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Editor's Comment

- 본 콘텐츠는 2012년 10월에 발간된 <쿡쿡: 누들로드 PD의 세계 최고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의 본문 내용을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

방송국 복귀 첫날. 이 년 만에 돌아온 자리, 창밖으로 보이는 여의도의 풍경은 그대론데 동료들의 모습은 조금씩 변한 것 같았다. 동기들은 조직의 관리자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한 듯 보였고 후배들도 중견 프로듀서로서 관록이 제대로 붙은 모습이었다. 40대의 나이, 방송국에서의 2년 공백은 피디로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잃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인생이라는 요리에는 모두가 따라야 할 정해진 레시피란 없으며, 오직 자기가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레시피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다큐멘터리국 한구석 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써보았다. 나도 모르게 타자를 치는 손이 빨라졌다. 이 년 동안 잠재워두었던 프로듀서로서의 욕망이 모니터 속 백지를 새까맣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내 가방을 가득 채운 외장 하드들, '르 코르동 블뢰'에서의 모든 기억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르 코르동 블뢰의 생활을 담은 <셰프의 탄생—500일의 레시피>의 촬영원본들을 하나 하나 열어보기 시작했다. 지각을 모면하기 위해 런던 거리를 헐레벌떡 뛰는 나, 요리학교 실습실에서 친구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음식을 만드는 나, 학교가 파한 뒤 친구들과 펍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나…. 기분이 묘했다. 벌거벗은 내 몸을 보는 느낌이었다.

 

모든 장면에서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특히 가자미 요리를 만드는 장면에선 그 순간의 타들어가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괴롭기까지 했다. 제한 시간은 일분일초 다가오고, 요리는 완성되지 않고, 등 뒤에선 셰프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고…… 급기야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셰프 앞에서 나는 쩔쩔매며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빛과 긴장감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까지 카메라에 잡혀 아주 리얼했다. 방송국에서 <셰프의 탄생>을 편집하고 있는 현재의 나와, 모니터 속 르 코르동 블뢰 교실에 앉아 있는 예전의 나는, 같은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