 신경숙까지요, 당연히 내신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 형편없는 내신을 지탱해 준 게 수능성적이었어요.

대학, 대학원 시절

대학, 대학원 시절 질문 목록

[학업] 학력고사, 수능, 내신이 어땠나요? 대학교와 학과 선택에 관련된 고백을 해줄 수 있나요? 어떤 이유로 지금의 학교와 전공을 선택했지요? 성적에 맞춘 건지, 특별한 희망이나 비전이 있었는지, 부모나 선생님, 지인들의 강압에 의한 건지. 막상 들어온 학교는 적성이나 기대에 부합했나요?
[페미니즘] 혹시 어떤 식으로든, 수업이든 학회든 동아리든 선배든 책으로든 여성주의나 양성평등적 시각을 접한 바 있나요? 그것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아니면 전혀 모르고 지나갔나요? 스토킹이나 성희롱 등의 문제를 겪은 바 있나요?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겪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니면 해결하지 못했는지 경험을 나눌 수 있나요?
[사제관계] 입학 전이나 후에 롤모델로 모실 만한 교수님을 만났나요? 남성인지, 여성인지. 찾았다면 어떤 점에서? 전생애적인 관점에서도 영향을 미치나요? 아니면 단지 학문적인 스승인가요? 어떤 갈등이나 멘토링을 나누었나요?

모의 수능만 믿고 있다가 첫 해 수능을 죽쒔습니다. 체면 때문에 의대를 썼다가 줄줄이 떨어지고, 수도권 모 공대에만 겨우 자리가 났습니다. 당시는 해당 학교 재단이 잘 나가던 시절이라, 이대로만 하면 교수로도 채용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학교엔 남자애들 천지였습니다. 모델처럼 잘생긴 친구들도 즐비했습니다. 고교 시절 단련된 공주님의 애티튜드로 '공대 여신' 비슷한 자리를 꿰찼습니다. 캘큘러스 시험 성적이 교수님 방문 앞에 붙자, 그걸 왜 거기 붙여놓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남자 친구들이 놀라며 말했어요. "이야, 늬 저기 이름 있더라. 안 그렇게 생겼는데 수학 잘하는구나." 그렇게 생긴 건 또 뭘까요. 

 

과학 실험 조교 두 분이 각각 관심을 표하더군요. 과목을 가리고 편의상 '순정A', '마초B'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순정A는 제 거절에 곧바로 장미와 시를 건네주며 물러났습니다. 마초B는 B학점을 주는 것으로 보복했습니다. 그 과목에선 제가 발표를 하면 친구들이 기립박수를 쳤지요. 과제도 출석도 결코 B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과학경시대회 금메달 수상자라니까요.

 

마초B는 제게 "80점짜리 인생도 살 만 하다"며 "자신이 남자로서 어떠냐"고 물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를 남자로 고려한 적이 추호도 없었던 것처럼, 제 인생이 80점짜리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저는 언제나 90점을 얻으려고 110점 어치의 노력을 갈아 넣는 스타일이었습니다. 80점이 목표였던 적은 결단코 없었죠.

 

성적표를 받은 뒤 학교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과 과학과 기계와 남자들의 세계를 떠나, 문학과 교육과 커뮤니케이션과 여자들의 세계로 옮겨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제 인생은 그리로부터 영원히 달라졌습니다.    

 

문과로 옮겨 재수를 하고 어디든 골라 갈 수 있을만큼 성적이 남는데도, 아버지는 저를 사범대에 보내셨어요. "여자가 시집 잘 가려면 그쪽이 제일 낫다"고요. 종교학과가 아니라면 외교학과, 내면 깊은 곳이 아니라면 넓은 세계를 탐험하고 싶었던 저는 좌절했지만, 그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그 전공은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젊은 날에는 더 많은 모험을 하면서 제 자신부터 찾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도 그 선택의 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 팔자 어디쯤엔가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새겨져 있었을지도요. 아주 넓은 의미의 교육 말입니다.

