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것만 좋으란 법은 없다

Editor's comment

- 이 콘텐츠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이며, 실제 기업이나 프로젝트와 관련 없습니다.

킥오프 이후 다 함께 만나는 시간, '제작 OT'* 날이다. 보통 플래너 혹은 AE가 전략과 컨셉을 들고 제작팀에 OT를 주는 식이지만, 요즘은 클라이언트가 PT 준비에 많은 시간을 주지 않는 터라 AE, 플래너, 제작팀이 킥오프 시점부터 동시에 진도를 나가기도 한다.

* 카피라이터, 디자이너 등의 제작 인력이 크리에이티브 발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플래너 혹은 AE가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컨셉을 소개하고 협의하는 미팅

 

이럴 경우, PT 초반부터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이해도를 확보한 채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좋은 걸 들고 가야 하는 경쟁 PT의 성격상, 여러 가지 전략과 컨셉을 점검해보는 측면에서라도 이런 방식은 유리하다.

 

이번에는 AE와 플래너가 각기 생각을 정리해 오기로 했다. 대개 AE는 기존 클라이언트 관련 업무를 하느라, 전략과 컨셉 생각에만 집중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함께 고민을 해봐야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더 발전시킬 수 있기에 간단히라도 생각해오는 편이다. 다른 PT 건이 어제 막 끝난 제작팀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며 오늘은 듣기만 하겠다고 한다.
 

AE팀 김팀장님이 먼저 준비한 방향성을 보여주셨다.

재미있다 이거. 호러로 가면 되겠다. 다크 서클 무릎까지 내려온 애들이 12시 땡치면 우르르 건물 밖으로 나와서 리듬을 타고 냅다 달리는 거지. 무섭게 생긴 애들이 깔깔 웃으면서.

CD(Creative Director)*님 반응이 나쁘지 않다. 저 정도면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든다는 거다. 우리 팀 얘기는 해 보기도 전에 저런 반응이라니. 재미있는 건 나도 알겠다. 그런데 좁혔어도 너무 좁힌 거 아닌가? 특정 TPO와 리듬을 붙여준다는 접근은 좋지만, TPO 자체가 너무 특수하다. 무엇보다 한밤중에 전동킥보드를 타는 모습은 내가 이해한 리듬의 정서와 너무 멀다.

*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등의 제작 인력으로 구성된 제작팀의 리더로서 광고 제작물의 제작 진행을 주도하고 최종 퀄리티를 책임지는 사람

CD님 벌써 콘티 그리겠다. 이걸로 가면 되겠네. 저희 건 심심할 때 한번 보세요.

슬슬 조바심이 나는 나와는 달리 팀장님은 태연한 반응이다. 팀장님은 어떤 생각이실까? 설마 팀장님도 야근 좀비들이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내년부터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중소기업까지 적용된다는데 12시 퇴근이 웬 말이냐고 마음속으로만 외쳐본다.

 

플래너에게 이런 성격의 회의는 늘 어렵다. 플래너라면 당연히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또, 그 이야기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전략'이 업인 플래너에게는 아마 숙명 같은 것일 게다. PT에서 이기는 것 이상으로 우리 팀이 준비한 전략으로 이기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랄까.

무엇을 논의하는지 알아야, 논의를 완결할 수 있다

맞는 이야긴데, 너무 개념적이다.

우리 제안을 보고 나서, CD님이 어중간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멀멀해. 흘러가는 광고가 될 수 있어. 우리 '브랜드 필름'* 만드는 거 아니잖아. '미드나잇 좀비'처럼 하나라도 남겨야지.

* 세일즈 증대 등의 구체적인 마케팅 목표 달성을 위한 접근 이전에, 브랜드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하는 영상물. 보통 브랜드의 철학이나 탄생 배경, 비전 등을 담고 있다.

