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인터넷, 이메일에 빠진 소년

penguni@nownuri.nowcom.co.kr

1994년, 초등학생 시절에 만든 나의 첫 번째 이메일 주소. PC통신 서비스인 나우누리에서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으로 쉽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출시했고, 인터넷에 매우 관심이 많았기에 바로 사용하려 했다.

 

기존 나우누리 아이디는 '펭귄net'이었는데 이메일 주소를 등록하려고 보니 'penguin'은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어서 끝 두 글자를 뒤바꾼 'penguni'를 등록했다.

 

짧지 않은 주소지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메일 주소를 가진다는 것은 인터넷 상에 나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한다는 것. 당시 전세계 인터넷 이용률이 0.24%에 불과했기에 엄청나게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웹에서 회원가입을 하려면 꼭 이메일 주소가 필요했다. 이렇게 이메일과 나의 인연이 시작됐다.

13세, 컴퓨터회사 사장의 꿈을 공표한 인터뷰 기사 ©조선일보

위 이미지는 1996년 3월 3일자 조선일보 지면 중 한 부분이다. 당시 13세 '컴퓨터도사'였던 소년은 컴퓨터 회사 사장이 되고싶다는 꿈을 꾸었다. 

스팸메일을 '하나씩' 읽다

pengdo@zip.org

지금 기억하고 있는 두 번째 이메일주소다. 1996년 즈음에 사용하던 이메일주소로 기억하고 있다. 닉네임을 '펭도'로 바꾼 시절이다. 

 

구글이 없던 그 시절, 야후가 검색엔진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야후는 지금과 같은 키워드 검색 방식이 아니라 디렉토리 검색 방식을 사용했다. 모든 웹사이트가 디렉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

 

비슷한 '웹 디렉토리'로 한국에는 ZIP이라고 있었다. 중학생 때였는데, 나우누리의 인터넷 스터디 포럼(ISF)에서 활동하던 인연이 계기가 돼서, ZIP에 새로 등록된 웹사이트를 알맞은 디렉토리에 지정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다. 

 

즉 어떤 웹사이트가 새로 생기면 내가 가장 빨리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된 새로운 웹사이트 구경하기를 좋아해서 회원가입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러다보니 돌아오는 것은 엄청난 양의 메일이었다. 가입환영 메일, 업데이트 메일, 프로모션 메일...

 

이메일의 홍수 속에 살았고 그렇게 받은 이메일 대부분은 스팸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렇다. 나는 누구보다도 스팸메일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받기만 한 게 아니라 하나하나 열어서 읽어봤다. 당연히 아쉬운 점이 많이 눈에 띄었고,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민을 해결할 동기는 부족했다. 이후 창업을 하며 웹서비스를 두 번 만들었지만 이메일마케팅과는 관련이 없었다.

 

참고로 'pengdo라는 아이디로 가입을 못 한 사이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 있더라. 중국의 모바일 메신저, Wechat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ZIP은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메일마케팅 서비스에 나선 이유

pengdo@slowalk.co.kr

현재 재직 중인 디자인솔루션 회사 슬로워크에서 사용하는 이메일이다. 이곳에 입사하면서 한국 이메일마케팅의 아쉬운 점을 해결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메일 뉴스레터 디자인 작업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게 됐다. 당시 많은 사람을 힘들게 만든 지점은 다음과 같았다. 

  • 고객(마케팅 실무자)이 별다른 고민 없이 '하던 대로' 뉴스레터 디자인을 의뢰한다.
  • 디자이너도 뉴스레터 작업하기를 꺼려한다. 포트폴리오에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텍스트 수정 같이 자잘한 피드백이 많이 오고가는데, 고객과 디자이너 모두에게 귀찮은 시간이다.
  • 제작을 완료한 뒤 발송하는 과정도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 쓸만한 이메일마케팅 툴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Mailchimp*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하나의 서비스가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전통적인 채널에 어떻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안 되고 있던 것을 잘 되게 만드는 것은 더 도전적이며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 두 가지 목표를 세우고 이메일마케팅 서비스, 스티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목표 1. 마케팅 실무자가 디자이너의 도움 없이도 마케팅 효과를 달성하는 이메일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 마케팅 효과를 달성하는 이메일이라는 것은 곧 소비자가 유용하다고 여기게 되는 이메일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스팸메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표 2. 마케팅 실무자가 이메일을 제작하고 발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그렇게 확보되는 시간을 분석과 개선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실무자의 물리적/정신적 업무 부담을 줄여서 더 나은 이메일을 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스티비는 2016년 7월 현재 무료 베타서비스 중이며, 자체적으로는 이메일마케팅 팁을 공유하는 뉴스레터를 꾸준히 발행하고있다. 

 

* 해외 이메일마케팅 업체, 뉴스레터 템플릿 등 여러 서비스를 제공한다. - PUBLY 

마케팅 실무자들이여, 이리 오라

이렇게 어릴 적부터 인터넷을 하며 스팸메일을 많이 받아 오던 경험이 이메일마케팅 비즈니스를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전에는 새로운 웹사이트에 방문하면 회원가입 링크가 어디 있나부터 찾아봤다. 지금은 이메일 뉴스레터 가입 양식부터 찾고 있다.

 

스티비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스팸으로 인식되던 한국의 마케팅 이메일들이 오명을 벗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케팅 실무자들은 불필요한 시간과 부담을 줄여서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도 스팸메일을 많이 받은 사람의 소망이다.

 

8월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The Email Design Conference(TEDC)에는 마케팅 이메일이 스팸메일로 인식되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컨퍼런스 참여 후 그곳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보고서와 워크숍으로 나누고자 한다. 한국의 이메일마케팅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