 

페미니즘을 만난 건 대학 일학년 때 학회를 통해서였죠. 저희 과에서 제일 예쁜 언니와 제일 의리 있는 언니가 쌍으로 다녔는데요, 각자 남자 친구들은 따로 있고요, 두 사람의 관계가 굉장히 이상적인 연인이자 친구처럼 보였어요. 그 두 언니가 여성학회의 주축, 그들보다 한 학번 위의 오빠 하나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죠. 거기 들어가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저도 거기 앉아서 발제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언니들이 저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라인(?)으로 키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학회에선 여자들끼리 모여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을 읽거나 유럽 페미니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걸 봤습니다. 참 편안했어요.

 

 

결정적으로 제가 일학년 첫 학기 때 스토킹을 당했는데 그걸 해결해 준 사람이 여성학회의 정신적 지주 오빠였어요. 그 오빠 동기였던 남자 선배가 가해자였는데요, 일방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며 괴롭혔습니다.

 

기숙사 후배들을 동원해 수업시간에 꽃다발을 나른다든가, 에프엠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든가, 언제까지 어디로 나오라고 통보한다든가, 망원렌즈로 몰래 사진을 찍어 인화해 보낸다든가, 거절했더니 삐삐에 온갖 나쁜 말을 하더라고요. 그걸 하나하나 테이프에 옮겨 녹음하면서, 더 계속되면 경찰서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선배들이 개입해 가해자를 군대에 보냈어요.

 

만약 여성학회가 없었다면, 학교에서 사라진 건 제가 됐을지도 몰라요. 사정 모르고 남의 얘기만 하는 사람들은,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냐며 제 행실을 문제 삼고 욕했겠지요. 근데 저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짧은 치마도 안 입고, 늦은 시간엔 안 돌아다니고, 하다 못해 대중교통도 잘 안 탔거든요. 수업과 동아리와 학회 활동만으로도 버거워서 연애도 안 했다고요.

 

그런데 왜 제가 타깃이 되었을까요. 웃어서 그렇대요, 제가 웃어서. 여자는 너무 예의 바르거나 너무 친절해도 안 된다는 걸 그 때 배웠습니다. 저는 차라리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편이 낫겠다'며 전략을 수정했지요.

 

이럴 바엔 차라리 마녀가 되자!

 

학과에는 여자 교수님이 단 한 분밖에는 계시지 않았어요. 20대에 학위를 따고 돌아와 모교 교수가 된 뒤, 결혼도 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을 세우는 데 헌신하신 분이에요. 저는 교수님을 롤모델로 여기며 엄청 따랐는데요, 불행히도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셔서 멘토로 모실 기회는 없었습니다.

 

저를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자나 꼬시는 아이"라고 오해하셔서 매섭게 혼내신 적도 있어요. 좀 억울했던 게, 저는 명실상부한 과탑이었거든요. 학교는 전체수석으로 졸업했고요. 머리를 기르거나 예쁜 옷을 입으며 외모를 꾸미는 건 자기만족 같은 거였고, 연애할 시간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죠. 그 분은 오히려 졸업하고 학교를 떠난 뒤에야 오해를 푸시고 몇 가지 조언을 해주셨어요. "네 눈에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신호등이 보일 거야. 절대 아는 척 하지 말아라." 

 

졸업하고 오래 밖으로 돌다가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왔습니다. 역시 단 한 분뿐인 여교수님이 계셨죠. 저는 그 분의 카리스마와 미모에 매료돼 제자가 되겠다고 청했어요.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받아주신 석사 제자였습니다. 지금도 여러 일을 상의드리는 멘토셔요.

 

8월 2일(화), 2편으로 이어집니다.

 

[Women at KAIST]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의 본격 인터뷰 시리즈

 

과학하는 여자 6명과 남자 6명, KAIST 교수와 학생 등 구성원 12명의 삶을 '여성'이란 키워드로 인터뷰한 콘텐츠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