 

그래. 한 번에 OK 사인을 받고 넘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역시 야근 좀비가 너무 강했나 보다.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요. 카카오택시 안 잡히면 어떻게 하세요? 스마트콜하고, 안 되면 웨이고블루 해보고, 모범택시 해보고, 그러다 도저히 안 되면 블랙으로 넘어가고…. '리듬'도 더 비싸기 때문에 웨이고블루나 모범택시처럼 차선의 옵션이 될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걸 타려다가 없어서 타는 대체재가 되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지금 '미드나잇' 전략은 밤에 다른 킥보드 없으니깐 그때만이라도 이걸 타라는 이야기 같아요. 스스로 역할을 한정짓는 느낌이랄까. 낮에 다른 킥보드들 다 있을 때에도 '리듬'을 타고 싶게 만드는 게 저희가 해줘야 할 일 아닌가요?

괜히 나섰나 싶어서 팀장님을 쳐다봤다. 아직도 세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계신다. 뭐라도 말씀 좀 해주시지 무슨 생각이신 걸까.

맞아요. 구체적인 TPO를 타깃팅하는 전략은 사실 경쟁 열위에 있는 브랜드가 사용하는 전략이잖아요. 마케팅 예산도 부족하고, 시장에서 존재감도 별로 없을 때 효율을 높이기 위한. 예를 들어, 샴푸·바디워시·세정제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소기업이 광고를 한다고 했을 때, 웬만한 포지셔닝으로는 대기업을 이기기 힘드니 '아기 엄마를 위한 제품' 뭐 이런 류의 포지셔닝부터 시작하는 거죠.

다급한 내 표정을 보신 팀장님이 덧붙였다. 아 역시, 정리 보스 우리 팀장님. 이 논의를 '타깃'을 선택하는 논의로 만드셨다.

 

회의 아젠다 1. 타깃 전략: 좁게 vs. 넓게?

우리 팀 전략은 전동킥보드를 탈 마음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타깃을 확대하는 전략이라면, AE팀의 것은 완전 반대로 '심야 사용자'로 타깃을 좁히는 전략이다. 글로벌 1위, 메이저 중에서도 가장 메이저인 '리듬'이 굳이 타깃을 좁힐 이유가 있을까? 금수저 아드님이 상속을 거절하고 단칸방에서부터 시작해보겠다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선택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과제를 읽어보면 '리듬'에겐 그런 마음이 없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 안건은 사실 싸움이 안 된다. 한국에서도 1위 사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넓게 가야 맞다.

그 말은 맞다. 야근 좀비는 너무 좁기는 하네.

CD님도 눈치채셨나 보다.

아니 뭐 나도 우아한 거 좋아해. 일상의 여유, 뭐 그런 거 그림 좋잖아. 그런데 그냥 힙스터들의 라이프 정도로 보이지 않겠어? 내가 타야 하는 이유, 명분이 분명하지가 않다고. 별다른 전략 없이 그냥 좋은 그림 보여주자고 얘기하는 걸로 느껴질 수 있어. 한가해 보여. 좀 째고 들어갈 필요는 없을까?

김팀장님의 변론이다.

저는 좀 생각이 다른데. 에어비앤비가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말하면, 한가하게 느껴지세요?

그렇진 않네. 왜지?

오히려 굉장히 도전적인 이야기죠.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고 말하면, 소비자 입장에서 동사가 바뀌어요. '관광한다'에서 '산다'로.

그런데 소비자가 이 동사에 공감하면 이 도전은 성공하고, 성공하자마자 선두에 서는 거예요. '리듬'에 주어진 과제도 같은 거 같아요. '이동시간'이라는 일상의 아름다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시간을, 일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시간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꿔주는 게 '리듬'이잖아요. CD님,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팀장님이 준비해놓자고 하셨던 영상을 틀었다.

 

* Discover #Paris with a #scooter in #4k ©LEARN FRENCH WITH VINCENT

어떤 유튜버가 스쿠터 타고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찍은 건데요. 되게 일상적인 길을 가지만, 길을 마음껏 향유하고 경험하는 느낌이에요. 적당히 달리는 즐거움도 있고, 날씨도 좋고, 풍경도 눈에 잘 들어오고…. 사소한 일상인데 조금 더 재미있고 행복해 보인달까요?

팀장님이 곧바로 말을 이어주셨다.

전동킥보드는 단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게 전부인 사람들이 아니라, 목적지에 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의 것이 되는 거죠. 동사가 '이동한다'에서 '경험한다'로 바뀜으로써.

동사를 바꾸면 시장도, 경쟁 포인트도 바뀐다

회의 아젠다 2. 컨셉을 표현하는 동사: 이동한다 vs. 경험한다?

이동에서 경험…. 자기야 방금 그 영상 다시 봐봐. 일종의 여행인가 이거?

CD님이 만년필을 들고 '여행'이라는 단어를 크게 적는다.

네. 거리에서 배우는 거예요. 즐거움이든, 풍경이든, 날씨도, 깨달음도, 뭐든요.

아니 근데 이거 파리라서 좋아 보이는 거 아닌가?

김 팀장님은 아직 동의 못하시나 보다.

아니야, 나는 서울도 좋을 것 같은데? 나 저 영상 보니까 타고 싶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CD님이 웃으며 몸을 기대신다.

그래, 할 수 있겠다.

내 것은 못 팔아도 될 놈을 되게 하는 능력

PT에 임하는 플래너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과업은 커뮤니케이션 컨셉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PT 과제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무엇인지 사실상의 결론을 내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짧은 시간 동안 브랜드와 브랜드가 처한 상황, 시장의 니즈를 최대한 면밀히 진단한 후 가장 잘 들을 법한 약을 처방해야 한다. 시험 삼아 처방해주는 약은 없듯, 가능성 있는 몇몇 방향성을 타진해보자는 자세는 플래너가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때문에 플래너는 늘 의심하고 반문하는 자들을 만난다. 특히 해당 컨셉으로 제작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제작팀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의 한껏 벼려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서 하루 만에 더 좋은 컨셉을 도출해야 하거나 그 과업조차 제작팀에 넘겨줘야 하는 것. 어느 쪽이건 재앙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컨셉을 잘 파는 것도 플래너의 역할이다. 이것이 맞다는 확신이 드는 컨셉이라면, 그 확신을 다른 이들도 공감할 수 있게끔 다각도로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플래너가 자신의 컨셉을 파는 것에만 급급해서 가장 적합한 컨셉을 선택하는 일과 내 컨셉을 파는 일의 균형을 잃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플래너야 자신의 컨셉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법이지만, 사실 PT에서 이기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플래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성격이 전혀 다른 복수의 컨셉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오면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기 마련인데, 이럴 때 논의의 의제를 명확히 해주는 역할을 플래너가 해 주어야 한다.

 

이 논의가 결국 무엇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인지, 각각의 컨셉이 어떤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른지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이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생산적인 논의와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회의 중에는 우리 팀장님이 이런 역할을 하셨다. '미드나잇 모빌리티'와 '리듬, 일상이 되다' 중 어떤 컨셉이 더 나은가에 대한 논의를, 컨셉 표현 자체가 주는 인상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목표 타깃을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Day 4. Lessons Learned
: 컨셉 회의는 플래너가 특히 주도성을 발휘해야 하는 회의이다.

가장 중요한 플래너의 역할은 물론 경쟁력 있는 컨셉을 가져가는 것이다. 내 컨셉은 브랜드를 설명하는 문장의 '동사, 목적어, 주어' 중 무엇을 바꾸었는가? 그 변화는 매력적인가? 강력한 컨셉은 '동사, 목적어, 주어' 중 하나는 바꾸기 마련이다.

또한 회의 중에 나올만한 질문들을 미리 시뮬레이션해놓자. 이 회의에서 합의되는 바가 곧 전략의 골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컨셉 회의 중에는 여러 첨예한 질문들이 오갈 수밖에 없다. 이는 전략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더불어 컨셉에 대한 '무책임한 감상문'만 오가지 않도록 플래너는 토론의 아젠다를 분명히 해줄 필요가 있다. 논의의 맥을 짚어가며 분명한 결론을 이끌어낼 것.

컨셉의 자격은 논리적 완결성이 아니라,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이다.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클라이언트의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